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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천화 5화

무료소설 귀환천하: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445회 작성일

소설 읽기 : 귀환천화 5화

5화

 

 

그나마 다행인 것은 굳었던 몸이 서서히 풀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씨바, 덤비면 한번 해보지 뭐.’

그때 그의 앞까지 다가간 혁무천이 그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조금 전의 말, 진심이오?”

눈이 마주치자, 양화송은 간이 오그라들었다.

젊은 놈의 눈이 왜 이리 무섭게 느껴지는 건지…….

“그게…… 그냥 다음에 만나면 다시 한 번 싸워보겠다는 뜻…….”

양화송은 얼굴이 벌게졌다.

‘오냐! 진심이다! 다음에 만나면 네놈의 머리통을 부숴버릴 것이다!’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입에서는 엉뚱한 소리만 나왔다.

“오늘은 그냥 가지만, 다음에 만났을 때는 단단히 각오를 해야 할 거요. 나는 뒤끝이 남겨지는 걸 좋아하지 않으니까.”

‘나도 뒤끝 남는 건 싫다, 씨바야.’

“그런데…… 단양혼천권은 얼마나 익혔소?”

“오성…….”

무심코 대답하던 양화송의 눈이 커졌다.

이 자식이 어떻게 단양혼천권을 알지?

“아마 팔성까지는 익혀야 버틸 수 있을 거요. 그럼 나중에 봅시다.”

양화송의 커진 눈이 밖으로 튀어나오든 말든 혁무천은 할 말만 하고 몸을 돌렸다.

양화송도 이번에는 그가 사라질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말할 정신도 없었다. 머릿속에서 오직 한 가지 의문만 계속 맴돌았다.

자신이 단양혼천권을 익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부친이 돌아가신 이후 자신 외에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저 낯짝 희멀건 놈이 그걸 알고 있단 말인가.

‘저 새끼, 아무래도 수상한 놈이야. 반드시 찾아서 어떻게 알았는지 족쳐봐야겠어.’

복수도 하고!

양화송은 자신이 강철로 만든 것보다 더 튼튼한 올가미에 스스로 머리를 집어넣었다는 사실을 꿈에도 알지 못했다.

“근데 진짜 잘생겼네, 그 자식.”

 

***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촉산의 깊은 계곡 안에 건물이 서너 채 서 있었다. 이제는 건물이라기보다 폐허라고 불러야 할 상태지만.

가을이 깊어진 어느 날.

혁무천은 폐허가 된 계곡을 보고 이마를 찌푸렸다.

성도를 출발해서 사흘 만에 도착한 광천곡은 폐허가 된 모습으로 그를 반겼다.

천하제일마라 불린 광천마의 거처가 이 지경이 되다니.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이 상태가 된 지 최소한 수십 년은 되었겠군.’

반쯤 무너진 지붕 위에는 잡초가 무성했다. 앙상하게 솟은 나무기둥도 썩다시피 해서 허리가 두 동강 나 있었다.

넓은 마당에는 수풀이 울창하게 자라서 폐허가 된 건물을 대부분 가리고 있었다.

이곳이 정말 사람이 살던 곳인가 싶을 정도.

푸드득.

이제는 사람 대신 짐승들의 거처가 된 듯, 혁무천이 폐허로 다가가자 여기저기서 짐승들이 도망쳤다.

‘왜 이렇게 된 거지?’

백 년이 넘었으니 아는 사람들이 남아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광천곡이 이리 폐허가 되어 있을 줄은 생각조차 못했다.

자신이 복수의 길을 떠날 때 남아 있던 자만 삼백여 명에 이르렀지 않은가.

그들이 사문을 저버리고 모두 떠났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없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거다.’

 

혁무천은 곧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허리가 꺾인 기둥, 그곳에 흔적이 남아 있었다. 짐승들은 결코 남길 수 없는 흔적이.

절정무공의 흔적.

누군가가 아름드리 기둥을 향해 일격을 가했다. 움푹 파인 정도로 봐서는 절정고수의 솜씨인 듯했다.

게다가 울창하게 자란 수풀 아래, 바닥에 깔린 청석 역시 파이고 부서진 곳이 눈에 띄었다.

그는 천천히 수풀을 헤치며 광천곡 내부를 살펴보았다. 보면 볼수록 더 많은 흔적이 눈에 띄었다.

수많은 흔적을 살펴본 그에게서 싸늘한 조소와 쓴웃음이 피어났다.

“외부의 침입이 아니다. 안에서 싸움이 일어났어.”

외부의 침입이 있었다면 입구 쪽에서도 격전의 흔적이 보였어야 했다. 그러나 격전의 흔적 대부분이 내곡에 남아 있었다.

내분이 일어난 이유를 짐작 못할 것은 없었다.

자신이 돌아오지 않으니 광천곡의 주인 자리를 놓고 힘겨루기가 벌어졌겠지.

그 후 누가 이겼든 모두 이곳을 떠난 듯했다.

하긴 마도 세상이 되었지 않은가. 어느 누가 이 외진 곳에 숨어서 살고 싶을까.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한편으로는 화가 났다.

‘굳이 이렇게 폐허가 되도록 방치하고 나갈 필요는 없잖아?’

하지만 자신은 백 년 전에 사라진 사람. 화를 낼 자격이나 있을까 싶다.

그저 쓴웃음만 나올 뿐.

고개를 저은 그는 광천곡에 온 또 하나의 목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광천곡에서 십 리쯤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오직 두 사람만 알고 있는 동굴이 나온다.

입구의 외부는 진세로 가려져 있고, 그나마도 커다란 바위가 한 몸인 것처럼 동굴을 막고 있어서 눈을 까뒤집고 찾으려 해도 보이지 않는다.

지옥동(地獄洞).

혁무천과 그의 조부, 광천마 혁진학만이 아는 곳.

혁진학이 혁무천의 심장에 지옥화를 심었던 곳.

혁진학은 오래 전에 저 세상으로 갔으니 이제 혁무천 혼자만 아는 곳이 되었다.

콰르르릉.

동굴 입구를 막고 있던 커다란 바위가 백여 년 만에 움직였다.

달라붙어 있던 넝쿨들이 뜯겨져 나가며 컴컴한 입구가 드러났다.

혁무천은 컴컴한 동굴만큼이나 깊은 눈빛으로 동굴 내부를 바라보며 걸음을 내딛었다.

그의 기억은 삼 년 만의 방문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백오 년이 지나서 온 터였다.

다행히 외부의 광경으로 봐서는 그때 이후 아무도 들어오지 않은 듯했다.

 

두어 번 구비를 꺾어지자 빛 한 점 없는 암흑만이 남았다.

혁무천은 품속에서 구슬을 꺼내들었다.

은은한 빛이 동굴을 밝혔다.

초승달 빛 정도의 밝기였으나 암흑 속에서는 그 빛만으로도 길을 밝히기에 족했다.

아홉 번 구비를 돌아가자, 높이 열 자 정도에 삼십여 평이나 되는 제법 넓은 광장이 나왔다.

광장의 벽과 바닥은 인공이 가해진 듯 평평했다. 벽에는 글씨와 그림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지옥화와 관련된 구결과 도해였다.

혁무천은 찬찬히 구결을 읽고 도해를 살펴보았다.

지옥화의 본래 명칭은 명천겁화공, 또는 지옥명화공(地獄明火功)이라고도 했다.

창안자는 불망이라는 법명을 지닌 승려였다.

승려가 지옥의 무공을 창안했다는 게 괴이한 일이지만, 세상에는 그보다 더 이해 못 할 일이 허다했다.

‘조부께서 내 심장에 지옥화를 심고, 내가 피어나게 했지만, 완벽하지 않았었어.’

그럼에도 세상을 피로 뒤덮었다.

완벽해지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자신에게 어떤 변화가 생길까.

궁금했지만 미련을 갖지 않기로 했다.

그가 이곳에 온 이유는,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지옥의 무공을 지우기 위해서였다.

그는 두 손을 들어서 벽을 향해 뻗었다.

츠츠츠츠츠츠.

벽이 깎여 나가면서 구결과 그림들이 지워지기 시작했다.

바닥에는 깎여나간 돌가루가 차곡차곡 쌓였다.

구백 자의 구결, 서른여섯 개의 그림을 지운 그는 손을 내렸다.

이제 남은 글자는 한쪽에 적혀있는 서문뿐이었다.

 

[암천에서 지옥의 겁화(劫火)를 제압할 수 있는 명화(明火)를 구하고자 했다.

하나 티끌만도 못한 빈승의 깨달음으로는 겨우 반딧불만 한 지옥화만을 밝힐 수 있을 뿐이로구나.

연이 닿아 빈승이 얻지 못한 또 하나의 빛을 얻으면 지옥을 밝힐 수 있으리니…….

불망(不忘).]

 

혁무천은 그 글귀를 마저 지울 것인지 고민하다가 손을 들었다. 어차피 지운 것, 흔적마저 완벽히 지우는 게 나을 듯했다.

그런데 막 손을 뻗으려던 그가 멈칫했다.

그의 시선이 한 곳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불망. 바로 그 두 글자에서.

한참 동안 글자를 노려보던 혁무천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불망(不忘).

‘잊지 않는다’는 그 말은 곧 마음 작용의 본질을 뜻한다.

지옥화가 겁화든 명화든, 그 역시 마음 작용의 본질에 따라 결정되지 않을까?

불법에 대해서 잘 모르니 뭐라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마음이 움직이고 있는 걸 보면 그 또한 잘못된 해석만은 아닌 듯하다.

“불망이라…….”

서문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혁무천은 이를 지그시 악물고 마저 글자를 지웠다.

자신의 과거를 지우듯이.

 

***

 

칼날바위 능선의 소나무 아래에서 한 사람이 계곡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십 년 동안 아무도 찾아오지 않던 곳에 사람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어떤 멍청한 놈이 길을 잃고 들어왔나 보다 했다.

그런데 가을이 깊어가는 지금 나타난 그놈은 광천곡을 잘 아는 듯했다. 발걸음도 옮기기 힘든 곳을 제 집 안마당처럼 자연스럽게 돌아다니는 걸 보면.

그때만 해도 ‘혹시 그 개 같은 놈들이 보낸 놈 아닐까?’ 했다.

그런데 길도 없는 계곡 안쪽으로 들어가더니, 어느 순간 사라져버렸다.

말 그대로, 빤히 쳐다보고 있는데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한 시진쯤 지났을 때 다시 나타났다.

사라진 바로 그 자리에서.

‘뭐하는 새끼지?’

선조의 유언에 발목 잡혀서 촉산을 떠나지도 못한 채 십 년을 처박혀 보낸 그였다.

이십 년 동안 나름대로 도를 닦아서 이제는 무위(無爲)를 안다 싶었는데, 갑자기 나타난 놈 때문에 신경이 쓰였다.

‘잡아서 족쳐볼까?’

하지만 놓칠 경우 자신의 존재가 드러날 수 있다.

만약 저놈이 배신자 놈들과 한 패라면?

그러면 그 배신자 놈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자신을 잡으러 다닐지 모른다.

그렇다고 순순히 보낼 수도 없고…….

‘쫓아가 봐?’

콩알만큼 좁힌 눈을 두어 번 깜박인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자가 광천곡을 나서고 있었다.

거리는 이십 리.

남들 눈에야 깨알처럼 작게 보이겠지만, 그의 콩알처럼 작아진 눈에는 한 뼘 크기로 보였다.

 

***

 

광천곡을 떠난 혁무천이 면양에 들어선 것은 가을이 깊어지던 날 오후 무렵이었다.

촉산의 협로를 타고 섬서로 가고자 하는 이들이 필히 거쳐야 할 곳, 면양에 도착한 그는 객잔부터 찾아 들어갔다.

배가 고파서가 아니었다.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술을 한잔 마시고 싶었다.

백 년 넘는 세월이 흐른 것으로도 모자라서 광천곡마저 폐허가 되어 있었다.

갈 곳을 하나 잃어버린 셈.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그런지 술 생각이 났다.

누렇게 변색된 천과 싸구려 나무구슬로 만들어진 주렴을 젖히고 막 객잔으로 들어가려던 그가 멈칫하더니,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서 날아드는 뭔가를 잡았다.

술잔이었다. 객잔 안에서 싸우고 있는 자들이 던진 술잔.

그가 술잔을 잡은 손을 내리는 동안에도 객잔 안에서는 욕설이 난무했다.

“이 개자식! 죽여 버리겠다!”

“이 죽일 놈이 감히 우리가 누군 줄 알고……!”

퍽! 퍼벅!

“크억!”

“켁!”

혁무천은 비명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다.

홀로 앉아 있는 청년 앞에 세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얼굴이 불콰한 청년은 쓰러진 자들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들의 목숨보다 술이 더 급했는지 들고 있던 술잔을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나이는 잘해야 이십 대 중반.

머리를 대충 묶고, 영웅건 대신 허름한 천으로 이마를 두른 그는 누가 봐도 잘생겼다고 할 만큼 준수했다.

흠이라면 몸이 너무 말랐고, 눈매가 칼날처럼 날카롭게 뻗어서 너무 싸늘하게 보인다는 것 정도.

탁자 위에 칼 한 자루가 놓여 있었는데, 아무런 장식도 없는 흑갈색의 칼집과 손잡이는 손때로 번들거렸다.

 

혁무천은 그 청년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술잔을 내려놓은 청년이 혁무천을 직시했다. 치고 패는 상황에서 맞은편에 앉은 혁무천이 이상하게 보인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혁무천은, 삐죽거리며 다가온 점소이에게 간단한 요리와 술을 시킨 후에야 청년을 바라보았다.

그때까지도 청년은 혁무천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차가운 눈빛과 무심한 눈빛.

묘한 분위기가 객잔의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금방이라도 칼날이 튀어나올 것 같은 기분.

손님 중 몇 사람은 불안감을 못 견디고 먹던 요리가 남았는데도 객잔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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