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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천화 6화

무료소설 귀환천하: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311회 작성일

소설 읽기 : 귀환천화 6화

6화

 

 

침묵의 시간이 반각쯤 지나자, 점소이가 요리와 술을 가져왔다.

혁무천은 요리를 묵묵히 먹으며 술도 한 잔 곁들였다.

술병을 기울여서 잔을 채운 그는 독한 화주를 천천히 입안으로 흘려 넣었다.

오랜만에 마시는 술이 목구멍을 저릿하게 자극했다.

“술을 마실 줄 모르는군.”

건너편의 청년이 한마디 던졌다.

“아주 오랜만에 마시는 술이거든.”

혁무천이 무심한 어조로 말하고는 다시 잔을 채웠다.

저자는 알까? 자신이 백 년 만에 술을 마신다는 걸.

실제 느끼고 있는 세월은 한 달에 불과하지만, 몸은 아니었다.

“술은 좋은 거지. 쓸데없는 기억을 잊게 해주니까.”

청년이 냉소를 지으며 말하고는, 술잔을 목구멍 안으로 시원하게 털어 넣었다.

혁무천은 그의 말에서 어떤 아픔이 느껴졌다. 무겁게 가라앉은 표정에도 즐거운 기색이 눈곱만치도 없었다.

잘해야 이십 대 중반인 자가 무엇 때문에 세상을 다 잃은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술에 취해 있는 걸까.

탁.

술잔을 내려놓은 청년이 충혈된 눈으로 혁무천을 바라보았다.

“내가 한심하게 보이는 모양이군.”

“조금은.”

“훗, 솔직해서 좋군.”

어깨를 들썩이며 헛웃음을 지은 청년이 불쑥 말했다.

“나는 장평이야. 그대는?”

혁무천은 잠시 시간을 두고 대답했다.

“무천.”

이름을 들은 것으로 만족한 듯 그 후로 청년은 말을 걸지 않았다.

나이, 고향, 사문 등등 일반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그 어느 것도 묻지 않았다.

혁무천도 말없이 식사에 열중했다. 간간이 술잔을 비우며.

그렇게 식사를 마쳤을 때, 청년의 술병도 바닥을 드러냈다.

먼저 일어난 사람은 청년이었다.

“언제 기회가 되면 또 만나겠지. 그때까지 내가 살아 있다면.”

칼을 집어든 그는 혁무천을 일견한 후 몸을 돌렸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혁무천의 눈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살아서 만나면, 내가 술 한 잔 사지.”

멈칫한 청년, 장평이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야 할 목적이 하나 생겼군. 그 술, 얻어먹기 위해서라도 노력해보지.”

그러고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서 객잔을 나섰다.

혁무천은 그가 나간 뒤 술잔을 목구멍 안으로 털어 넣었다. 그가 마시던 것처럼.

‘크으.’소리가 절로 나올 만큼 목구멍이 짜릿했다.

독한 주기가 전신으로 치달렸다.

“흐음, 나쁘지 않군.”

 

술병을 마저 비우고 객잔을 나선 혁무천은 남쪽으로 방향을 잡고 걸었다.

술을 마시는 사이 목적지가 정해졌다.

어쩌면 술기운 때문일지도 몰랐다.

‘고향으로 가자. 가족들의 원혼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사정이야 어떻든, 복수를 마쳤으니 부모님과 형제들의 극락왕생을 빌어주며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면양을 나선 그는 쉬고 싶은 마음이 들 때까지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중경까지 내려가서 배를 타기로 했다.

고향인 경덕진까지 가는 가장 수월한 방법은 배를 타고 장강을 따라 내려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십 리쯤 걷던 그는 주위를 살펴보듯 자연스럽게 뒤를 돌아다보았다.

왠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실 한 가닥이 등에서 빠져나와 바람에 흔들리면 이런 느낌이 들까 싶을 정도로 미세한 뭔가가 신경을 건드렸다.

하지만 뒤쪽 어느 곳에서도 그 느낌의 정체라고 생각할 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럼 뭐지? 왜 이리 찜찜하지?

눈살을 찌푸린 그는 고개를 미미하게 흔들었다.

무엇이면 또 어떠랴. 어차피 백 년의 망각 속에 둥둥 떠 있는 몸인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어느덧 석양이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

 

찬바람이 불어오는 늦가을.

어둑한 숲속, 실개천을 옆에 낀 공터에서 모닥불이 타올랐다.

모닥불 옆에는 목이 부러진 노루 한 마리가 껍질이 벗겨진 채 널브러져 있었다.

흑의를 입은 청년은 쇠꼬챙이로 모닥불을 뒤집었다.

불길이 거세게 춤을 추며 위로 솟았다.

그 불빛에 청년의 하얀 얼굴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혁무천, 그였다.

노루의 다리를 잘라서 쇠꼬챙이에 끼운 그는 모닥불 양 옆에 꽂혀 있는 받침대 위에 쇠꼬챙이를 얹었다.

곧 불길이 노루의 다리를 감싸고 이글거렸다.

혁무천은 이마를 찌푸린 상태로 그 불길을 응시했다.

면양에서 중경까지 칠 일을 걸었다. 중경에서 배를 타고 장강을 따라 내려왔다. 그 와중에 험악한 물길로 유명한 삼협도 통과했다.

그렇게 의창에 도착해서 하루를 보내고, 이제는 육로를 통해 형주로 향하는 중이다.

면양에서 이곳 까지 오는데 걸린 시간은 보름.

그동안 많은 것을 보고, 들었다.

비록 보름밖에 안 되었지만, 강호를 피로 뒤덮었던 사백수십 일의 시간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들은 듯했다.

티끌 같던 갈등의 크기도 구암봉의 바위만큼이나 커졌다.

성도에서 두 청년의 행동을 보았을 때만 해도 미련을 두지 않았다.

마도의 세상이 되었으면 어떻단 말인가.

자업자득. 정파의 위선자들이 스스로 택한 길 아닌가 말이다.

그랬는데, 원했든 원치 않았든 무림세력과 연관된 양민들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도세력을 원망했다.

가족과 형제들을 잃은 사람, 친했던 사람들을 잃은 사람, 심지어 한 마을의 사람 백여 명이 눈앞에서 죽어가는 걸 본 사람도 있었다.

오죽하면 마도세력으로 인해 흘린 피눈물을 모으면 장강을 붉게 물들일 정도라고 했다.

쌓이고 쌓인 원한의 무게에 비하면 태산조차 한줌에 불과할 거라 했다.

문제는, 당금 천하를 지배하고 있는 팔대마세 중 몇 곳이 자신과 연관되어 있는 것 같다는 점이었다.

자신을 따르던 마도고수들이 세운 세력.

양민들의 입에서 그들로 인해 발생한 참혹한 사건이 하나하나 튀어나올 때마다 회의감이 층층이 쌓였다.

자신이 복수를 하겠다고 정파를 무자비하게 쓸어버린 일이 과연 잘한 일이었을까?

복수에 대해서는 지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니까.

다만 자신의 원한과 상관없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죽였다는 게 마음에 걸릴 뿐.

집안의 혈사에 가담하지 않았던 자들까지도 정파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용서치 않았으니까.

그런데 자신이 그렇게 정파를 쓸어버림으로써 마도가 득세하고 양민들이 피를 흘리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상할 정도로 살심이 강했었다.

‘꼭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하는 의문이 들 정도.

 

“정파 놈들은 모두 너의 원수니라. 한 놈도 남기지 말고 모조리 죽여라! 죽이고 또 죽여서 세상을 혈해로 만들어라!”

 

이십 년 동안 하루에 대여섯 번씩 그 말을 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조부께서 붉게 충혈된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그 말을 할 때는 광기마저 느껴졌었다.

지이이잉.

뇌리 깊은 곳에서 또 강한 울림이 일었다.

고통이 수반된 울림.

그는 이를 악물고 참았다.

울림과 고통은 의문을 품을 때 더욱 강하게 그를 압박했다. 마치 무언가를 암시라도 하듯.

어쩌면 그에 대한 해답이 뇌리 깊은 곳의 저편, 두껍고 질긴 벽 너머에 있는지도…….

고통은 곧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

깊게 잠긴 눈으로 모닥불을 바라보던 혁무천은 고개를 흔들어서 상념을 털어냈다.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마음을 정리한 그는 품속에서 대나무통을 하나 꺼냈다.

대나무통의 뚜껑을 연 그는 하얀 소금을 손바닥에 약간 쏟았다. 그러고는 엄지와 검지로 소금을 집어서 고기 위에 골고루 뿌려주었다.

고기 익는 향기가 더욱 짙어졌다.

그는 쇠꼬챙이를 반 바퀴 돌려놓고 눈을 들었다.

잠시 공터 저편의 숲속을 바라보던 그가 나직이 말했다.

“밤고양이처럼 숨어 있지 말고 나와라.”

다섯을 셀 시간이 지날 즈음, 컴컴한 숲속에서 뭔가가 움직였다.

밤고양이, 아니 체구가 호리호리한 소녀였다.

등에 검을 멘 소녀는 쭈뼛거리며 모닥불 쪽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시선은 모닥불도, 혁무천도 아닌, 모닥불 위에서 익어가는 노루의 뒷다리를 향하고 있었다.

잘 익은 노루의 뒷다리가 혁무천보다 훨씬 더 가치 있다는 듯.

소녀가 침을 삼키며 겨우 입을 열었다.

“저기…… 그 고기, 조금만 팔면 안 되나요? 제가 하루를 꼬박 굶었거든요.”

혁무천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품속에서 소도를 하나 꺼냈다. 그러고는 뒷다리 살을 쓱쓱 잘라서 소녀에게 내밀었다.

“나는 고기를 파는 사람이 아니야. 그러니 먹고 싶으면 그냥 먹어.”

소녀는 고기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슬쩍 눈을 들고 말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공짜는 싫어요.”

“나중에 갚으면 돼. 세상에는 외상도 있으니까.”

소녀는 혁무천의 눈을 직시했다.

무표정한 얼굴에 깊숙이 박혀 있는 두 눈이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마도 흔들리는 불빛이 반사되지 않았다면 조금은 무섭게 느껴졌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래서 더 믿음이 갔다.

‘그렇게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아.’

소녀의 시선이 다시 고기 쪽으로 향했다.

“알았어요. 그럼 빚진 걸로 해두겠어요.”

말을 마친 그녀는 그제야 고기를 받아들고 한쪽에 앉았다.

“좋을 대로.”

혁무천은 신기한 경험을 한 사람처럼 눈을 들어서 소녀를 바라보았다.

모닥불 빛에 비친 소녀는 이제 십칠팔 세 정도 될 듯했다.

갸름한 얼굴에 눈이 크고, 코가 마늘쪽처럼 오똑했다. 눈을 깜박일 때마다 춤을 추는 기다란 속눈썹. 고기를 먹는 입술은 적당히 두텁고 적당히 붉어서 소녀의 미를 돋보이게 했다.

귀엽게 보이면서도 가볍지 않은 인상. 조금만 더 크면 품위가 자연스럽게 느껴질 듯했다.

그런데 입고 있는 경장이 두어 군데 찢어져 있었다.

검이나 칼에 의한 흔적.

‘어디서 한바탕 싸웠나?’

피가 보이지 않는 걸로 봐서 부상당하지는 않은 것 같다.

스윽.

혁무천은 고기를 한 점 더 썰어서 내밀었다.

“왜 혼자 밤길을 다니는 거지? 더구나 마을도 없는 외진 곳을.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소녀가 고기를 받아들고 말했다.

“표행과 동행하고 있었는데, 습격을 받아서 그만 일행을 잃어버렸어요.”

그 후 하루 종일 일행을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밤이 깊어지고, 멀리서 불빛이 보이자 일행이 아닌가 싶어서 다가온 것이었다.

“표행? 그럼 네가 표사란 말이냐?”

“정식 표사는 아니고…… 음, 표사보조라고 보시면 돼요.”

“그 표행도 알만하군. 너 같은 꼬마계집애가 표사라니.”

소녀가 기름기 번들거리는 입술을 삐죽였다.

“표사보조라니까요. 그리고 저 꼬마 아니에요. 열여덟 살이나 된다구요.”

“보조는 표사 아닌가?”

열여덟 살도 꼬마고. 최소한 자신이 봤을 때는.

하지만 그 말은 하지 않았다. 그 말을 하면 당장 대들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건 그렇지만…….”

말을 얼버무리던 소녀가 혁무천을 슬쩍 살펴보았다.

불빛에 비친 혁무천의 모습은 지금까지 그녀가 본 그 어떤 남자보다 매혹적이었다.

천년 묵은 수컷 여우가 둔갑을 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

‘설마 총각귀신은 아니겠지?’

오죽하면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검을 맨 구미호나 총각귀신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근데…… 소협은 뭐하시는 분이세요?”

“나?”

혁무천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은 과연 무엇 하는 사람일까?

막상 대답하려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낭인무사세요? 아니면 여행자?”

소녀의 질문에서 적절한 답을 하나 찾았다.

“여행자라고 해두지.”

아주 멀고 먼 길을 돌아온 여행자.

“어디로 가시는 길인데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집이 어딘데요?”

“강소 경덕진.”

혁무천의 대답에 소녀의 눈빛이 반짝였다.

“저, 그럼 구강까지만이라도 동행하면 안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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