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천화 3화
무료소설 귀환천하: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459회 작성일소설 읽기 : 귀환천화 3화
3화
점소이는 피곤에 절은 표정임에도 혁무천의 모습을 보고 바짝 긴장해서 말했다.
“영선루는 삼십 년 전에 지었다고 들었습죠. 언제 오셨는지 몰라도 잘못 보셨을 겁니다요.”
삼십 년 전에 지었다고?
자신의 나이보다 오래된 건물이다.
‘내가 전에 보았는데 모르고 지나쳤나?’
그러고 보니 간혹 기억에 혼란이 올 때가 있다. 기억의 끈이 토막토막 단절된 것처럼.
그럴 때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대법의 부작용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극양과 극음이 충돌했는데 그 정도 부작용도 없을까.
큰 충격을 받으면 기억도 잃는다지 않던가.
“뭐 드실 겁니까요? 지진으로 난리도 아니어서 요리는 몇 가지밖에 안 됩니다요.”
점소이 말에 혁무천은 더 묻지 않았다.
물어본다 한들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야채와 고기를 볶은 간단한 요리를 하나 시킨 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 너머로 거북이를 닮은 봉우리가 보였다.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기억이 단절된 거라면…… 그건 뭐지?’
뇌리 저 깊숙한 곳, 어둡고 침침한 곳에 두텁고 질긴 어떤 벽이 있었다.
짧고 강렬한 고통이 느껴질 때마다 그 벽에 금이 가고 있었다.
식사를 마친 혁무천은 일단 방부터 잡아놓고 객잔을 나섰다.
나오면서 점소이에게 물어본 터라 대장간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땅! 땅! 땅!
어디선가 쇠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혁무천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걸음을 옮기는 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사람들에게는 평범하게 들릴지 몰라도 그에게는 아니었다.
힘이 느껴지는 망치질 소리.
단순한 힘이 아닌 기가 실린 힘이 망치질 소리에 담겨 있었다.
망치질 소리가 들리는 대장간은 골목 안에 있었다.
혁무천은 대장간 문 앞에 서 있는 아름드리 향나무 옆에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한 청년이 망치질을 하고 있었다.
땅딸막한 체구, 검게 느껴지는 피부는 땀이 흘러서 번들거렸다.
모루 위의 쇠를 쳐다보는 실처럼 가느다란 눈은 움직임도 없었다.
‘좋군.’
체구는 작았다. 뚱뚱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작은 체구에 근육도 너무 많아서 둔하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움직임 하나하나에 힘이 실려 있으면서도 부드러웠다.
혁무천은 대장간의 청년 같은 사람은 본 적이 있었다.
그가 생각할 때는 기껏해야 몇 달 전에. 실제로는 백여 년 전이지만.
‘동천마종 응철기. 꼭 그 사람을 보는 것 같군.’
눈앞에 생생했다.
오대마종 중 하나인 그는 대장간 청년보다도 체구가 더 작았다. 다른 사람의 가슴팍밖에 안 닿았으니까.
하지만 그가 동천마부를 휘두르며 뛰어다니면 정파 무사들이 부서진 호박처럼 사방으로 튀었다.
“무슨 일로 오셨수?”
벽 쪽에 있어서 보이지 않던 사람이 얼굴을 불쑥 내밀며 물었다.
사십 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자였다. 역시나 몸이 땅딸막했는데, 아무래도 망치질을 하는 청년의 가족인 듯했다.
“검을 좀 손보고 싶소.”
혁무천이 그렇게 말하며 내민 검을 보고 대장장이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차라리 새 걸 사쇼. 그게 쌀 것 같수.”
혁무천이 생각해도 그럴 것 같았다.
그래도 천망검을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평범한 쇠가 아니어서 녹만 벗겨내면 쓸 만할 거요. 검집도 새로 만들어 주시고.”
그가 말하며 작은 은 조각 하나를 내밀자, 대장장이가 머뭇거렸다.
“제가 손볼게요, 아버지.”
어느새 망치질을 멈춘 청년이 다가오며 말했다.
대장장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은 조각을 챙기고 검을 청년에게 내밀었다.
“그래, 네가 알아서 해라.”
청년은 검을 받아들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녹이 슨 검신을 바라보던 청년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거…… 녹이 슬긴 했지만 굉장히 좋은 검인데요?”
“손 볼 수 있겠나?”
“해보죠 뭐.”
“이름이 뭔가?”
청년은 슬쩍 눈을 쳐들고 말했다.
“철호요.”
혁무천은 ‘응’씨가 아니라는 것에 실망했지만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눈을 쳐든 모습도 영락없이 응철기였다.
“그럼 부탁하마.”
***
다음 날 아침, 혁무천은 식사를 마치자마자 검을 찾으러 대장간에 갔다.
철호는 기다렸다는 듯 검을 내밀었다. 하룻밤 만에 만든 검집이건만 혁무천의 마음에 쏙 들었다.
검신도 녹이 다 벗겨져서 제 모습을 찾은 상태였다.
“거, 귀한 검 같은데, 보관 좀 잘하쇼.”
철호의 부친인 대장장이가 책망하듯 말했다.
혁무천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피 냄새가 짙어보여서 검병에 글자 한자 새겼으니 이해하시고.”
대장장이 말대로 검의 손잡이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인(忍).
혁무천은 불만이 없었다.
‘앞으로는 천인검이라고 불러야 하나?’
복수를 마쳤으니 이제 피를 볼 일도 많지 않을 듯했다.
“수고했소.”
“커험, 그래도 꽉 막힌 공자는 아니시구만.”
혁무천은 돌아서기 전에 철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철호가 불길이 담긴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그 불길의 의미를 어렴풋이 깨달았지만 별 말은 하지 않았다.
철호는 불길 속에서 뛰쳐나가고 싶은 호랑이였다.
나이답지 않게 제법 강한 공력이 깊은 곳에서 잠자고 있는 어린 호랑이.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철호는 불길 속에서 당분간 더 담금질이 되어야만 했다.
“나중에 또 보자.”
그 말에 철호의 눈빛이 흔들렸다.
혁무천은 의미 모를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돌아섰다.
비록 굳게 닫힌 입술 끝이 미미하게 틀어진 정도였지만, 철호의 눈에는 그 어떤 웃음보다 멋지게 느껴졌다.
사현을 떠난 혁무천은 성도를 향해 걸었다.
철호를 만나서 기분이 좋았던 것도 잠시뿐이었다.
걷는 내내 그는 혼란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단순히 시간만 흐른 게 아닌 것 같았다. 세상이 변한 듯 느껴졌다.
사람들의 옷차림도 약간 변했고, 말투조차 예전과 조금 다른 듯했다.
그의 고향인 강서성과 사천성의 풍습이 다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혁무천은 성도에 도착해서야 세상이 변했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성도 역시 예전에 그가 가봤던 성도가 아니었던 것이다.
성도성에 들어간 그는 유생으로 보이는 자를 붙잡고 물어보았다.
“올해가 홍무 오 년 아니오?”
그리고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있었다.
혁무천은 대로 한가운데 서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백 년…… 내가 빙천동의 빙백관에 들어간 후 백 일이 아니라 백 년이 넘게 흘렀다고?”
혼잣말의 끝자락이 가늘게 떨렸다.
믿고 싶지 않았다.
유생 왈, 홍무 오 년은 백여 년 전이란다.
아마 자신이 검을 차고 있지 않았다면 무식하다는 말이 서슴없이 튀어나올 것 같은 표정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백 일도 아니고 백 년 넘게 자신이 빙백관에서 지낼 수 있었단 말인가.
하지만 주위의 모든 것이 말해주고 있었다.
정말로 많은 세월이 흘렀다는 걸.
아무리 그렇다 해도 백여 년이라니!
“말도 안 돼!”
한소리 내지른 혁무천은 넋이 반쯤 빠진 표정으로 서서 번화한 성도의 대로를 바라보았다.
그럼 자신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광천곡에 간다 해도 자신을 아는 자가 없을 것이다.
자신을 따르던 자들 역시 이 세상에 살아있는 자가 거의 없을 것이다.
“이봐! 왜 길을 막고 서 있나?”
뒤에서 잔뜩 짜증난 목소리가 들린 이후에야 겨우 정신을 차린 그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무사 복장을 한 세 사람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디서 촌스런 복장을 하고…….”
“꼴에 그래도 검을 찼는데?”
“오호! 희멀건 얼굴 하나는 기막히게 잘생겼군. 수염만 깎으면 기루의 기녀보다 예쁘겠는걸?”
혁무천은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표정을 갈무리했다.
‘마침 잘 됐군.’
정말 백 년 넘는 세월이 흘렀다면 강호는 어떻게 되었을까.
강호의 이야기를 들으려면 무사들에게 묻는 게 빠를 터. 그는 무사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제야 무사들도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는지 무기에 손을 갖다 댔다.
“뭐야, 이 자식?”
“하, 한번 해보겠다는 거냐?”
뻐드렁니 장한이 욕을 하며 칼을 빼들었다. 나름대로 겁을 주기 위해 인상을 잔뜩 쓰며 칼을 뺐지만, 그에 대한 대가로 돌아온 것은 주먹이었다.
퍽!
뻐드렁니는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도 모르고 땅바닥에 나가 떨어졌다.
“몇 가지 물어볼 것이 있다. 순순히 대답하면 걸어서 지나갈 수 있을 거다.”
대뜸 욕부터 한 자들이다. 다른 말투 역시 정파인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 자들의 생리를 잘 아는 혁무천은 대화 전에 기부터 꺾었다.
물론 무사들은 순순히 대답할 마음이 없었지만.
오히려 욕설과 고함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이 개자식이!”
“죽여!”
혁무천의 손이 보이지 않는 속도로 좌우를 쓸었다.
퍼벅!
둔탁한 소리와 함께 두 장한이 나뒹굴었다.
충격이 컸는지 바닥에 나뒹군 후로도 제대로 일어나지 못한 채 버둥거렸다.
옆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는 시원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차마 말로는 못하고.
간결한 손짓 두어 번으로 장한들을 눕힌 혁무천이 세 장한을 향해 걸음을 떼었다.
“몇 가지만 대답하면 돼. 싫으면 몇 대 더 맞고 대답하든지.”
담담하게 느껴질 정도로 무심한 목소리.
그러나 세 장한은 심장이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었다.
쇠망치로 두들겨 맞은 듯했다.
어디를 맞았는지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일어나려고 움직일 때마다 살이 찢어지고 뼈가 어긋나는 고통이 뒤따랐다.
땅을 짚고 있는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두 번 다시 맞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 정도로 독한 손속.
창백하게 질린 세 사람은 뒤늦게야 잘못 건드렸다는 걸 깨닫고 사색이 되었다.
“자, 잠깐만…….”
“뭘 알고 싶어서…….”
“우, 우린 마천문 사람들이다. 우리를 건드리면…….”
마도에 몸을 담고 있는 그들에게 자존심은 독한 매 한 대보다 쌌다.
“일단 맞고 하지.”
“말해준다니까! ……요.”
버럭 소리를 내지른 뻐드렁니가 말끝에 겨우 ‘요’자를 붙이고 눈치를 보았다.
혁무천도 다가가던 걸음을 멈추었다.
“그래? 그럼 이제부터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해봐라.”
혁무천은 세 장한에게 이 각 동안 질문을 퍼붓고 순순히 보내주었다.
삼류 마도무사를 어떻게 할 마음도 없었지만, 그보다는 충격이 커서 그들에게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유생의 말은 사실이었다. 약간의 차이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정말로 백 년이 넘는 무지막지한 세월이 지나간 듯했다.
세 사람이 앞다투어 말했다.
“마천제요? 그분이 사라지신 지가 언젠데요?”
“마신께서 돌아가신지 백 년도 넘었습니다요.”
“그분이야말로 우리 마도의 영원한 하늘입죠.”
혁무천은 자신을 ‘마신’이라며 떠받드는 목소리가 조금도 반갑지 않았다.
백여 년 전, 마천제가 나타나 만인혈사가 벌어졌다.
그 후, 눈치만 보던 마도세력이 일제히 일어나서 정파를 몰아붙였다고 한다.
삼십 년에 걸친 전쟁은 마도의 승리로 끝이 났고, 그때부터 정파는 마도에 눌려서 기를 펴지 못하고 있단다.
그나마도 산속 깊숙한 곳에서 수양을 닦는 불가와 도가의 문파만 황궁의 비호로 본산을 지켰을 뿐, 팔대세가 등은 서너 곳만 빼고 이미 유명무실해진 지 오래라고 했다.
‘사마도가 강호를 장악한 지 칠십 년이 지났단 말이지?’
속이 시원해야 하는데, 왠지 씁쓸한 마음에 쓴웃음이 절로 떠올랐다.
자신이 원했던 것은 복수였지 세상을 마로 물들이는 게 아니었다.
마도의 힘은 그의 복수를 위한 도구였을 뿐.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정파를 안쓰럽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고통을 당해도 싼 위선자들이니까.
‘자업자득(自業自得)일 뿐이야.’
지이이잉.
여느 때보다 강한 고통이 뇌리를 흔들었다. 뇌리 저 깊숙한 곳에서 시작된 고통은 파문을 일으키며 흩어졌다.
눈을 가늘게 좁히고 이마를 찌푸린 그는 성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백여 장쯤 들어갔을 때 난데없는 비명이 들렸다.
“아악! 살려 주십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