귀환천화 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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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498회 작성일소설 읽기 : 귀환천화 9화
9화
마침 풍혼문이 운영하는 풍영표국에 동쪽으로 가는 표행이 예정되어 있었다.
대표두 유철응을 위시하여 표사 열다섯이 나섰고, 표물을 맡긴 상단에서도 십여 명의 호위무사를 보내는 제법 큰 표행이었다.
목적지는 남경.
소항진은 그 표행에 혁무천과 은설을 포함시킨 것은 물론이고, 자신들도 함께 가겠다고 했다.
표국주이자 그의 숙부인 소광문은 그 말을 듣고 인상을 구겼다. 소항진보다는 소하민 때문이었다.
만약 두 사람을 보냈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날벼락은 그에게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문주님의 허락을 맡고 와라.”
소광문의 말에 소항진이 자신 있게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숙부. 아마 제가 표행에 나선다는 걸 알면 아버님께서도 쌍수 들고 환영하실 겁니다.”
소광문도 그럴 거라 생각했다.
그동안 탱자탱자 놀면서 말썽만 피운 소항진이다. 그나마 무공이 강해서 호북십삼호 안에 들고, 가문의 명예에 큰 누를 끼치지 않아서 놔두고 있는 것뿐.
그런 게으름뱅이 말썽꾼이 일을 하겠다는데 어찌 말릴까.
문제는 소하민이다.
소청문은 그녀를 애지중지했다. 아마 장거리 표행에 따라나선다는 걸 알면 당장 쫓아올 게 분명했다.
“너야 상관없다만, 민아는 허락하지 않을 거다.”
하지만 소하민은 혼자 떨어질 마음이 없었다.
“아버지나 숙부가 뭐라 해도 따라갈 거예요.”
“네 아버지가 알면…….”
“저도 이제 스물두 살이에요. 가문의 사람은 스무 살이 넘으면 남녀 구별 없이 한번쯤 강호행을 해야만 하죠. 저는 이번 기회에 강호행을 해볼 생각이에요.”
사실이 그러했다. 소하민이 그런 이유로 따라가겠다고 하면 소청문도 말릴 수 없다.
더구나 표행과 함께라면 안전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걱정이 덜어질 터. 소청문도 허락할 가능성이 컸다.
“좋다. 그럼 문주님께는 그리 알리겠다. 그래도 반대하신다면 따라갈 수 없다.”
“걱정 마세요. 아버지는 반대하시지 않을 거예요.”
소하민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는 자신의 고집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반대하면 자신이 어떻게 할 거라는 것도.
소항진과 소하민이 허락을 구하고 있을 때, 혁무천은 은설과 함께 객당에 있었다.
“구강까지만 가도 은자 석 냥을 준대요. 그 정도면 한동안 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예요.”
은설은 신이 나 있었다.
보름이 채 안 걸리는 표행에 대한 대가로 은자 석 냥은 적은 금액이 아니었다. 정식 표사나 받을 수 있는 금액인 것이다.
“아버지의 친구라는 사람이 구강에 사는 것은 확실해?”
“저도 어머니에게 말만 들었어요. 가서 찾아봐야죠.”
“만약 없으면 어떡할 거냐?”
“그때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해 볼래요.”
짐짓 밝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지만, 은설의 두 눈 깊은 곳에는 불안감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차피 아버지를 찾을 방법이 달리 없었다. 갈 곳도 없었다. 구강에라도 가지 않으면 뭘 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녀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차를 마시고 있는 혁무천을 바라보며 작은 주먹을 꼭 쥐었다.
‘못 찾으면 오빠나 따라다니지 뭐.’
겉으로 보기엔 무뚝뚝해도 속으로는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나 몰라라 떼어놓고 매몰차게 돌아설 사람은 아닌 듯했다.
한편, 혁무천도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고향에 가봐야 이미 집은 남 차지가 되었을 거고, 아는 사람도 없을 텐데……’
백 년 넘게 지나지 않았는가 말이다. 광천곡도 그 지경인데 집인들 온전할까.
가족들의 극락왕생을 비는 일도 꼭 집에 가서 하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말이다.
‘이 아이의 아버지 찾는 일이나 도와줄까?’
그러면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해질 것 같다.
어쨌든 마도가 득세하고, 그로 인해서 은설의 집안이 망한 것에 자신도 눈곱만큼은 책임이 있으니까.
심심하지도 않을 것 같고.
‘그래, 고아나 다름없는 아이가 이 험한 세상을 돌아다니려면 오죽 힘들까. 내가 조금 도와주자.’
결정을 내리자 마음이 편해졌다.
그때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 은 소저, 허락이 떨어졌소. 내일 아침에 출발할 거요.”
“호호호, 무 공자, 저희도 함께 가기로 했어요.”
혁무천의 이마에 가느다란 줄이 그어졌다.
‘취소하고 따로 갈까?’
그의 마음도 모르고 소항진이 말했다.
“어차피 이것도 인연인데, 서로에 대해서 조금 더 알아두는 게 어떻겠소. 나는 올해로 스물여섯이오. 무 형은 나이가 어떻게 되시오?”
혁무천의 표정이 약간 펴졌다.
“나보다 몇 살 아래군.”
차마 백서른 살이 넘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소항진의 얼굴이 보일 듯 말 듯 일그러졌다.
‘제길, 많아봐야 나와 비슷할 줄 알았는데…….’
그래서 나이를 따졌는데 자신보다 많다니.
자칫하면 나이로 찍어 누르려다 팔자에 없는 형이 하나 생길 판.
소항진은 나름대로 노련하게 대처했다.
“하, 하, 하. 그러셨군요. 워낙 젊게 보여서 저보다 아래인 줄 알았습니다. 사실 누가 봐도 스물다섯을 넘지는 않아 보이니 말입니다.”
믿기 힘들다는 뜻이 은근히 포함된 말이었다.
혁무천은 그의 마음을 간파하고 짧게 대꾸했다.
“그대에게 형 소리 강요하고 싶은 마음 없으니까, 좋을 대로 불러.”
그제야 소항진의 표정이 다시 밝아졌다.
“뭐, 정 그러시다면야…….”
***
다음 날 아침, 표행은 표물을 풍양표국이 운영하는 상선에 싣고 형주를 출발했다.
표물의 주인은 정화상단.
그들은 호북의 서쪽 고산지역에서 수집한 약초를 남경에 보내 비싼 값에 파는 게 주된 사업이라고 했다.
이번 표물 역시 약초였다. 마차 세 대 분량으로 은자 삼천 냥이 넘는 가치가 있다고 했다.
삼십 명 넘는 인원이 호위하기에는 과한 감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표물의 주인이 안전한 운송을 원하니 마다할 이유도 없었다.
표사들은 갑자기 끼어든 혁무천과 은설을 못마땅한 시선으로 대했다.
소항진과 소하민이 억지로 우겨서 합류한 사람들 아닌가. 동료로서 대하기에는 거부감이 있을 수밖에.
혁무천은 그들의 마음을 짐작하고도 모른 척했다. 오히려 그들보다는 상단의 호위무사라는 자들이 더 신경 쓰였다.
‘일개 상단의 호위무사 중에 절정고수가 셋이나 있다니.’
상단의 호위무사는 모두 열둘. 그들 중 수장인 여충민이라는 자 외에도 절정 경지에 오른 고수가 둘이나 더 있었다.
마른 몸매에 짙은 청의를 입은 중년인과 각진 얼굴을 한 삼십 대 장한.
그들은 기운을 안으로 감추고 있어서 언뜻 보면 평범한 무사처럼 보였다.
물론 표행에 고수가 많아서 나쁠 것은 없었다. 문제는 실력을 숨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평범한 표행은 아니라는 건가?’
신경이 쓰이는 것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상선은 일반손님도 태웠는데, 나중에 손님으로 배에 탄 자가 있었다.
나이는 삼십 대 초반쯤. 키가 제법 컸고, 몸이 대나무처럼 호리호리했다.
눈은 유난히 작아서 콩알만 했는데, 그래선지 눈동자를 가늘게 두른 흰자위가 테두리처럼 보여서 묘한 느낌이었다.
게다가 더 신경 쓰이는 것은 그의 무위였다.
비록 선실로 들어가는 사이 잠깐 봤을 뿐이지만, 실력을 가늠하기에 부족하지 않은 시간이었다.
‘재미있게 생긴 자군.’
형주를 출발한 상선은 장강을 타고 빠르게 내려갔다.
혁무천은 자신의 임무에만 충실했다.
그로서는 참으로 꼴같잖은 임무였지만, 소하민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리고 특히, 은설에게 추근대는 소항진의 접근을 차단하려면 임무를 강조하는 게 최고였다.
출발 전, 대표두 유철응이 소항진과 소하민이 동행한다는 걸 알고 미리 경고를 보낸 터였다.
“조카들이 임무를 방해하면 다음 항구에서 내려놓을 것이니 그리 알아라.”
그는 풍양표국에 세 명뿐인 대표두 중 하나였다. 소청문이나 소광문과 호형호제하는 사이여서 소항진과 소하민도 그의 말을 무시하지 못했다.
혁무천은 그 상황을 적절히 이용했다.
결국 소항진과 소하민은 한 시진에 일각 정도만 그와 은설에게 말을 붙일 수 있었다.
***
배는 이틀 후 석양이 질 무렵 악양에 도착했다.
배에는 표물 외에도 많은 물건이 실려 있었다. 악양에 내려줄 물건만 해도 마차 두어 대 분량은 되었다.
혁무천과 은설은 선원들이 배에서 물건을 내리는 동안 표사들과 함께 표물을 호위했다.
배에서 물건이 거의 다 내려졌을 때 소하민이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소매, 공자, 우리 악양루에 구경 가지 않을래요?”
저 멀리 악양루가 보였다. 석양빛을 받은 악양루는 온통 황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지금은 임무 수행 중이야.”
“어차피 교대로 휴식시간이 있으니 잠깐 갔다 오는 것은 괜찮아요.”
소항진도 한마디 거들었다.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 아침에 출발할 거요. 유 숙부께 말해둘 테니 걱정 마시오.”
혁무천도 사실 종일 배에서만 있다 보니 지루하던 참이었다.
허락이 떨어진다면 못 갈 것도 없었다.
그는 은설의 의중을 물어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물어볼 것도 없었다.
은설도 구경 가고 싶어서, 먹이를 기다리는 제비새끼처럼 목을 빼고 그의 허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돌린 그가 소항진에게 툭 쏘듯 말했다.
“그럼 대표두의 허락부터 받아와.”
다행히 유철응은 순순히 허락해주었다.
예상과 달리 착실하게 임무를 수행한 혁무천과 은설에 대한 배려였다.
소항진 남매만 믿고 임무를 소홀히 할까 싶었는데, 일반 표사보다 더 충실했다.
게다가 덤으로 합류한 인원 아닌가. 한 시진 정도 시간을 주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허락을 받은 네 사람은 밝은 표정으로 악양 구경에 나섰다.
무뚝뚝한 혁무천의 얼굴도 그때만큼은 밝게 느껴졌다. 어떤 때는 살짝 웃음도 떠올랐고.
그 바람에 은설과 소하민은 악양 구경보다 그의 얼굴을 힐끔거리느라 더 정신이 없었다.
‘우와! 오빠가 웃으니까 진짜 죽인다.’
‘어머, 어머, 어쩜…….’
혁무천도 그녀들의 시선을 눈치 채고 이마를 찌푸렸다.
“뭘 그렇게 봐?”
은설이 입술을 삐죽였다.
‘쳇, 본다고 얼굴이 닳나 뭐…….’
그때만 해도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악양루에 도착했을 때 역시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은설은 신이 나서 얼굴에 함박웃음이 피어나 있었다.
그런데 악양루 안으로 들어가려던 혁무천이 멈칫하더니 이마를 좁혔다.
그 직후 악양루 내부 위쪽에서 고함소리가 들렸다.
“이놈!”
“그놈 잡아!”
“크억!”
와장창!
고함, 비명에 이어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악양루 안에서 바깥으로 날아가는 게 보였다.
“아래쪽을 살펴봐라! 놈들의 일행이 있을지 모른다!”
몇 사람이 위에서 우르르 내려왔다.
혁무천 일행은 무슨 일인가 싶어서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 사이 밑으로 내려온 무사 칠팔 명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무기를 찬 그들은 형형한 안광이 일렁이는 눈으로 혁무천 일행을 살펴보았다.
그들 중 삼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자가 물었다.
“어디서 온 자들이냐?”
윽박지르는 말투에 곱게 대할 혁무천이 아니었다.
“항구에서.”
“뭐?”
“더 할 말 없으면 비켜주시지. 우린 위로 올라갈 거니까. 위에서 석양을 구경하고 싶거든.”
삼십 대 무사의 눈초리가 역팔자로 꺾어졌다.
“이 자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