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천화 3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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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07회 작성일소설 읽기 : 귀환천화 32화
32화
시뻘건 피가 사방으로 뿌려지면서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두 사람을 일검에 베어버린 혁무천은 무심한 표정으로 엽기천을 바라보았다.
“끝까지 대답을 하지 않으면……”
그 사이 몰려든 무사 십여 명이 혁무천을 공격했다.
“놈을 죽여!”
“죽어라, 개자식!”
혁무천은 자신을 공격하는 자들을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바라보며 검을 뻗었다.
“……아마 많은 사람이 죽을 거다.”
고오오오오.
그의 검에서 소름끼치는 살기가 휘몰아쳤다.
달려들던 무사들의 무기가 잘려 나가고, 살이 갈라졌다.
순식간에 십여 명이 피를 뿌리며 나뒹굴었다.
“여기도 있다!”
보다 못한 엽기천이 고함을 내지르고는, 오른발을 내딛고 쌍수를 앞으로 뻗었다.
일보에 두 사람의 거리가 지척이 되었다.
내뻗은 엽기천의 쌍수가 권으로 바뀌면서 십여 개의 권영이 허공을 수놓았다.
권영이 벼락처럼 뻗어나갈 때마다 허공이 터져 나갔다.
파파파팡!
혁무천은 차가운 눈빛으로 상대를 응시하며 상대의 공세를 손바닥으로 맞받아쳤다.
엽기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주먹과 손바닥이 부딪쳤는데도 주먹을 쓰는 그의 충격이 더 컸다.
팔성 이상 쓰지 않던 공력을 구성까지 끌어올렸는데도 소용이 없었다.
‘크읍!’
결국 버티지 못한 그가 발을 뒤로 빼며 물러섰다.
멋모르고 달려온 자들도 뒤늦게 공포를 느끼고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너는 누구냐?”
엽기천이 으르렁거리듯 물었다.
“알 것 없어. 당신은 알고 있는 사실만 말하면 돼. 저들을 다 죽이고 싶지 않으면.”
“흥! 네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우리를 다 죽일 수는 없을 거다.”
혁무천은 몰려든 무사들을 둘러보았다. 눈빛이 무저갱의 어둠처럼 가라앉았다.
“예전에도 이런 경우가 있었지. 그런데 어떻게 되었는지 아나?”
그가 검을 다시 사선으로 늘어뜨렸다.
“모두 죽었지. 그대들보다 훨씬 더 강했는데도. 숫자도 훨씬 많았는데.”
츠츠츠츠츠.
늘어뜨린 그의 검에서 소름끼치는 소음이 흘러나왔다.
검에서 뻗친 검기가 마당을 휩쓸며 지나가자 깊은 골이 파였다.
엽기천은 그 광경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한 자다.
불현듯, 정말로 해도문이 멸문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그때였다.
“멈춰라!”
안쪽에서 분노가 담긴 일성이 터져 나오고, 몇 사람이 날듯이 달려왔다.
비단무복을 입은 오십 대 초로인과 장한 넷.
피로 물든 마당에 도착한 그들은 분노가 서린 눈빛으로 혁무천을 노려보았다.
“네놈은 누구냐? 누군데 본문에 난입해서 무사들을 죽인 거냐?”
비단무복을 입은 오십 대 중년 무사가 분노를 씹으며 물었다.
장한 둘이 앞으로 나섰다.
“문주,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멈칫한 엽기천이 이마를 찌푸렸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주를 보좌하는 사대호위와 그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별 것도 아닌 것들이 문주를 믿고 꼴사납게 거들먹대곤 했다.
이 기회에 혼쭐 좀 나보라지.
죽는다면 그것도 그들의 운명일 뿐.
“죽어라, 이놈!”
칼을 빼든 두 중년인이 혁무천을 공격했다.
혁무천은 엽기천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사선으로 늘어뜨린 검이 원을 그리며 솟구치는가 싶더니 두 장한을 휘감았다.
쩌저정!
두 장한의 칼이 튕겨나갔다.
그 사이로 혁무천의 검이 유영했다. 검 끝에서 실처럼 뻗친 검기가 허공을 갈랐다.
“흐억!”
“크읍!”
뒤로 물러서는 두 장한의 얼굴이 공포로 일그러졌다.
주춤거리는 그들의 가슴과 목에서 피가 뿜어졌다.
혁무천은 두어 번의 손짓으로 장한 둘을 쓰러뜨리고는 비단무복의 초로인을 응시했다.
“이틀 전에 들렀던 자들이 잡아온 노인만 넘겨주면, 더 이상 피를 보지 않고 나가겠소.”
“흥! 본문의 무사들을 죽여 놓고 그냥 가겠다?”
“막고 싶으면 막으시오. 단, 다 죽은 다음 나를 원망하지는 마시오.”
“뭐라? 네놈이 감히 나를 농락하겠다는 거냐? 뭐 하느냐? 저놈을……!”
그때 엽기천이 다급히 전음을 보냈다.
<문주! 안 됩니다!>
하주경의 시선이 엽기천에게로 향했다.
<무슨 소리냐? 안 된다니?>
<상대는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자입니다.>
<뭐라고?>
<저자는 초절정 경지의 고수입니다. 저자를 잡으려면 본문의 무사 중 절반 이상은 목숨을 내놓아야만 합니다. 그럼 삼경맹만 좋아할 겁니다.>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하주경이 굳은 표정으로 혁무천을 바라보았다.
저 젊은 놈이 초절정 경지에 이른 고수라고?
믿기 힘들었다.
이십 대 청년무사 중 그런 경지에 오른 고수가 몇이나 되겠는가.
무림구룡이라고 불리는 천하의 기재들이라면 모를까.
사대호위 중 둘을 단숨에 쓰러뜨린 게 대단하긴 하나, 그들과 비교할 정도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런데 혁무천이 말했다.
“저 사람의 말을 듣는 게 나을 거요. 내일도 떠오르는 해를 보고 싶다면.”
하주경의 눈빛이 세차게 떨렸다.
설마 자신과 엽기천의 전음을 엿듣기라도……?
그 생각을 하자, 으스스 소름이 끼쳤다.
가슴 저 깊은 곳에서 스멀거리며 피어나는 축축한 공포.
엽기천의 말이 사실이란 말인가?
“무, 문주, 어떻게 할까요?”
옆에 있던 장한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물었다.
그 모습을 본 하주경은 고민을 접었다.
저렇게 기가 꺾인 놈들로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백 명이 있다 한들 시체의 숫자만 늘어날 뿐.
‘그래, 지금 저놈을 죽인다 해도 피해가 크면 삼경맹 놈들만 좋아할 거다.’
그렇게 명분을 세운 하주경이 침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노인은…… 그들이 죽였네.”
양 노인이 죽었다고?
혁무천에게서 흘러나오던 기운이 더 강해지자, 하주경이 다급하게 덧붙였다.
“우리도 막을 수 없었네. 한참 동안 뭘 물어보더니 갑자기 목뼈를 부러뜨려서…….”
혁무천은 그자들이 왜 양 노인을 죽였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은 양 노인에게 섬으로 가는 길을 자세히 알아냈을 것이다.
양 노인만 없으면 그 섬으로 가는 길과 방법을 아는 사람은 자신들뿐일 테니까.
그 정보에 비하면 다 늙은 어부의 목숨 따위야 하찮다고 생각했겠지.
“그자들의 정체는?”
“철혈마련에서 온 사람들이네.”
“철혈마련?”
혁무천이 이마를 찌푸리며 반문했다.
마른 침을 삼킨 하주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제 엽기천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눈이 마주쳤을 뿐이거늘 몸이 오그라드는 느낌이었다.
기세만으로 절정 경지에 오른 자신을 억누를 수 있는 자가 천하에 몇 명이나 될까.
수하들의 복수?
지금 중요한 것은 복수가 아니다.
잘못하면 해도문이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른다.
“한상귀 장로께서 수하들과 함께…….”
하주경은 순순히 말해주었다.
상대가 철혈마련의 장로라는 걸 알면 함부로 날뛰지 못하겠지? 하는 마음으로.
혁무천은 하주경이 말한 이름을 머릿속 지옥명부에 새겼다.
한상귀가 철혈마련의 장로라는 것쯤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거짓말 같지 않으니 그냥 가겠소. 막고 싶다면 마음대로 하시오.”
하주경의 눈빛이 흔들렸다.
수하 십여 명을 죽인 놈이다.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은 놈.
그러나 강호에서 살다 보면 그 정도 일쯤이야 언제든 일어날 수 있었다.
보름 전에는 삼경맹과 싸움이 벌어져서 삼십여 명이 죽거나 중상을 입었지 않은가.
‘그런데 저놈은 삼경맹보다 더 위험해.’
그래도 마지막 자존심은 지키려고 노력했다.
“가겠다면 막지 않겠네. 하지만 언젠가는 오늘의 빚을 받고 말겠네.”
“좋을 대로.”
혁무천은 한마디 툭 내뱉고 정문으로 향했다.
무사들이 좌우로 쫙 갈라졌다. 분노보다는 공포가 더 짙게 깔린 표정들이었다.
엽기천은 그 모습을 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뭔지 몰라도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겠어.’
그는 철혈마련 사람들이 어디를 다녀왔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문제는 그들이 다녀온 섬에서 누군가가 살아 돌아왔다는 것이다.
해도문을 혼자 쓸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강한 고수가.
‘어쩌면 이번 일이 나에게는 기회일지도…….’
***
해도문을 나선 지 이틀 후.
혁무천은 항주에 도착하자마자 구구로(九口路)를 찾아갔다.
언젠가 귀령자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세상에는 강호의 정보를 사고파는 정보상인들이 있다고 했다.
그 중에서도 낙양과 정주, 남경, 북경, 무창, 합비, 항주, 소주, 성도의 정보상인들이 유명하다고 했다.
그런데 항주의 정보상인들이 모여 있는 곳이 바로 구구로였다.
오죽하면 입이 아홉 개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구구로는 골목이 거미줄처럼 사방팔방으로 뻗어서 처음 방문한 사람에게는 미로나 다름없었다.
혁무천은 그 미로와 같은 골목을 걸으며 차분하게 둘러보았다.
어차피 아는 곳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었다.
구구로에 대한 지식이라고는 귀령자에게 들은 이야기가 전부였다.
자신이 원하는 정보상인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
그들이 풍기는 냄새를 찾아야만 한다.
미로 같은 골목길을 걷던 그는 한 점포 앞에서 멈추었다.
입구의 기둥에 ‘장가만물점(長家萬物店)’이라고 적힌 조잡한 깃발이 걸려 있는 곳이었다.
그는 ‘만물’이라는 글자를 주시했다.
입가에 가느다란 냉소가 피어났다.
장가만물점을 향해 몸을 돌린 그는 망설이지 않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의 안쪽은 겉보기보다 넓었다. 온갖 물건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혁무천이 들어가자, 얼굴이 길쭉한 중년인이 잽싸게 다가왔다.
“어이구, 어서옵쇼! 우리 장가만물상은 없는 것이 없습니다. 원하는 게 있으면 말만 하십쇼. 뭐든 말만하면 찾아드립죠.”
속삭이듯 건네는 은근한 말투가 마치 ‘은밀한 물건도 있습죠’라는 말처럼 들렸다.
혁무천은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꺼냈다.
돌려 말하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없는 것이 없고 뭐든 찾아줄 수 있다면, 강호의 정보도 팔겠군.”
만물점이라는 상호를 보고 들어온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물건을 팔고사려면 그 물건에 대해 알아야 한다. 만물에 대해 알고 있다면 강호에 대한 정보도 알고 있을 것 아닌가.
‘최소한 정보를 팔고 사는 정보상인 정도는 알겠지.’
멈칫한 중년인은 혁무천을 올려다보았다.
“우리 장가만물점은 형체가 있는 물건만 팝지요.”
“뭐든 말만하면 찾아준다고 하더니, 허언이었나 보구려.”
중년인의 입매가 묘하게 틀어졌다.
“물론 정보를 사고파는 곳을 찾아드릴 수는 있습죠. 하지만 아무에게나 알려주지도 않습죠. 세상이 하도 험해서 잘못하면 뒤통수를 맞을 수 있으니…….”
“그럼 어떻게 해야 알려줄 수 있소?”
“일단 무기를 우리에게 맡기셔야 합죠.”
혁무천은 옆구리에 걸려 있던 천망검을 떼어서 중년인에게 건넸다.
“또 뭐가 있소?”
엉겁결에 검을 건네받은 중년인은 의외라 생각한 듯 바로 대답을 못했다.
장난으로 말했을 뿐인데 선뜻 검을 건네다니.
그때 혁무천이 만물상 안쪽을 보며 말했다.
“저 사람들과도 관련 있소?”
중년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관련이 없지는 않습죠.”
그의 말이 떨어지자, 안쪽 어둑한 곳에서 두 사람이 나왔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겨서 혁무천의 좌우를 막아섰다.
“이 사람들을 따라서 안으로 들어가시구려. 허튼 짓하면 목숨이 달아날 수 있으니 조심하시고.”
혁무천은 중년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발을 떼었다.
“안내하시오. 아마 허튼 짓은 그대들이 하지 말아야 할 거요. 나는 참을성이 많지 않은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