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천화 3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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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523회 작성일소설 읽기 : 귀환천화 38화
38화
눈을 치켜뜬 장한이 당장 뽑아들고 달려들 것처럼 검을 잡았다.
그때 앉아 있던 노인이 입을 열었다.
“멈추어라, 남조.”
“어르신! 저놈들이 구 형을……!”
장한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소리치다가 급히 입을 닫았다.
그의 낯빛이 절대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한 사람처럼 창백해졌다.
노인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저갱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노인의 눈을 본 순간 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다.
“죄, 죄송합니다, 어르신. 용서를…….”
“네 죄는 나중에 묻겠다.”
“…….”
허리를 깊이 숙인 장한, 남조는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소리 없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노인은 천하에서 가장 잔인한 몇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런 살귀에게 목소리를 높였으니…….
‘후우, 당장 이 자리에서 머리가 박살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지.’
노인은 그를 더 이상 쳐다보지 않고 혁무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얼굴은 반반한데, 간덩이가 많이 부은 놈이로구나.”
노인이 주름진 입술을 비틀며 냉랭히 말했다. 혁무천은 못 들은 척 숙수를 향해 음식을 주문했다.
“당신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요리를 둘이 먹을 수 있을 만큼 만들어 주시오.”
노인의 가느다란 눈매가 실뱀처럼 꿈틀거렸다. 이마에 나있던 몇 가닥 골 깊은 주름도 덩달아 흔들렸다.
‘저놈이 감히 노부를 무시해?’
부글부글 끓는 그의 마음이 겉으로 환히 드러났다.
숙수는 노인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제야 혁무천의 시선이 노인에게로 향했다.
“나에게 볼 일이라도 있으시오?”
노인의 눈초리가 점점 더 치켜 올라갔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저 주둥이를 부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오랜 경험이 그에게 참으라는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거기다 신경을 건드리는 ‘무엇’이 그에게 인내심을 강요했다.
“사부가 누구냐?”
칼칼한 목소리. 마치 잇새에 칼날이라도 끼어 있는 듯했다.
“노인장은 말해도 모를 거요.”
뭐야?
치켜뜬 노인의 눈에서 한광이 번뜩였다.
순간, 더 참지 못한 노인이 탁자 위에 올려놓은 손의 검지를 구부려서 앞에 있던 젓가락을 튕겼다.
피잉!
대나무로 만들어진 젓가락이 화살처럼 쏘아졌다.
일 장 정도의 거리.
젓가락은 정확히 혁무천의 목을 향해 날아갔다.
청년과 남조의 눈도 젓가락을 따라 이동했다.
엽기천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저……!’
피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곧 모두의 표정이 굳어졌다.
젓가락이 혁무천의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어져 있었다.
언제?
그가 손을 드는 모습을 정확히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노인만이 희미한 그림자를 봤을 뿐.
“이걸로 밖에서의 일은 퉁 치지요.”
혁무천이 무심한 표정으로 말하면서 손가락 사이의 젓가락을 노인에게 던져주었다.
젓가락이 빙글빙글 돌며 날아갔다.
이마를 찌푸린 노인은 날아드는 젓가락을 받기 위해 손을 뻗었다.
남들이 보면 가볍게 날아가는 듯 보였다. 하지만 노인은 그 젓가락을 잡기 위해서 온 신경을 곤두세워야만 했다.
빙글 빙글 돌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젓가락이 흔들리며 날아드는데, 마치 수십 개가 한꺼번에 돌면서 날아드는 듯했다.
제대로 받지 못하면 창피를 면치 못할 터.
노인으로서는 자존심이 걸린 일이었다.
금나수를 펼쳐서 겨우 젓가락을 받은 노인은 이마를 잔뜩 구기고 혁무천을 노려보았다.
젓가락을 받은 손가락이 욱신거렸다. 굵은 무쇠 철봉을 받기라도 한 것처럼.
‘빌어먹을. 역시 보통 놈이 아니었어.’
청의를 입은 청년이 정확한 사정을 모른 채 이때라는 듯 입을 열었다.
“실력이 제법이군. 나는 삼혈맹의 사진효라 하네. 이름이 어떻게 되는가?”
삼혈맹이라면 마도십문 중 한 곳.
절정고수를 곁에 둔 것으로 봐서 가벼운 신분은 아닐 터, 소란이 더 커져봐야 좋을 것 없다.
“무천.”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함께 자리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어떻겠나?”
“지금은 이야기 나눌 기분이 아니야.”
“수하의 일은 신경 쓸 것 없네. 나를 호위해야 할 자가 실력이 모자라서 당했다면 죽어도 싼 일이지.”
“어차피 나도 신경 쓰지 않아.”
혁무천이 툭툭 쏘듯 대답하자 청년, 사진효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쓸모가 있을까 해서 잘 대해줬더니,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놈이군.’
실력이 없는 놈이었다면 당장 얼굴의 껍질을 벗겨서 인피면구를 만들어버릴 텐데…….
그는 천하가 모르는 인피면구의 전문가였다. 지금도 품속에 자신이 직접 만든 인피면구가 석 장이나 있었다.
‘정말 멋진 작품이 나올 것 같단 말이야.’
하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표정도 드러내지 않고 다시 물었다.
“철혈마련으로 가는 길인가?”
끄덕끄덕.
“비무대회에 참가할 생각인가?”
“봐서. 지금은 구경만 할 생각이야.”
다른 목적에 대해서는 말해줄 필요가 없었다.
“의외군. 자네의 실력과 얼굴이라면 강동일화라 해도 껌벅 넘어갈 것 같은데 말이야.”
사진효는 슬쩍 혁무천을 건드려보았다.
그는 혁무천의 말을 믿지 않았다.
천하의 어떤 청년이 강동일화를 포기한단 말인가.
설령 당장은 아니라고 해도 실제 그녀를 보면 마음이 달라질걸?
혁무천은 그의 도발에 넘어가주는 척하며 되받아쳤다.
“그래? 그럼 한번 생각해봐야겠군.”
사진효의 동공에서 순간적으로 파란 살기가 번뜩였다가 사라졌다.
“어떤가? 목적지가 같은데, 함께 가지 않겠나? 우리와 함께 가면 자네에게도 적잖은 도움이 될 거네.”
자신을 물어뜯을지 모르는 호랑이라면 가까이 두는 것이 낫다. 그래야 언제든 목을 칠 수 있을 테니까.
혁무천도 당장은 거부하지 않았다.
삼혈맹의 고위인사라면 철혈마련의 대접도 다르겠지.
들어가기도 더 쉬울 것이다.
어쩌면 철혈마련을 조금 더 깊이 파헤쳐볼 수 있을지도…….
“생각해 보고.”
마침 숙수가 눈치를 보며 요리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혁무천은 할 말 다 했다는 듯 요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졸지에 말상대가 없어진 사진효는 콧등을 찡그리며 혁무천을 노려보았다.
‘젠장, 생각지 못한 강적이 하나 더해졌군.’
***
다음 날 아침.
혁무천은 사진효의 청을 받아들였다.
“내 일에 간섭하지만 않으면 동행하지.”
지난밤에 엽기천이 짤막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삼혈맹과의 동행이라면 손해 볼 일은 없을 것 같네. 판단은 자네가 내리겠지만.”
혁무천도 철혈마련이 얼마나 거대한지는 장가만물점에서 얻은 정보만으로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여차하면 그들과 대판 싸워야 할지 모르는 상황.
이용할 수 있는 자들이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잘 생각했네. 아, 마 장로님께 인사드리게. 강호에서 잔혼귀마라는 위명을 얻으신 분이시네.”
잔혼귀마(殘魂鬼魔) 마곡청.
손속이 잔인하기로 유명한 마도의 절정고수가 그다.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있던 엽기천이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혁무천은 눈빛 한 점 흔들리지 않고 포권만 취했다.
“어제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마곡청은 그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지만 못 본 척하기도 어정쩡했다.
“엎드려 절 받는 기분이군. 좌우간 일행이 되었으니 이제 알려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사문이 어떻게 되나?”
“조부님께 배운 작은 재주일 뿐입니다.”
“조부님은 뉘신가?”
“말씀드려도 잘 모르실 겁니다.”
결국 제자리.
마곡청은 속이 슬슬 끓었다.
상대가 하수였다면 팔다리를 다 부러뜨려서라도 자신이 원하는 답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도 없으니 더 짜증이 났다.
‘찢어죽일 놈. 어디 두고 보자. 내가 어떡하든 네놈의 정체를 다 까발려주마.’
***
정오 무렵.
야트막한 고개를 넘은 사람들 눈에 저 멀리 길게 늘어선 전각군이 보였다.
거리가 십 리나 되는데도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낼 만큼 대단한 위용이었다.
“정말 굉장하군!”
엽기천이 무의식중에 감탄사를 터트렸다.
혁무천도 놀라움을 완전히 감추지 못했다.
황제가 기거하는 황궁이 저러할까.
오 리를 앞둔 곳부터는 너비가 십 장이나 되는 일직선 길이 철혈마련의 거대한 정문까지 이어져 있었다.
무사 수백 명이 꿈과 희망을 품고 그 길 위를 걸어서 철혈마련으로 향했다.
혁무천과 사진효 일행도 그들과 함께 철혈마련으로 들어갔다.
철혈무련은 삼혈맹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더구나 방문객이 삼혈맹의 셋째 공자 사진효와 잔혼귀마 마곡청이었다.
덕분에 혁무천과 엽기천도 별다른 조사를 받지 않고 철혈마련에 들어갈 수 있었다.
철혈마련에서는 사진효와 마곡청을 영빈각으로 안내했다.
혁무천과 엽기천은 남조와 함께 영빈각이 아닌 일반 객당의 방을 배정받았다. 그들도 남조처럼 사진효의 호위무사로 생각한 것이다.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혁무천은 안내무사가 방을 알려주고 돌아서려 하자 가볍게 질문을 던졌다.
“절강에 가셨던 한상귀 장로가 련으로 돌아왔소?”
“한 장로님? 어제 돌아오신 것 같던데…….”
“지금은 어디 계시오?”
“아마 장로원에 계실 거요.”
혁무천은 그 정도에서 만족하고 질문을 그쳤다. 너무 깊은 질문은 상대의 의심을 살 수 있었다.
그날 오후.
혁무천은 장가만물상에서 얻은 정보를 토대로 철혈마련의 내부를 살펴보았다.
철혈마련은 대지만 해도 백만 평이 넘었다. 백마궁에 비해서 몇 배나 되는 크기.
외부의 무사 수천 명이 들어왔음에도 좁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대연무장은 일만 평이나 되었는데, 곳곳에 비무대가 지어졌고 외곽에는 천막이 들어섰다.
그러나 철혈마련에는 외부인이 들어갈 수 없는 곳이 많았다.
철혈마전 뒤쪽의 내원은 입구에서부터 출입을 철저히 통제했다.
한상귀가 기거하는 장로원은 바로 그 출입통제지역 안에 있었다.
“여긴 들어갈 수 없으니 돌아가시오.”
경비무사 둘이 혁무천의 앞을 막아섰다.
혁무천은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한상귀 장로님을 만나러 왔소. 안에 기별이라도 넣어주시오.”
경비무사 중 삼십 대로 보이는 자가 예리한 눈빛으로 혁무천을 살펴보며 물었다.
“한 장로님과는 어떤 관계요?”
“영파에서 왔다고 하면 아실 거요.”
너무 태연한 말, 척 봐도 뭔가 있어 보이는 모습.
경비무사는 질문을 더 하지 못하고 한발 물러섰다.
“잠시만 기다려 보시오. 조장님께 말씀드려보겠소.”
그러고는 십여 장 떨어진 곳에서 뒷짐을 지고 오가는 자에게 빠르게 걸어갔다.
등에 커다란 칼을 매고 있는 그자가 경비조의 조장인 듯했다.
곧 그가 경비무사와 함께 혁무천을 향해 다가왔다.
“한상귀 장로님을 잘 아신다고?”
“알지는 못하오. 그저 전할 말과 들어야 할 말이 있어서 만나려는 것뿐이오.”
“성함이 어찌 되시오?”
“무천.”
“전할 말이라는 게 뭐요?”
“그건 한상귀 장로님께만 말씀드릴 수 있소. 어차피 들어야 할 말도 있으니까. 만날 수 없다면 그냥 돌아가겠소.”
입가에 흉터가 있는 경비조장이 혁무천의 위아래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비무대회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모여든 상태다. 개중에는 중요 인물도 상당수다.
설마 허튼 짓을 하지는 않겠지?
그런 생각도 들었다.
나름대로 머리를 굴린 그가 혁무천의 눈을 직시한 채 말했다.
“우리 조원이 장로님께 안내해드릴 거요. 엉뚱한 곳으로 새면 안 되오. 그 후 벌어지는 일은 모두 그대의 책임이라는 점, 명심하시오.”
“걱정 마시오. 나는 한 장로님만 만나면 되니까.”
경비조장이 옆의 무사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 공자를 한상귀 장로님께 모셔다드려라. 그리고 기다렸다가 볼일이 끝나면 모시고 나오도록.”
혁무천은 삼십 대로 보이는 경비무사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수월하게 통과했군.’
한상귀가 은설의 행적을 알고 있을까?
설마 잘못되지는 않았겠지?
그래, 그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