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천화 3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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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44회 작성일소설 읽기 : 귀환천화 31화
31화
마을을 공격한 지 이 각쯤 지난 후.
부광춘은 질린 표정으로 혁무천을 바라보았다.
단단히 각오하고 쳐들어갔는데, 그와 그의 일행이 한 일은 도망치는 잔챙이들 처리와 외부 정리 정도가 전부였다.
‘씨바, 진짜 무섭네.’
왜구의 숫자는 오십여 명. 무천이란 자 혼자서 사십 명은 해치운 듯했다.
왜구들도 폭이 좁은 왜도를 잘 다루었다. 개중에는 만만치 않은 고수들도 제법 있었다.
그런데 무천이란 자가 검을 휘두르면 서너 명이 한꺼번에 쓰러졌고, 일장 일권을 내지르면 한두 놈씩은 반드시 꺼꾸러졌다.
싸움이 벌어진 시간은 겨우 반각 정도.
오히려 뒤처리하는데 시간이 훨씬 더 걸렸다.
왜구 중 남은 자는 이제 한 명뿐. 서른 살 정도 되는 자로 왜구의 수장이었다.
그자는 자신도 한번 붙어본 자였는데,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고수였다.
그래봐야 무천이란 자의 검을 두어 번 맞받아치고 금방이라도 피를 토할 듯 안색이 창백해졌지만.
만약 자신이 무천과 끝장을 보려고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냥 뒈졌겠지 뭐.’
“정말…… 굉장한…… 하지만 언젠가는…… 이 시마카제(島風)의 형이…… 너를 찾아…… 오늘의 빚을…… 갚을 거다.”
더듬거리며 감탄의 말을 내뱉은 왜구가 왜도를 거꾸로 들더니 자신의 배를 쑤셨다.
혁무천은 무심한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는 검을 회수하고 몸을 돌렸다.
“다 끝났으면 출발 준비해.”
잠깐 산보라도 나온 사람처럼 태연히 말하는 그가 부광춘의 눈에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잠깐만 기다리쇼. 놈들이 잡아온 여자와 아이들을 데려가야 하니까.”
왜구들이 노략질해 놓은 물건도 실어야 했다. 여기까지 온 대가는 챙겨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혁무천도 그에 대해서는 말리지 않았다. 대신 시간을 아끼기 위해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저 배를 몰 사람 있으면 저기에 실어.”
그가 포구에 정박해 있는 왜구의 배를 가리켰다.
보통 섬에 있는 자들을 공격하면 배에 불을 붙여서 적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오늘도 그렇게 할까 생각했지만, 인원수가 적어서 일단 왜구부터 공격했다. 그 덕분에 배가 멀쩡했다.
더구나 왜구의 배는 해적질을 하기 위해 튼튼히 만들어져서 제법 쓸모가 많았다. 물론 팔 경우 가격도 엄청 비싸고.
부광춘도 뒤늦게 그 생각을 떠올리고 표정이 환해졌다.
“아하! 그거 괜찮은 생각이군.
“빨리 끝내.”
배는 반 시진쯤 더 지난 후에 출발했다.
왜구의 배 한 척에는 왜구들의 노략물을, 한 척에는 여자와 아이를 싣고, 배를 몰 줄 아는 사람들 대여섯 명이 배 한 척씩 맡았다.
훗날 동해를 주름잡게 될 해마방의 기틀은 바로 그렇게 시작된 것이었다.
그날 밤, 혁무천은 답답한 마음에 선실을 나섰다.
선수로 발을 내딛던 그가 멈칫했다. 달빛이 환하게 비춘 선상에 누군가가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부광춘이었다. 그런데 뭐가 그리도 속상한지 한숨을 푹푹 쉬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부광춘이 고개를 돌리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왜구와의 싸움도 이겼는데, 왜 그렇게 한숨을 쉬지?”
“후우, 내가 말이오. 꼴에 제법 실력이 있다고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다녔수. 그런데 요즘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 확실하게 알았지 뭐요.”
물끄러미 부광춘을 바라본 혁무천이 불쑥 말했다.
“더 강해지고 싶나?”
“그걸 말이라고 하쇼? 칼을 잡은 무사치고 강해지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수?”
불퉁거리듯 툭툭 말은 던진 부광춘이 혁무천을 째려보았다.
혁무천은 고개를 들어 환한 달을 한번 쳐다보고는 나직이 말했다.
“어쨌든 그대 덕분에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게 됐어.”
힐끔 그를 올려다본 부광춘이 입술을 삐죽였다.
‘지미, 그래도 고마운 건 아네.’
“해가 뜰 때까지밖에 시간이 없을 것 같다. 얼마나 얻을지는 그대에게 달렸다.”
부광춘이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셋을 셀 시간 동안 혁무천의 말뜻을 되새김질 한 그가 벌떡 일어나더니 무릎을 꿇었다.
“가르쳐주쇼. 죽을힘을 다해 배울 테니까!”
***
왜구의 섬을 출발한 다음 날 정오, 저 멀리 뿌연 안개로 뒤덮인 육지가 보였다.
부광춘이 말했다.
“해궁이오. 저기 내리면 육지로 가도 영파까지 얼마 안 걸릴 거요.”
혁무천은 조급해지려는 마음을 억누르고 육지를 바라보았다.
은설은 어떻게 되었을까.
‘괜찮을 거야. 괜찮아야 돼.’
그런데 육지가 이십여 리쯤 남았을 때였다.
바다 위를 떠다니는 뭔가가 눈에 들어왔다.
제법 멀리 떨어진 거리. 푸른색과 흰색이 어우러진 물체가 통나무에 걸쳐진 채 파도를 따라 춤을 추고 있었다.
그는 통나무가 가까워지자 배에서 몸을 날렸다.
단숨에 십여 장을 날아간 그는 통나무 위에 내려섰다.
그의 표정이 하얗게 굳어졌다.
“설마…… 설이의 옷……?”
통나무에 걸쳐진 채 바다 속으로 들락날락하는 물체는 겉옷이었다. 문제는 그 겉옷의 색과 형태가 은설의 옷과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혁무천은 옷을 건져냈다.
옷자락을 살펴본 혁무천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손도 가늘게 떨렸다.
은설의 옷이 분명했다.
여인이나 입을 법한 작은 크기에 색과 형태도 같았다.
결정적으로 소매에 작은 매화자수가 있었다.
“어떻게 된 거냐, 은설.”
바다에 빠지기라도 한 걸까?
망연한 표정으로 바다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그럴 리가 없어어어!”
일성을 내지르는 혁무천의 머리가 솟구치고 옷자락이 찢어질 듯 펄럭였다.
통나무 주위의 바다가 하늘 높이 용솟음쳤다.
혁무천은 다시 몸을 날려서 배 위로 돌아왔다.
배 위에서 무슨 일인가 싶어 쳐다보던 사람들이 모두 하얗게 질려서 그를 바라보았다.
“부광춘, 최대한 배를 빨리 육지로 몰아라.”
부광춘이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토를 달 엄두도 나지 않았다.
“노를 힘껏 저어라! 심장이 터지도록 저어!”
반 시진 후.
배가 해궁포구에 도착하자 혁무천이 뛰어내렸다.
부광춘과 해마호 무사 십여 명도 뒤따라 내려왔다.
“양 노인에 대해서 알아보란 말이죠?”
부광춘이 확인하듯 물었다.
“맞아. 귀에 큰 점이 있는 노인이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아봐.”
“알았수. 들었지? 마을을 다 뒤져 봐.”
부광춘의 말에 해마호 무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혁무천도 선창 일대를 돌아다니며 양 노인의 행방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양 노인의 행방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마을을 샅샅이 뒤진 지 두 시진쯤 지났을 때, 선창으로 돌아온 부광춘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못 찾았수.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혁무천도 이미 알아본 터라 그들을 탓하지 않았다.
“이제 여기서 헤어지지. 여기까지 데려다 줘서 고마웠다.”
부광춘이 머리를 긁적이며 아쉬워했다.
“뭐, 고마운 걸로 하면 내가 더 고맙죠.”
“인연이 닿으면 또 볼 수 있겠지.”
혁무천은 그 말만 남기고 돌아섰다.
그의 뒤에 대고 부광춘이 소리쳤다.
“언제든 찾아오쇼! 대장 대접 해줄 테니까! 가르쳐 준 도법도 열심히 연마해서, 다음에 만날 때는 저번처럼 쉽게 당하지 않을 거요!”
어젯밤에 배운 도법은 그에게 새로운 꿈을 꾸게 해주었다.
비록 며칠의 만남이었지만, 그에게 혁무천은 스승이나 다름없었다.
‘당신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나는 당신을 나에게 두 번째 삶을 준 은인으로 생각할 거요.’
***
해궁에서 별다른 정보를 얻지 못한 혁무천은 곧장 영파로 갔다.
무역항인 영파의 선창은 해궁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번잡했다.
그런데 영파의 선창을 돌아다니며 조사한지 한 시진 만에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눈두덩이 시퍼렇게 물든 선원 하나가 말했다.
“무사 칠팔 명이 배를 타고 온 걸 봤네. 처음 보는 자들이었지. 그들은 배에서 내리자마자 해도문으로 갔네.”
영파는 두 문파가 장악하고 있었다.
해도문(海刀門)과 삼경맹(三鯨盟).
그 중 해도문은 선창을 장악하고 있는 자들이었다.
혁무천은 은자 한 냥을 건네주고 좀 더 자세하게 물어보았다.
“혹시 그들 중에 젊은 여인은 없었소? 아직 스무 살이 안 되었으니 더 어리게 보일 수도 있을 거요.”
선원은 고개를 저었다.
“젊은 여인? 없었는데?”
혁무천은 숨을 깊이 들이쉰 후 다시 물었다.
“그럼 노인은?”
“노인? 노인은 둘 있었지. 한 노인은 제법 지위가 높은 것처럼 보였고, 다른 노인은 평범한 어부였네.”
해도문은 선창에서 불과 이십여 장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골목 안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석양 무렵.
해도문에 도착한 혁무천은 마치 자신의 집에 들어가기라도 하듯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오죽하면 옆을 지나가던 해도문 무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막지 않았다.
혁무천이 마당에 들어선 후에야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무슨 일로 찾아왔는가?”
혁무천은 그자를 바라보았다. 삼십 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나이에 눈매가 날카롭게 뻗은 자였다.
혁무천은 숨을 들이쉰 후 차분하게 말했다. 원하는 답을 얻으려면 자신의 감정부터 눌러 놓는 게 나을 듯했다.
“알아볼 것이 있소만.”
“알아볼 것? 뭘 알아보겠다는 건가?”
“얼마 전에 먼 바다로 나갔다가 돌아온 무사들이 있었을 텐데, 아나 모르겠소.”
엽기천은 눈을 가늘게 뜨고 혁무천을 훑어보았다.
이십 대 중반의 나이. 얼굴이 기가 막히게 잘 생긴데다 몸매도 부러울 정도로 잘 빠진 놈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더 말투가 삐딱하게 나갔는지도 몰랐다.
같잖은 질시 때문에.
“영파에는 하루에도 상선이 수십 척이나 들어온다. 바다에 나갔다 돌아온 무사가 어디 한둘인 줄 아나?”
“내가 말한 자들은 배에서 내리자마자 이곳으로 갔다고 들었소.”
다시 쏘아붙이려던 엽기천이 멈칫했다. 문득 혁무천의 말에 어울리는 자들이 떠오른 것이다.
“왜 그들을 찾는 거냐?”
“그들에게 물어볼 것이 있소. 지금 어디에 있소?”
엽기천은 이마를 찌푸리고 불퉁하게 답했다.
“그들은 이틀 전에 영파를 떠났다.”
“해도문 사람이 아니다?”
“맞아. 그들은 본문의 무사들이 아니다.”
“그럼 그들과 함께 온 어부노인은 아직도 이곳에 있소?”
“훗! 내가 왜 그걸 너에게 알려줘야 한단 말이냐?”
혁무천의 인내심도 거기까지였다. 말로 안 된다면 힘을 쓰는 수밖에.
“말해주는 게 좋을 거요. 말하지 않으면 죽을지도 모르니까.”
“뭐? 죽어? 어디서 이런 미친놈이……!”
엽기천은 버럭 화를 내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온몸에 바늘이 꽂힌 느낌이 들었다.
‘설마…… 내가 알아보지 못할 정도의 고수?’
그때 두 사람이 그들 있는 곳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당주, 왜 그러고 계십니까?”
“이봐! 당신, 뭐하는 자야?”
혁무천은 그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엽기천에게 말했다.
“나는 반드시 그 노인을 만나볼 생각이야. 그러기 위해서 이곳에 있는 자들을 모두 죽여야 한다면…… 죽여야겠지.”
오한이라도 든 듯 엽기천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뭐 이런 놈이……!’
그는 입술이 바짝 말랐다.
그런데 다가온 자들이 혁무천의 말을 듣고 버럭 소리쳤다.
“뭐? 죽여?”
“저 새끼가 어디서……!”
엽기천이 말리려 했지만, 그들이 한발 먼저 칼을 빼들고 혁무천을 향해 몸을 날렸다.
냉소를 지은 혁무천이 검을 뽑아서 허공을 베었다.
츠츠츠츠.
으스스한 소리가 나면서 갈라지는 대기.
달려들던 두 무사가 검기의 동선에 걸렸다.
쩡! 서걱!
“크억!”
소름끼치는 소음과 단말마.
비산하듯 솟구치는 피분수.
잘린 팔과 갈라진 몸뚱이가 마당에 나뒹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