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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천화 36화

무료소설 귀환천하: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354회 작성일

소설 읽기 : 귀환천화 36화

36화

 

 

당장이라도 오리 다리로 혁무천을 후려칠 것 같은 기세.

하지만 그의 기세로는 혁무천의 눈썹 한 올도 흔들지 못했다.

“과거에도 그런 자들이 있었어. 쥐꼬리만 한 실력만 믿고 남을 핍박하던 자들이. 심지어 어린아이까지 죽였지. 소위 정파의 협객이라는 자들이.”

고저 없이 흘러나오는 나직한 목소리.

입가에 피어난 차가운 냉소.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춘 중년인은 기이하게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대신 옆에 앉아 있던 청년이 버럭 한소리 내질렀다.

“어디서 헛소리를 듣고 정파의 협객들을 모욕하는가?”

혁무천의 시선이 천천히 그에게로 이동했다.

“헛소리라 했나?”

“흥! 세상의 어떤 협객이 죄도 없는 어린아이를 죽인단 말이냐? 네가 보기라도 했단 말이냐?”

“봤지.”

“뭐?”

“바로 내 앞에서 죽였으니까. 내 형을, 내 누이를…… 그리고 내 부모님까지…… 모두…… 죽였지. 그들은.”

깊은 동굴 속에서 으르렁거리며 바람이 흘러나오듯, 나직이 이어지는 한마디, 한마디가 날선 비수처럼 듣는 이의 폐부를 찔렀다.

충격을 받은 듯 모두가 입을 반쯤 벌리고 말을 잊었다.

“…….”

“……맙소사.”

엽기천이 겨우 한마디 내뱉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날 겨우 나만 살아남았어. 그래서 나는 말로만 정파의 협객 운운하는 자들을 믿지 않아.”

“으으음.”

노인이 무겁게 침음을 흘렸다.

사실일까?

표정을 봐서는 거짓말 같지 않았다.

가늘게 떠진 눈 깊은 곳에서 고통과 분노, 고뇌가 뭉뚱그려진 채 일렁거리고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하고 온몸이 축 처지는 느낌.

그때 여인이 말했다.

“미안해요, 그런 줄도 모르고…….”

“미안해 할 것 없어. 당신들과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매몰차게 말을 맺은 혁무천은 발라낸 오리고기를 입안에 넣었다.

여인을 향한 그의 말투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입을 꾹 닫고 있던 청년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연매, 솔직히 나는 저 친구의 말을 믿을 수 없소. 세상의 어느 협객이 어린아이와 힘없는 사람들을 죽인단 말이오.”

사실 곧이곧대로 믿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말이었다.

여인도 조금은 그런 마음이 있었는지 바로 부정하지 못했다. 노인과 중년인 역시 침묵을 지켰고.

혁무천은 입꼬리를 비틀며 조소를 지었다.

어차피 믿어줄 거라 생각하고 한 말도 아니었다.

그저 누군가에게 털어놓기라도 하면 가슴 깊숙한 곳에 똬리를 틀고 있는 고통이 덜어지지 않을까 해서 해본 말일 뿐.

조금은 욱한 마음도 있었고.

그런데 역시나 생각했던 대로의 반응이었다.

“믿기 싫으면 믿지 마. 믿어 줄 거라 기대하지도 않았으니까.”

차갑게 내뱉은 그는 뼈만 오리 다리를 모닥불 속에 던져 넣었다.

그때였다.

미간을 찌푸린 그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일행이 있습니까?”

다리뼈를 입안에 넣고 있던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옵네.”

노인의 입에서 묘한 발음이 새어나왔다.

노인의 그런 모습을 본 여인이 “킥!”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런데 노인이 입안에서 뼈를 빼내고 굳은 표정으로 여인 쪽을 바라보았다.

“화났어요, 할아버지?”

여인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노인이 바라보는 것은 여인이 아니었다.

여인의 뒤쪽, 그들이 나왔던 갈대숲이었다.

갈대숲을 흔들며 불어대는 바람에서 인간이 내뿜는 기운이 느껴진 것이다.

“아무래도 그들에게 꼬리가 밟힌 것 같군.”

노인의 말뜻을 알아들은 중년인과 청년도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단순히 모닥불을 보고 오는 것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종 대협이라 불린 중년인이 그렇게 말하자, 노인이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였다.

“그럴지도 모르지. 어쨌든 그들이 오기 전에 가세.”

“예, 노야.”

중년인이 대답하고 바로 몸을 일으켰다.

청년과 여인도 그를 따라 일어섰다.

그때 노인이 혁무천을 향해 말했다.

“나는 연이라는 성을 쓰는 늙은이네. 나중에 다시 만났을 때는 좀 더 좋은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싶군.”

혁무천이 앉은 채로 답했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만, 다른 분들은 원치 않는 것 같군요.”

중년인은 혁무천을 노려보았다.

‘어디 어른이 가는데 싸가지 없이 앉아서 인사를…….’

하지만 그 이상의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지금은 저 젊은 놈과 싸울 때가 아니었다.

자신들을 쫓는 자들은 강했다. 머뭇거리다가 포위라도 당하면 생사를 다투는 일이 발생할 터, 그 전에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조금 전에 본 눈빛을 생각하면 야단치기도 껄끄러웠고.

“가시죠, 노야.”

 

혁무천은 어둠 속으로 사라진 노인 일행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은 후에야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오늘 이곳에서 노숙하긴 틀린 것 같군.”

갈대숲을 뒤덮으며 밀려드는 기운과의 거리 이십 장.

방향도 자신들 쪽이다.

이제 곧 들이닥칠 터, 그들에게 설명할 이유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혁무천과 엽기천이 떠난 곳에 무사 이십여 명이 나타났다.

그들은 타오르는 모닥불을 보고 조심해서 접근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해서 보니 아무도 없었다.

“령주, 모닥불을 피워서 우리를 속이고 다른 곳으로 도망친 것 아닐까요?”

삼십 대 장한 하나가 그렇게 말하자, 무리를 이끄는 것으로 보이는 사십 대 중반의 중년인이 냉랭히 답했다.

“모닥불을 끌 시간도 없이 다급하게 도주했을 수도 있다.”

그는 노인 일행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았다.

두 눈에서 살기가 일렁거렸다.

“만일 그렇다면, 멍청한 놈들이 죽을 자리를 찾아간 거지.”

 

***

 

“싸움이 벌어진 것 같네. 또 다른 자들이 있었나 보군.”

엽기천이 어둠 속을 바라보며 말했다.

혁무천과 그는 노인 일행이 향한 곳과는 다르게 방향을 잡았다.

그럼에도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제법 먼 거리거늘.

그만큼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는 소리다.

“신경 쓰지 말고 가세. 알아서 하겠지.”

엽기천이 말하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혁무천도 관심을 두지 않으려 했다.

자신의 말에 꼬박꼬박 토를 달던 청년, 대단치도 않은 눈빛으로 자신을 윽박지르던 중년인, 둘 다 마음에 안 들었다.

아마 은설의 말이 떠오르지만 않았어도 그들이 죽든 말든 가던 길을 갔을지 몰랐다.

 

“마도 놈들이 언제 남 생각해 준 적 있는 줄 알아요? 쳇! 마도 놈들은 자신들밖에 모른다구요.”

 

언젠가 은설이 그렇게 말했다.

꼬박 꼬박 ‘놈’자를 붙이며.

아마 그가 그냥 간 것을 나중에 은설이 알게 되면 보나마나 한소리 할 것이다.

‘남 생각을 안 해주는 마도 놈들’이 되고 싶지 않은 그는 싸우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몸을 틀었다.

“응? 왜? 가보려고?”

걸음을 멈칫한 엽기천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혁무천은 대충 둘러댔다.

“생각해 보니… 은자 반냥을 받지 않았어.”

“…….”

 

***

 

“자네들은 연 소저를 보호하게!”

청년들에게 소리친 종사승은 달려드는 적을 향해서 전력을 다해 검을 떨쳤다.

그의 장기인 금사이십사검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펼쳐졌다.

수십 개의 검화가 어둠 속에서 피어나며 적을 향해 나풀거리며 밀려갔다.

떠더더덩!

귀청을 울리는 충돌음.

“크억!”

그의 공격을 미처 피하지 못한 자들 두엇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종사승이 좌측을 방어하는 동안 우측은 노인이 맡았다.

노인은 혁무천을 마주할 때와 달리 차가운 표정이었다.

적이 어둠 속에서 불쑥불쑥 나타나는 데도 노인은 흔들리지 않고 분노가 실린 장력을 좌우로 흩뿌리듯 쳐냈다.

콰아아아아!

스스스스스스스.

강력한 장력이 우거진 잡풀과 갈대를 가루로 으스러뜨리며 상대를 덮쳤다.

노인의 장력에 휩쓸린 자들 몇이 훌훌 날아가서 나뒹굴었다.

하지만 적의 실력도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눈앞에 보이는 숫자만 해도 수십 명이나 되었다.

그들은 쓰러지는 동료를 아랑곳하지 않고 철저히 연환합공을 펼치며 노인 일행을 몰아붙였다.

이미 절정고수의 단계를 넘어선 노인조차도 그들의 공세에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지켜야할 사람이 있다 보니 움직일 수 있는 행동반경도 한계가 있었다.

“일단 힘을 합쳐서 한쪽을 뚫고 빠져나가세!”

노인이 소리쳤다.

바로 그때,

“와하하하! 포기하시는 게 좋을 거외다!”

어둠을 울리는 일성과 함께 세 사람이 격전장으로 날아 내렸다.

사십 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중년인 하나와 삼십대 장한 하나. 그리고 오십 대 초로인 하나.

종사승이 사십 대 후반의 중년인을 보고 눈을 치켜떴다.

“여 형? 당신이 어떻게……?”

“하하하하! 아무래도 나에게는 마도 쪽이 맞는 것 같더군. 그래서 혈사방에 들어갔지.”

“이 죽일 놈이……! 네놈이 배신자였구나!”

“군자입네 하며 위선을 떠느니, 가슴 속에 쌓인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이 나을 것 같더군. 그래서 칼을 거꾸로 잡기로 결심했다네. 후후후후.”

조소를 지은 중년인은 노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제 천기회에서 영입하려는 천하의 은산일객을 잡아가면 내 가치도 높아지겠지.”

“어림없다, 이놈!”

종사승이 몸을 날려서 중년인을 공격했다.

창천일도 여광. 하남 무림에서 도를 논할 때 빠지지 않는 이름 중 하나.

종사승은 자신의 실력이 여광보다 한 수 아래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여광의 칼에 죽는다 해도 이대로 참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언제부턴가 회의 기밀이 하나 둘 새어나갔다.

몇 사람이 의아할 정도로 쉽게 노출되어서 죽임을 당했다.

아무리 철저하게 비밀을 지켜도 소용없었다.

그런데 여광이 회와 앙숙지간인 혈사방의 간자라면 모든 일이 설명된다.

그는 당장 이 자리에서 죽더라도 여광의 심장을 찢어발기고 싶었다.

여광은 날아드는 종사승을 보며 칼을 빼들었다.

“너는 내 적수가 아니다, 종사승.”

“개소리 마라, 여광!”

쩌저저저정!

고막을 울리는 격돌음과 함께 검기 도기가 휘몰아쳤다.

실력의 차이는 금방 드러났다.

목숨을 아끼지 않고 펼친 종사승의 공격은 여광을 위협하지 못했다.

오히려 여광의 도세가 종사승을 위기로 몰아넣었다.

보다 못한 노인이 몸을 날렸다.

“물러서게!”

그때, 조용히 서 있던 오십 대 초로인이 스윽, 한 걸음 내딛었다.

“연희명, 그대는 내가 상대해주마.”

한 걸음 내딛었다 싶었는데 순간적으로 거리가 이 장이나 좁혀졌다.

초로인은 허리춤에서 폭이 넓고 길이가 짧은 기형도를 빼들고는 노인을 향해 휘둘렀다.

콰아아아아!

음습하면서도 강맹한 도세가 해일처럼 밀려갔다.

“너는 단천귀도 당필상이구나!”

상대의 정체를 알아챈 노인은 다급히 공력을 구성까지 끌어올려서 쌍장을 쳐냈다.

초로인의 기형도에서 뻗어 나온 도기와 연희명의 장력이 정면으로 충돌하며 뒤엉켰다.

콰과과광! 떠덩!

강맹한 기운의 충돌 여파가 반경 이 장 이내를 휩쓸었다.

근처에 있던 무사 하나가 도기의 파편에 몸이 갈라지고, 장력에 휩쓸려 피를 뿜어냈다.

그 모습을 본 다른 사람은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그때부터 두 사람 사이에 목숨을 건 대결이 벌어졌다.

막상막하의 대결.

공력은 은산일객 연희명이 약간 앞서는 듯했다.

그러나 단천귀도 당필상의 기형도에서 펼쳐지는 괴이한 도세가 그 약간의 차이를 상쇄시켜 주었다.

그 와중에도 연희명은 손녀의 안녕이 걱정되어서 전력을 다할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손녀를 지키던 두 청년이 적의 공세에 흔들리는 게 보였다.

더구나 적도 몇이 더 가세해서 두 청년을 강하게 몰아붙이고 있었다.

 

한편, 연소화를 보호하고 있던 두 청년은 온몸이 피로 물든 상태에서도 전력을 다해 혈사방 무사들을 상대했다.

은산일객 연희명을 영입하는 일이 실패하면 회에 치명적인 피해가 갈 수밖에 없었다.

다른 고수들이 회와 손잡는 일을 꺼릴 테니까.

아니, 그 일이 아니어도 연소화를 지켜야만 했다.

아름다운 그녀가 적의 손에 다치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들의 뜻대로 흐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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