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천화 3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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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88회 작성일소설 읽기 : 귀환천화 37화
37화
시간이 가면서 상처는 심해지고, 공력은 고갈되어갔다.
그나마 연소화의 실력이 뛰어나서 자기 한 몸 지킬 수준은 되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연 소저! 저희가 전력을 다해서 구멍을 뚫을 테니, 기회를 봐서 먼저 이곳을 빠져나가십시오!”
혁무천을 다그쳤던 청년이 소리쳤다.
자신의 목숨을 던져서라도 그녀를 구하겠다는 듯.
또 다른 청년도 이를 악문 채 적을 상대했다.
하지만 그는 시간이 가면서 갈등이 일었다.
자신이 왜 연소화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단 말인가.
그녀가 아름다운 것은 사실이지만, 자신의 목숨보다 우선은 아니었다.
아름다운 여인을 얻는 것도 살아 있을 때의 이야기.
그는 의형인 고중산이 소리치자, 연소화와의 거리를 조금 더 벌리고 적의 공격을 맞이했다.
겉으로는 포위망을 뚫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는 연소화보다 자신의 목숨을 구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그녀를 지키고자 하는 것만 아니라면 어떻게든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 듯했다.
“기 아우! 연 소저에게서 너무 떨어지지 말게!”
그가 연소화에게서 멀어지는 걸 보고 고중산이 소리쳤다.
그는 못 들은 척하며 눈앞에 있는 적을 몰아붙였다.
“저는 괜찮으니 포위망을 뚫으세요!”
기소당의 속마음도 모르고 연소화는 오히려 그를 응원했다.
‘그래, 연소화의 실력도 만만치 않으니 당장 어떻게 되지는 않을 거다.’
기소당은 더욱 거리를 벌리고 포위망을 뚫는 일에만 열중했다.
그러나 적의 포위망은 생각보다 더 단단했다.
포위망은 뚫리지 않고, 시간이 가면서 부상 정도가 점점 심해졌다.
상대의 무기가 스쳐간 옆구리에서는 피가 줄줄 흘렀고, 한쪽 팔은 근육이 깊게 잘린 듯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설상가상,
서걱!
적의 칼이 허벅지를 깊게 훑으며 지나갔다.
‘크윽!’
비명을 삼킨 그는 절룩이며 뒤로 물러섰다.
갈라진 허벅지에서 피가 뿜어졌다.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혈사방 무사 둘이 이를 드러내며 달려들었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연소화가 소리치며 앞으로 나섰다.
혈사방 무사 중 둘이 기소당을 놔둔 채 연소화를 공격했다.
연소화는 춤을 추듯 부드럽게 검을 펼치며 혈사방 무사들의 공세를 차단했다.
언뜻 보면 약하게 느껴지는 검법이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은산일객에게 익힌 그녀의 비연칠검은 빈틈이 없었다.
때로는 물이 흐르듯, 때로는 제비가 먹이를 낚아채듯 상대를 위협했다.
아쉬운 점이라면 공력이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것.
그리고 조부만 상대하다 보니 실전경험이 부족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점이 약점으로 작용했다.
혈사방 무사 한 사람이 더 공격에 가세하자 그녀의 검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악!”
끝내 혈사방 무사의 칼날이 그녀의 어깨에 상처를 냈다.
짧은 비명을 내지르고 뒤로 물러선 그녀의 어깨에서 핏물이 흘러나왔다.
“연 소저! 조심하시오!”
고중산이 놀라서 소리쳤다.
하지만 그도 네 사람을 상대하느라 몸을 뺄 수가 없었다.
혈사방 무사들은 살기 띤 표정으로 더욱 거세게 연소화를 공격했다.
겨우겨우 공격을 막으며 물러서는 그녀의 표정이 해쓱해졌다.
연희명은 마음이 다급해졌지만 당필상에게 막혀서 그녀를 도와줄 수가 없었다.
그 사이 혈사방 무사의 칼날이 그녀의 다리에 다시 상처를 더했다.
급히 뒤로 물러선 연소화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오냐! 함께 죽자, 개새끼들아!”
고중산이 악을 쓰며, 달려드는 자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연소화만큼은 구해야 했다.
자신이 부상을 입더라도!
그때 연소화를 공격하는 적의 뒤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워낙 갑작스러워서 그림자가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자신도 아는 자였다.
‘저자는…….’
오리구이를 함께 먹었던 자. 조금은 건방지고, 오만하게 보이던 자.
정파의 협객에게 가족을 모두 잃었다고 주장하던 자.
그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적의 등에 일장을 내갈긴다.
콰직!
뒤에 누군가가 나타난 것도 모르고 하얀 살소를 짓고 있던 자가 입을 쩍 벌린 채 꼬꾸라졌다.
뒤이어 나머지 하나도 목이 기이하게 꺾어지며 쓰러졌다.
“저 여자나 잘 지켜. 허튼 생각 말고.”
혁무천은 겨우 숨을 고르고 있던 기소당을 향해서 차갑게 한마디 던지고는 다른 자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한발 늦게 나타난 엽기천도 그를 따라 움직였다.
그는 못마땅한 표정이 역력했다.
아무 이익도 없는 일에 왜 끼어든단 말인가. 아니 이익은커녕 손해만 볼지도 몰랐다.
상대는 마도십문 중 한 곳인 혈사방인 것이다.
그러나 혁무천의 도움이 필요한 이상 모른 척 구경만 하고 있을 수도 없었다.
‘제길, 설마 진짜로 은자 반냥 때문에 끼어든 건 아니겠지?’
피바람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혈사방 무사들이 당황해서 우왕좌왕 하는 사이, 십여 명이 대항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쓰러지며 포위망이 순식간에 흐트러졌다.
예상치 못한 고수의 출현에 여광과 당필상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나마 약간의 여유가 있던 여광이 혁무천 쪽으로 몸을 날렸다.
“웬 놈들이냐!”
혁무천은 그를 무심한 눈으로 응시했다.
“모르는 게 나아.”
“이 건방진 놈이……! 죽어!”
여광이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며 칼을 내리쳤다.
한 줄기 도세가 어둠을 가르며 낙뢰처럼 떨어졌다.
순간, 허공으로 솟구친 혁무천이 여광의 도세를 향해 정면으로 검을 뻗었다.
쾅!
일성 굉음이 울리고, 두 사람이 반대쪽으로 튕겨져 나갔다.
혁무천은 이 장 정도 뒤로 날아가서 땅에 내려선 반면, 여광은 두어 번 비틀거리다가 결국 바닥에 나뒹굴었다.
갑작스럽게 상황이 변하고 여광마저 부상을 당하자, 당필상의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연희명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당필상을 몰아붙였다.
얼굴이 일그러진 당필상은 더 버티지 못하고 뒤쪽으로 몸을 날렸다.
“후퇴해!”
적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에는 시신과 피비린내만이 남았다.
“일단 지혈부터 하시오. 이곳을 벗어나야 하니까.”
혁무천의 냉정한 말에 종사승이 눈살을 찌푸렸다.
“나도 그렇고 기 사질도 부상이 심하네. 적이 물러갔는데 바로 오겠나?”
“그들이 전부가 아니오.”
“적이 또 있다고?”
“곧 몰려올 거요.”
사실 지금쯤 왔어야 했다. 왜 안 오는지 모르지만, 그 이유까지 파악할 필요는 없었다.
“어쩌면 멀리서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르오.”
종사승이 놀란 표정을 짓자, 연희명이 혁무천의 말에 동의했다.
“저 젊은 친구의 말이 옳네. 우리가 싸운 자들은 뒤를 쫓아온 자들과 다른 무리야.”
“으음, 알겠습니다. 그럼 지혈만 하고 이곳을 떠나지요.”
옷을 찢어서 심한 상처만 싸맨 그들은 곧장 격전이 벌어진 곳을 떠났다.
그러고는 십 리 정도 이동한 후에야 추적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휴식을 취했다.
그들은 휴식을 취하며 상처를 마저 치료했다. 그래봐야 상처에 금창약을 뿌리고 싸매는 정도가 전부였지만.
“도와줘서 고맙네. 아까 전에 내가 말을 심하게 한 것은 사과하지.”
종사승이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만약 그때 힘으로 누르려 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고마워할 것까진 없소. 오리 먹은 값을 받으러 왔을 뿐이니까.”
“…….”
“은자 반냥, 벌써 잊었소?”
종사승은 품속에서 돈주머니를 꺼내 반냥을 건네주었다.
돈을 받아 든 혁무천은 더 볼 일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모두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 은자 반냥 때문에 혈사방과 싸웠단 말인가?
그때 연소화가 물었다.
“저는 연소화라고 해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은혜를 갚고 싶어요.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요?”
“무천. 은혜는 갚을 필요 없어. 오리 값 받으러 온 거니까.”
혁무천은 그 말만 하고 걸음을 옮겼다.
엽기천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뒤따라갔다.
‘하여간 이상한 친구라니까.’
자신이 제대로 밧줄을 잡은 걸까?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실력 하나는 확실한데…….
그가 어떻게 생각하든 혁무천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나중에 은설을 만나면 이야기해 줘야지.’
아마 잘했다고 할 것이다.
그것만 해도 저들을 도와준 보람이 있었다.
***
바람이 세차게 불던 날.
철혈마련에서 백 리 남쪽에 있는 영산진(影像鎭) 어귀에 두 사람이 들어섰다.
낡은 흑포를 걸친 청년과 갈색 무복에 머리가 먼지로 뿌옇게 뒤덮인 장한.
혁무천과 엽기천이었다.
장강 가에서 혈사방과 싸운 지 이틀 만에 드디어 철혈마련을 목전에 둔 것이다.
“저기 객잔이 있군.”
엽기천이 마을을 보며 말했다.
누런 황토벽돌로 만들어진 건물에서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이제 곧 밤이 올 터, 객잔에서 밤을 보내고 철혈마련에는 내일 가야할 듯했다.
그런데 두 사람이 객잔 앞에 거의 다 도착했을 때였다.
입구에 늘어진 주렴이 세차게 펄럭이더니 객잔 안에서 한 사람이 튕겨져 나왔다.
허름한 무복을 걸친 청년이었다.
바닥을 데굴데굴 구른 그는 이를 갈면서 힘겹게 몸을 일으키려고 애썼다.
술을 얼마나 퍼마셨는지 숨을 씩씩거리며 쉴 때마다 독한 주향이 진동했다.
“별 것도 아닌 놈이 건방지게 어디서…….”
객잔 안에서 삼십 대 장한 하나가 비아냥거리며 나왔다. 그러다 입구 근처에 서 있는 혁무천을 보고 인상을 썼다.
“이 새끼는 또 뭐야?”
혁무천의 시선이 그자를 향해 돌아갔다.
“비켜.”
“뭐?”
“비키라는 말이 뭔 뜻인지 모르나?”
“이 새끼가!”
눈을 치켜 뜬 장한이 달려들며 혁무천을 향해 손을 뻗었다.
독수리의 발톱처럼 구부러진 손가락이 혁무천의 목을 단숨에 움켜쥘 듯 날아들었다.
굳은살로 뭉친 그의 손가락은 오랜 세월 조공(爪功)을 익힌 듯 강철처럼 짙은 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통나무를 으스러뜨릴 수 있는 강력한 힘이 실린 일수.
거리가 제법 되는데도 혁무천의 얼굴에 압박감이 느껴졌다.
혁무천은 눈빛 한 점 흔들리지 않고 상대를 쳐다보며 우수를 쳐들었다.
섬뜩한 느낌이 든 장한은 반사적으로 손을 틀었다.
능히 고수답게 빠른 반응이었음에도 혁무천의 우수를 벗어나기에는 너무 느렸다.
우두둑.
“크읍!”
장한의 손목이 역으로 꺾어졌다.
코앞에서 손목을 잡아 부러뜨린 혁무천은 달려들던 상대의 힘을 역이용해서 장한을 한쪽으로 던져버렸다.
쾅!
붕 날아간 장한이 굉음을 내며 벽에 처박혔다.
단 일수로 장해물을 치운 혁무천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객잔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뒤에 서 있던 엽기천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뒤따라갔다.
‘정말 무섭군.’
장한의 일수는 자신조차 피하기가 쉽지 않을 만큼 빨랐다.
그러나 혁무천의 반격은 그보다 배는 더 빨랐고, 무서울 정도로 단호했다.
객잔 안에는 세 사람이 탁자 하나에 앉아 있었다.
눈빛이 칼날 같은 칠순의 백의노인과 이십 대 중반에 하늘색 청의를 걸친 청년, 그리고 삼십 대 장한.
손님은 그들이 전부였다.
삼십 대 장한의 갈색 무복이 혁무천을 공격했던 자와 비슷한 걸 보니 그자의 동료들인 듯했다.
세 사람은 각기 다른 뜻이 담긴 시선으로 혁무천을 바라보았다.
노인의 칼날처럼 가느다란 눈은 차가운 눈빛으로 번뜩였고, 청년은 왠지 모르게 호승심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장한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모르는 듯 의아한 표정이었고.
혁무천과 엽기천은 그들의 눈길을 받으며 비어 있는 탁자로 갔다.
두 사람이 의자에 앉을 때서야 장한이 밖으로 나갔다.
곧 축 처진 장한을 안고 안으로 들어온 그자가 혁무천 쪽을 보며 소리쳤다.
“네놈들이 구 형을 해친 거냐!”
혁무천이 그게 뭐 어떠냐는 듯 냉랭히 답했다.
“입이 걸레 같은 자가 입구를 막고 있어서 치웠지. 손목이 부러지긴 했지만 죽진 않았을 거야. 죽었다면 어쩔 수 없고.”
“이 죽일 놈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