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천화 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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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475회 작성일소설 읽기 : 귀환천화 7화
7화
안 될 것은 없다.
자신은 긴 여행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
가족들의 극락왕생을 비는 것 외에는 특별히 할 일도 없지 않은가.
그리고 소녀가 싫지 않았다.
“마음대로 해. 어차피 구강을 지나쳐가야 하니까. 그런데 내가 무섭지 않나?”
소녀의 표정이 환하게 펴졌다.
“소협이 무서운 사람이면, 세상사람 모두 무서운 사람밖에 없을 거예요. 고마워요, 동행을 허락해줘서.”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되어도 그런 말이 나올까?
혁무천은 씁쓸한 마음으로 고기 한 점을 잘라 입속에 넣었다.
“저는 은설이라고 해요.”
소녀가 갑자기 이름을 밝혔다.
자신이 이름을 밝혔으니 당신도 밝혀라, 그런 뜻처럼 들렸다.
“나는…… 무천이다.”
혁무천은 마지못한 표정으로 이름만 말해주었다. 두 번째 대답해준 이름인데 제법 그럴 듯하게 느껴졌다.
이번에는 그가 물었다.
“구강에는 무슨 일로 가는 거지? 표행이 그곳으로 향하고 있나?”
소녀, 은설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를 찾으려고요.”
“아버지를 찾아? 아버지가 구강에 있나?”
은설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나뭇가지로 노루고기를 쿡쿡 찔러댔다.
그러다 나뭇가지를 내려놓고 혁무천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뇨.”
“그런데 구강은 왜……?”
“아버지의 친구가 구강 근처에 사신다고 했어요. 그분을 찾으면 아버지의 행방을 알지도 모르거든요.”
혁무천은 모닥불에 나무 몇 조각을 더 넣었다.
불길 너머로 은설의 표정이 보였다. 반드시 아버지를 찾겠다는 강한 의지가 서려 있는 표정이었다.
형주에서 구강까지는 이천 리 길. 어린 소녀 혼자 가기에는 너무 먼 거리다.
어쩌면 그래서 표사보조를 자처한 것일지도……. 비록 산적의 습격으로 인해 위기를 겪고 다시 혼자가 되었지만.
“용기는 가상하다만, 구강까지 가려면 쉽지 않을 거다.”
“저도 알아요. 마도 놈들이 없는 곳이 없으니까요. 그 나쁜 놈들만 아니어도 힘이 덜 들 텐데…….”
“마도인들을 많이 싫어하나 보군.”
“당연히 싫죠. 우리 집안은 오래 전에 마도 놈들에게 당해서 망했어요.”
“…….”
괜히 물어보았나?
혁무천은 후회했지만, 말릴 사이도 없이 은설의 입에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아버지가 어머니와 저를 데리고 겨우 탈출했는데, 아버지는 힘을 길러서 복수하겠다며 어머니와 저를 남겨두고 떠났어요. 그 후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셨죠. 그래서 아버지를 찾으려고 나선 거예요.”
“…….”
혁무천은 아무런 말도 않고 고기만 잘랐다. 자신과 상관없는 일인데도 왠지 가슴 어딘가에 가시가 박힌 듯했다.
그런데 은설이 불쑥 말을 덧붙여 투덜댔다.
“아주 옛날 옛날에 마천제란 미친놈이 만인혈사를 일으키지만 않았어도 강호가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
고기를 자르던 혁무천이 멈칫했다.
그랬나? 자신이 미쳐서 날뛰었던가?
부정할 수도 없었다. 그런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니까.
그래도 순순히 인정하기에는 자신도 할 말이 많았다.
“아무리 그……가 미쳐서 날뛰었다고 해도, 어디 그자 때문에 정파가 몰락했겠냐?”
“소협은 그자에 대한 이야기도 듣지 못했어요? 그자의 손에 죽은 정파의 무사가 만 명이나 되었대요. 무림 역사 이래 그런 악랄한 살인귀는 아마 없었을 거예요.”
은설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눈초리도 올라갔다.
불만이 많은 모양이다.
그런데 자신이 그렇게 많이 죽였던가?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만 명은 아니다.
한 천 명……? 아니 이천 명쯤이라면 또 몰라도…….
‘소문이 너무 과장되었군.’
그렇다고 해서 그 말을 할 수도 없고…….
혁무천은 죄 없는 노루의 뒷다리만 소도로 쿡쿡 찔렀다.
그 동안에도 은설의 입은 쉬지 않았다. 고기를 먹고 힘이 난 듯했다.
“인상이 진짜 무시무시하게 생겼다던데…… 어우! 아마 야차보다도 더 무섭고 못생긴 얼굴이었을 게 분명해요.”
귀엽게 생긴 입술 사이로 침이 튀었다. 때로는 침뿐만 아니라 고기쪼가리가 함께 튀어나왔다.
혁무천은 변명하고 싶지 않았지만, 최소한 그 말에 대해서만큼은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못생기거나 무섭게 생겼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은설이 냉랭히 맞받아쳤다.
“흥! 삼두육비의 괴물도 그자를 보면 꼼짝을 못했대요. 얼마나 무섭게 생겼으면 아수라라고 불렸겠어요? 얼굴도 진짜 진짜 더럽게 못 생겼을 걸요?”
혁무천은 더 따지지 않았다.
못생겼으면 어떻고, 무섭게 생겼으면 어떤가.
그러나 한 가지만큼은 확실히 이해시키고 싶었다. 은설처럼 어린 소녀가 잘못 전해진 소문을 듣고 자신을 오해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 자도 사연이 있어서 정파사람들을 죽였다고 하던데. 한이 맺혀서 복수를 했다고…….”
“원한 때문에 무작정 사람을 죽인다면 이 대륙에 살아남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아무리 원한이 깊어도 복수를 하려 했으면 당사자들에게만 했어야죠.”
“당사자만 죽인다 해서 끝이 나던가? 그자의 가족들이 또 복수하겠다고 검을 들 텐데.”
“그래서 옛날부터 그런 말이 있잖아요. 복수의 윤회는 끝이 없다고. 결국은 누가 먼저 검을 내려놓고 용서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거죠. 쉽지는 않은 일이겠지만.”
“…….”
“생각해 보세요. 그자의 원한과 상관없이 죽은 사람은 무슨 죄예요? 저는 그렇게 죽은 사람의 가족들이 얼마나 가슴 아팠을지,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요.”
그 말에는 마땅히 대꾸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어린 소녀의 말이라지만 옳은 건 옳은 거니까.
혁무천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왜 자신은 그때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였을까.
왜?
‘내가 정말 피에 미친 살인귀였나?’
혁무천은 밤새 모닥불을 피웠다.
은설이 무릎에 얼굴을 묻고 앉은 채 잠들어 있었다. 일행을 잃고 헤매느라 지친 듯했다.
사실 은설이 그의 눈에는 꼬마처럼 보였지만, 열여덟 살이면 혼인을 한다 해도 아무렇지 않은 나이다.
그런 다 큰 처녀가 생판 처음 본 남자 앞에서 아무렇게나 잠들다니.
밤바람이 제법 싸늘해서 불이 약해지면 몸 상하기 딱 좋은 날씨. 그는 모닥불의 불기를 적당히 유지시켰다.
‘어쩌면 내가 오히려 빚을 졌는지도 모르겠군.’
은설이 아니었다면 아직도 모르고 있었을지 모른다. 자신에게 자신도 모르는 문제가 있었다는 걸.
아주 오래 전부터.
혁무천은 모닥불을 슬쩍 뒤집었다.
시뻘건 숯불이 속살처럼 드러났다.
‘어쩌면…… 조부님은 아실지도…….’
답답한 것은 대답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동이 틀 때쯤 노루의 뒷다리 하나를 더 구웠다.
고기가 다 익었을 때 은설이 깨어났다.
부스스 고개를 든 그녀는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도 잠시, 어젯밤의 일을 떠올린 그녀는 머쓱한 듯 배시시 웃었다.
“어제 하루 종일 헤맸더니 피곤했나 봐요.”
피곤도 하겠지. 저 쪼그만 입으로 그렇게 씹고, 떠들어댔으니.
“물 좀 마시고 씻어. 아침 먹고 나면 바로 출발할 거다.”
은설은 일어나서 물가로 가더니 얼굴을 씻고 돌아왔다.
그 사이 혁무천은 다 익은 고기를 먹기 좋게 잘라놓았다.
은설은 눈빛을 빛내며 고기를 먹어댔다. 그 작은 몸 어디로 들어가는지 노루 고기 두 주먹이 순식간에 입 안으로 사라졌다.
혁무천은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른 느낌이었다.
‘진짜 잘 먹는군.’
***
정오가 다 된 시각. 두 사람이 모래바람을 등에 지고 형주성 성문을 통과했다.
검은 장포를 걸친 청년과 찢어진 경장을 입은 소녀, 혁무천과 은설이었다.
“무 소협, 돈 있어요?”
대로를 걷던 중에 은설이 물었다.
“돈? 없는데?”
혁무천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주머니 안에 들어 있던 은자는 의창에서 이미 바닥났다. 사실 노숙을 하며 노루를 잡아서 구워먹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은설이 걸음을 멈추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저도 몇 푼 없는데…….”
“그럼 어떡하지?”
“일단 간단하게 식사하고, 돈 벌 수 있는 일을 알아봐야 할 것 같아요. 돈 없이는 구강까지 갈 수 없으니까요.”
돈을 번다?
생소한 말이었다.
혁무천은 스스로 돈을 벌어본 적이 없었다.
과거에도 금전과 관계된 일은 조부의 수하들이 모두 해결했으니까.
한마디로 사회생활은 혁무천이 은설보다 한참 하수였다.
‘주머니 속의 물건을 팔면 돈이 좀 될 것 같은데…….’
주머니 안에는 빛이 나는 구슬 외에도 몇 가지 물건이 더 들어 있었다.
그 물건들은 오래 전에 단절된 과거와 그를 연결시켜주는 상징과도 같았다. 노자를 마련하겠답시고 팔기에는 너무 아쉬웠다.
그래서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방법을 말해보았다.
“성을 나가서 산적들이라도 때려잡을까? 아니면 뒷골목 흑도 놈들이라도. 그놈들만 털어도 노자 정도는 마련할 수 있을 텐데.”
은설이 단칼에 잘랐다.
“그자들의 더러운 돈은 필요 없어요. 돈은 땀 흘리며 일을 해서 벌었을 때 가치가 있는 법이에요.”
“그럼 어떤 일을 해서 돈을 벌지?”
“지금부터 알아봐야죠.”
은설이 나름 비장한 표정으로 말하더니 슬쩍 고개를 돌려서 혁무천을 바라보았다.
“실력이 어느 정도 돼요?”
뭐라고 말할까.
―천하에 내 적수는 없다!
아니면,
―나 혼자 절정고수 스무 명을 일각 만에 죽인 적도 있지!
라고 말할까?
아니지, 그렇게 말하면 미친놈 취급할지도 모른다.
며칠 전보다 나아졌다 하나 아직은 공력이 오륙성 정도밖에 돌아오지 않은 상태고.
물론 그 정도만으로도 남에게 지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그래서 가장 단순하게 대답했다.
“남에게 당하지 않을 정도는 된다.”
은설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름대로 판단해보았다.
‘혼자 노루를 잡을 정도면 삼류 수준은 벗어났다는 말인데…….’
자신은 진짜 삼류지만 그래도 일반인 두어 명은 감당할 수 있다.
‘아쉬운 대로 일자리는 구할 수 있겠어.’
결론을 내린 그녀는 한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좋아요. 그럼 식사부터 하고 일자리를 찾아봐요.”
***
은설이 가진 돈은 달랑 동전 네 문.
혁무천과 은설은 구석진 곳에 있는 소면집에 들어갔다.
허름한 건물은 금방 기둥이 부러지고 천장이 무너질 것 같았다. 그래도 소면 맛 하나는 끝내주게 맛있었다.
특히 육수가 감칠 나서 은설은 조금 더 얻어 마셨다.
“캬! 정말 맛있네요.”
은설은 감탄사를 연발하며 육수를 한 방울도 안 남기고 다 핥아 먹었다.
혁무천은 그 모습을 무심한 표정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그의 그릇 역시 소면 가닥은커녕 국물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도 더 달라고 할까?’
하지만 체면이 있지, 차마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한 그릇 더 사먹자니 돈이 없고.
‘구슬이라도 팔 걸 그랬나?’
빛이 나는 구슬이니 제법 비쌀지도 모르는데.
그가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손님 둘이 들어왔다.
“문을 연 지는 며칠 안 됐는데, 소면 하나는 진짜 맛있다니까. 너도 먹어보면 다시 오자고 할 거다.”
“쳇, 맛있어봐야 소면이 소면이지 뭐.”
낭랑한 목소리와 토라진 꾀꼬리처럼 맑은 목소리. 이십 대 중반의 준수한 청년과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청년은 감색 비단으로 만든 무복을 입었고, 등에는 금색 수실이 달린 검을 매고 있었다.
여인은 백색비단에 붉은 모란이 수놓아진 경장을 입고 있었는데, 화사한 얼굴과 잘 어울렸다.
“다른 집 소면과는 완전 다르다니까.”
“어휴, 한 대 툭 치면 천장이 무너지겠네. 오빠는 정말 여기서 소면이 먹고 싶어?”
“일단 먹어보고 평가해. 주인장, 여기 소면 두 그릇 주게!”
“알았수. 조금만 기다리슈.”
소면집 주인이 찌푸려진 얼굴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는 사십 대 중반 정도로 보였는데, 얼굴에 면발이 달라붙은 듯 가느다란 상흔이 몇 가닥 그어져 있었다.
나름 성깔 좀 있는 인상.
아마 평소였다면 여인의 말을 듣고 한마디 쏘아붙였을 그였다.
―먹기 싫은 사람에게는 안 파니까, 꺼져!
그러나 오늘은 꾹 참았다. 청년과 여인의 정체를 알기 때문이었다.
“응?”
청년이 달랑 탁자 네 개밖에 없는 소면집 안을 둘러보다 시선을 한 곳에 고정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