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천화 3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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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82회 작성일소설 읽기 : 귀환천화 35화
35화
은설은 말을 마치고 무릎을 꿇었다.
보타신니는 무릎 꿇은 은설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쉽게 고집을 굽힐 것 같지 않았다.
그때 문득 어떤 생각을 떠올린 그녀가 피식, 실소를 짓고 말했다.
“꼭 빈니의 어릴 적 모습을 보는 것 같구나. 이 어리석은 노니도 스승님께 무릎을 꿇고 떼를 썼었지.”
고개를 쳐든 은설이 놀랐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어머? 정말요? 그래서 허락하셨어요?”
보타신니가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도 떼를 쓸래요.”
“빈니는 석 달 동안 떼를 썼는데, 너는 얼마나 떼를 쓸 거냐?”
은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서, 석 달이나요?”
“빈니의 고집이 조금 세니, 아마 석 달에 열흘은 더 채워야 할 거다.”
홍아의 말이 옳았다.
보타신니는 보살일 때도 있지만, 때로는 심술쟁이처럼 괴팍한 성질을 부릴 때도 있었다.
‘그런데 저도 고집이 있는 여자라구요. 한번 석 달 열흘 채워보죠 뭐.’
결심을 굳힌 그녀는 싱긋 웃었다.
저 멀리 바다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머리카락을 날렸다.
이제 막 피기 시작한 꽃들에게서 흘러나온 향기까지 바람에 섞여 있어서 가슴이 다 시원했다.
“그럼 석 달 열흘 동안 떼를 쓰면 제자로 받아주시는 걸로 알게요.”
보타신니가 은설을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제자로 받기는 어려울 것 같구나. 어차피 너는 비구니가 될 운명이 아니니 보타의 무공을 전할 수도 없느니라.”
은설이 실망한 표정으로 입을 삐죽였다.
“정말 안 돼요?”
“실망할 것 없다. 아마 네가 얻은 것만 너의 것으로 만들어도 네 한 몸 지키기에는 충분할 거다. 노니가 그 정도는 도와주마.”
은설의 표정이 다시 펴졌다.
“정말이죠?”
“노니의 말을 믿지 못할 거면 없던 일로 하자꾸나.”
“아니에요! 저는 신니 할머니의 말을 믿어요. 가르쳐주세요!”
***
철혈마련의 마룡선발대회는 전 강호를 들썩이게 했다.
수많은 강호의 청년고수들이 철혈마련으로 향했다.
강동일화 우문소소.
절세미녀로 소문난 그녀를 차지하기 위해서.
그녀에 비하면 무림의 보물이나 당주라는 지위도 하찮았다.
어차피 련주의 딸을 얻으면 보물이나 지위는 저절로 굴러 들어올 테니까.
그런데 청년 고수들만 몰려가는 게 아니었다.
젊은 여무사들도 몰려갔다.
멋진 청년을 낚기 위해서.
혁무천도 곧장 철혈마련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그는 보물도, 지위도, 강동일화도 관심이 없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은설에 대한 소식이었다.
그녀가 어떻게 되었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왜 그녀의 옷이 바다에 떠다녔는지.
그걸 알아내야만 했다.
항주를 출발한 지 사흘째 되던 날.
혁무천과 엽기천은 장강의 거대한 물줄기를 앞에 두고 걸음을 멈추었다.
석양이 서산으로 가라앉고 어둠이 밀려드는 시각.
곧 어둠이 세상을 뒤덮을 터, 장강을 건너기는 틀린 일이었다.
두 사람은 장강이 내려다보이는 야산에 자리를 잡고 모닥불을 피웠다.
“솔직히 말해 봐. 길을 알긴 아나?”
혁무천이 모닥불 위에 마른 나무 하나를 올리며 물었다.
길안내를 맡았던 엽기천이 멋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사실 나도 항주까지밖에 모르네. 인생의 거의 대부분을 영파에서 보냈지. 그래도 말은 많이 들어서 철혈마련을 찾아가는 것은 어렵지 않을 줄 알았는데…….”
엉뚱한 길로 들어서는 바람에 무려 이백 리를 더 돌아온 것이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방향을 틀었다면 이미 장강을 건넜을 텐데…….
혁무천은 맥이 빠졌지만 그를 탓하진 않았다.
그에게 길안내를 맡긴 건 자신이니까.
초행인 자신보다는 그래도 절강에 사는 그가 더 잘 알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그런데 알고 보니 그도 철혈마련은 초행이었다.
“할 수 없지. 오늘은 여기서 쉬고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해야겠어.”
어차피 하룻밤쯤은 푹 휴식을 취하는 게 나을지도…….
미련을 털어낸 그는 나무 몇 개를 더 모닥불 위에 올렸다.
본격적으로 불이 붙은 모닥불의 불길이 붉은 혓바닥을 내밀며 허공으로 솟구쳤다.
“내가 오리를 잡아오지.”
마주 앉아 있기가 머쓱한 듯 엽기천이 일어나서 강가로 갔다.
혁무천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불길만 바라보았다.
솔직히 결과를 알기가 두려웠다.
철혈마련에 가서도 은설의 행방을 알아내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만에 하나…… 은설이 죽기라도 했다면?
파스스스스.
그가 붙잡고 있던 굵은 부지깽이가 가루로 부서졌다.
두 눈에서 시퍼런 살기가 일렁거렸다.
‘너희들은 그 아이가 살아 있기를 바라야 할 거다.’
어둠이 짙게 깔릴 즈음, 엽기천이 오리를 네 마리나 잡아왔다.
표정이 조금 밝아진 그는 능숙하게 오리를 손질했다.
그러고는 모닥불 가운데 넓적한 돌을 두어 개 놓고 그 위에 손질한 오리를 올려놓았다.
오리가 기름을 뚝뚝 떨어뜨리며 익어갔다.
혁무천이 품속에서 대나무통을 꺼내더니 뚜껑을 열고 가루를 손바닥에 약간 쏟은 다음 오리 위에 뿌렸다. 소금과 향신료가 섞인 가루였다.
엽기천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노숙을 많이 해봤나 보군, 그런 것까지 준비해서 다니다니.”
많이 해보지는 않았다.
사천에서 호북으로 오며 며칠. 은설을 만난 이후 며칠이 전부였다.
어쩌면 노숙보다 섬에서 지내며 더 익숙해졌는지도…….
“은설에게 배웠지.”
혁무천은 짧게 대답해서 흔들리려는 감정을 숨겼다. 그러고는 소도를 이용해서 오리를 뒤집었다.
잘 익은 오리에서 나는 구수한 냄새에 절로 침이 고였다.
“다 익은 것 같군.”
막 오리를 자르려던 그가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어서 어둠 속을 쳐다보았다.
츠츠츠츠.
갈대숲을 헤치며 무언가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짐승은 아니었다.
규칙적인 발걸음. 짐승보다 더 께름칙한 인간의 기척이었다.
혁무천은 자른 고기 한 조각을 입안에 넣고 우물거리며 갈대숲을 바라보았다.
다가오는 기척 중 하나가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처음에는 넷인 줄 알았다. 그런데 한 사람이 더 있었다.
그자는 십 장 안에 들어와서야 그의 감각에 잡혔다.
최소 절정의 경지.
‘어쩌면 그 이상의 고수일 수도…….’
그렇게 판단을 내렸을 때, 갈대가 촤악 갈라지며 다섯 사람이 나타났다.
혁무천은 어둠 속에서 모닥불 빛을 받으며 서 있는 자들을 무심한 눈빛으로 살펴보았다.
사남 일녀.
다섯 중 그의 신경을 건드린 자는 네 명의 남자 중 노인이었다.
하얀 수염이 바람에 멋지게 휘날리는 노인.
겉모습은 평범해보였으나, 노인의 두 눈만큼은 어둠 속에서도 확연히 느껴질 정도로 깊었다.
그리고 몸에 도사리고 있는 기운은 크고 거대했다.
‘정갈한 기운. 정파인인가?’
노인은 그가 빙천동을 나온 후 만나 본 강호인 중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강한 고수였다.
왜 저런 고수가 이런 곳에 나타난 걸까?
더구나 정파의 고수가.
그때, 남자들 중 각진 얼굴에 부리부리한 눈을 지닌 중년인이 말했다.
“그 오리구이를 우리에게 넘기게.”
말은 부탁하듯 했지만, 표정과 말투는 부탁과 거리가 멀었다.
내놓지 않으면 강제로라도 빼앗을 것처럼 오만하고 위협적인 표정, 말투.
혁무천은 그런 중년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왜 줘야 하지? 먹고 싶으면 잡아오시오. 그럼 구워는 줄 테니까.”
중년인은 혁무천의 툭툭 튀는 말투에 짙은 눈썹을 잔뜩 찌푸렸다.
하지만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조건을 제시했다.
“은자 반냥을 주겠다. 이 돈이면 오리를 스무 마리도 더 살 수 있을 거다.”
“그럼 당신이 사와 보시오.”
“…….”
중년인은 일순간 말문이 막혀서 눈만 치켜떴다.
지금 오리를 어디서 사온단 말인가?
한쪽에 서 있던 청년 하나가 그 모습을 보고 질책하듯 말했다.
“종 대협께서는 성의로 대하고자 하는데, 너무 말을 함부로 하는군.”
이십 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나이, 탄탄한 몸매.
두 눈에서 번뜩이는 정광. 그리고 맑은 기운.
그 역시 정파의 인물로 보였다.
하지만 혁무천은 그의 말에 답하지 않고 노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노인장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노인의 눈매가 어둠 속에서 꿈틀거렸다.
그는 모닥불 빛을 받은 혁무천의 모습을 보고 감탄해마지 않았다.
검은 장포에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 명공이 조각한 옥상처럼 잘생긴 얼굴.
자신이 지금껏 본 청년 중 앞에 있는 놈보다 강렬한 인상을 준 이가 있었을까 싶었다.
특히 눈앞의 청년에게서는 신경을 건드리는 묘한 느낌이 풍겼다.
“둘이 먹기에는 많을 것 같은데, 적당히 나누어 먹는 게 좋겠군. 어떤가?”
혁무천도 그 조건은 마다하지 않았다.
“그럼 은자 반 냥에 두 마리를 팔지요.”
종 대협이란 자가 눈을 치켜떴다.
네 마리 전부를 주는 것도 아니고, 겨우 두 마리를 주면서 반 냥을 받겠다고?
‘순 도적놈 같은 맘보군.’
그래도 아쉬운 건 자신들이었다.
“끄응, 좋다. 그렇게 하지.”
노인과 중년인, 이십 대로 보이는 두 청년과 여인.
그들도 곧 모닥불 가에 둘러앉았다.
두 청년은 남색 무복을 입었는데, 그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자는 스물대여섯 살 정도의 나이에 키가 약간 컸다.
늘씬한 체구의 여인은 그보다 서너 살 어려 보였고,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미녀였다.
그 여인은 머리카락에 가려진 혁무천의 반쪽 얼굴을 본 이후부터 한 번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하지만 다섯 사람 어느 누구도 이름을 밝히며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종 대협이라 불렸던 중년인이 그에 대해 말했다.
“우리 신분을 말해주지 못하는 걸 이해하게. 오늘 일은 스쳐가는 인연으로 하세.”
혁무천도 그게 편했다.
어차피 자신 역시 가명만 알려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왠지 상대의 정체를 알아봐야 귀찮은 일만 생길 듯했다.
“다 익었으니 드시죠.”
혁무천은 상관없다는 듯 구운 오리 고기를 칼로 잘랐다.
그제야 사람들의 시선이 오리에게로 옮겨갔다.
오리가 너무 익어서 타들어가는 부위도 있었다.
사람들의 손길이 바빠졌다.
비록 네 마리밖에 안 되었지만 살이 통통해서 나누어 먹기에 많이 부족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배도 고팠고, 향료를 적당히 쳐서 맛도 있었다.
그렇게 오리를 반쯤 먹었을 때였다.
노인이 불쑥 말을 건넸다.
“마련으로 가는 길인가?”
혁무천은 소도로 고기를 잘라서 입으로 가져가며 태연히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비무대회에 참가하려고?”
“본래 비무대회와는 상관없이 가는 길입니다만, 기회가 되면 참가하지 않을 이유도 없지요.”
혁무천의 입에서 그 말이 떨어지자, 청년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노인도 살짝 굳은 표정으로 무겁게 말을 뱉었다.
“아쉽군. 자네 같은 청년이 마도의 비무대회에 참가하다니.”
“뭐가 아쉽다는 건지 모르겠군요.”
“마도 세상이 된 후 무림의 정기가 말라버렸지. 특히 청년들이 너무 욕망을 취하는 일에만 매달리다 보니 무림의 혼조차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 자네 같은 젊은이가 나서주면 좋을 텐데…….”
노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혁무천이 한마디 내뱉었다.
“싫습니다.”
그리 대답할 줄은 생각을 못한 듯 노인이 이마를 찌푸렸다.
“싫다? 왜?”
“그보다 먼저 할 일이 있으니까요.”
“무림의 정기를 바로세우는 일보다 먼저 할 일이라…….”
“저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지요. 그에 비하면 나머지는 한낱 먼지구름에 불과할 뿐입니다. 바람이 불면 흩어지는 그런 먼지구름 말이지요.”
“그 일이 뭔지 정말 궁금하군.”
노인이 궁금해 하자, 청년에게 종 대협이라 불렸던 중년인이 코웃음 쳤다.
“흥, 마룡선발대회에 참가하려는 자가 하려는 일이 뭐겠습니까? 너무 기대하지 마시지요.”
그의 비아냥거림에도 혁무천은 별 표정 변화 없이 오리의 뼈에서 살을 발라냈다.
“내가 무림의 정기니 뭐니 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이유가 뭔지 아시오?”
“내가 네 속을 어떻게 안단 말이냐?”
“바로 당신처럼, 자신과 생각이 다르면 무조건 상대를 깔보고 악인으로 몰아가는 자들이 주로 그런 말을 입에 담거든.”
“뭐야?”
“그런 자들이 겉으로는 세상에서 제일 착한 정의군자처럼 말하면서 실제로는 독선에 가득 찬 행동을 하며 남의 등에 비수를 꽂지.”
비수처럼 날카로운 혁무천의 말투에, 눈을 치켜뜬 중년인이 반쯤 뜯어먹은 오리 다리를 뻗으며 으르렁거렸다.
“네가 지금 나를 욕보이겠다는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