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천화 2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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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가까스로 무아의 경지에 들어간 혁무천이 운공을 마치고 눈을 떴을 때는 세 시진이 훌쩍 지난 후였다.
숨을 길게 내쉬며 운공을 마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바깥이 석양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이런, 은설이 기다리겠군.”
거처에 도착한 혁무천은 이마를 찌푸렸다.
‘어디 갔지?’
은설이 보이지 않았다.
이 시간이면 한참 무공을 익히고 있을 시간이었다.
식량도 며칠 먹을 것은 준비되어 있었다.
곧 밤이 될 터, 멀리 갈 이유가 없었다.
‘뒷간에 갔나?’
당장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이각 후.
해가 서쪽 바다로 떨어지고 있는 데도 은설은 돌아오지 않았다.
“설아야!”
혁무천은 더 버티지 못하고 숲을 향해 소리쳤다.
숲은 그의 외침을 고요히 삼켰다.
“설아야! 어디 있어!”
다시 소리쳐 불렀지만 어디에서도 그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오지 않았다.
“설아야! 어디 다친 거냐? 대답해!”
그는 은설을 부르면서 숲속으로 몸을 날렸다.
은설이 갈 만한 곳은 모두 찾아보았다. 동굴 속도 샅샅이 조사해보았다.
숲은 여전히 침묵했고, 동굴에서는 본인의 목소리만 메아리쳤다.
오전부터 그를 괴롭히던 불길한 느낌이 더욱 무겁게 그를 짓눌렀다.
거처 앞으로 돌아온 혁무천은 동굴 근처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곧 수상한 흔적을 발견했다.
찾고자 작정하고 살펴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희미한 흔적이었다.
그 흔적의 정체는 자신과 은설 외의 사람이 오간 발자국이었다.
최소한 대여섯 사람 이상 될 듯했다.
“설마……?
무언가를 예상한 듯 혁무천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홱, 몸을 돌린 그는 바닷가 쪽으로 질풍처럼 몸을 날렸다.
해안가에 도착한 혁무천은 눈을 치켜떴다. 어둑해진 해안가에 제법 많은 사람이 오간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최근에 찍힌 발자국이었다.
결코 자신이나 은설의 발자국은 아니었다. 최근 십여 일 사이, 두 사람은 자갈이 있는 해안가에 가지 않았으니까.
“설아야아아아아!”
혁무천은 어둠으로 물든 안개바다를 향해 외쳤다.
천둥이라도 친 듯 하늘이 뒤흔들렸다.
외지인이 섬에 들어왔고, 은설이 사라졌다.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가 어찌 모를까.
콰아아아아아!
그를 중심으로 맹렬한 회오리가 일었다.
대지가 원을 그리며 밀려나고, 나무가 으스러져서 하늘 높이 솟구쳤다.
“누구든! 설아의 머리카락 하나만 건드려도 용서치 않을 것이다!”
마신의 포효가 천지를 뒤흔들었다.
그날 밤.
혁무천은 바위산 꼭대기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서쪽을 바라보았다.
은설이 없어진 지 단 몇 시진에 불과한데도 세상이 모두 사라진 듯했다.
눈을 감으면 은설의 밝게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의 팔을 잡고 좋아하던 모습, 폴짝 폴짝 뛰며 어린아이처럼 숲을 돌아다니던 모습.
처음 만났을 때는 얼마나 피곤했는지 모닥불 앞에서 꾸벅꾸벅 졸았었다.
겁도 없이 남자 앞에서 졸다니.
자신의 기억에 남아 있는 설아는 모든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왜 좀 더 설아의 곁에 가까이 있지 않았을까. 그깟 무공이 뭐라고.
자신이 옆에 있었으면 납치당하지도 않았을 것 아닌가 말이다.
“미안하다, 설아야…….”
나직이 중얼거린 그는 고개를 쳐들었다.
만약 설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면, 다시 한 번 세상을 혈해로 만들고야 말리라.
만인이 피를 흘리더라도!
세상 모든 사람이 자신을 욕하더라도!
***
다음 날, 혁무천은 뗏목을 만들기 시작했다.
뗏목으로 수백 리 바닷길을 건넌다는 건 목숨을 건 모험이라 할 수 있었다.
물 위에 떠 있는 깃털을 징검다리처럼 이용할 수 있는 절대 고수라 해도 위험한 건 마찬가지였다.
거센 파도가 출렁이는 바다는 일반 강물이나 호수와 또 달랐다.
당연히 그도 뗏목을 타고 육지까지 갈 생각은 없었다. 그 일이 얼마나 무모하다는 것도 모르지 않았다.
일단 그는 섬을 벗어날 생각이었다. 섬을 벗어나서 육지 쪽으로 가다 보면 만나는 배가 있지 않겠는가.
운 좋게 육지까지 갈 동안 바다가 잔잔하면 더할 나위 없는 일이고.
이틀째 되던 날.
태양이 중천을 향해 솟구치는 사시 무렵, 혁무천은 뗏목을 바다 위에 띄웠다.
어쩌면 암초보다 더 위험한 것이 바로 섬 주위의 소용돌이였다.
은설을 납치해간 자들이 어떻게 소용돌이를 뚫고 들어왔는지 알 수는 없었다.
어쩌면 양 노인이 안내를 했는지도 몰랐다. 아니, 그럴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 어떻게?
황보수가 살려두었단 말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명색이 협의를 추구하는 정파의 무사 아닌가.
아니면 황보수 일행이 돌아와서 은설만 데려갔을 수도 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누군가가 은설을 데려갔다는 것이다.
호의든, 악의든.
‘알아보면 밝혀지겠지.’
길이 이 장. 아름드리나무 아홉 개로 만들어진 뗏목은 보기보다 튼튼했다.
질긴 넝쿨의 껍질을 꼬아서 만든 밧줄로 다섯 군데를 엮은 터라 밧줄 한두 가닥이 끊어져도 견딜 수 있었다.
혁무천은 그 뗏목 위에 서서 노를 저었다.
뗏목이 배보다 나은 점은 암초를 들이받아도 구멍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혁무천은 이미 암초군을 한번 통과해본 사람 아닌가.
하지만 바다는 그를 쉽게 보내주지 않았다.
직접 바다에 뛰어든 후에야 혁무천은 소용돌이의 무서움을 알고 표정이 굳어졌다.
암초군 사이에서 수백 개의 소용돌이가 휘돌고 있었다.
소용돌이에 휘말리면 뗏목이 제멋대로 뱅뱅 돌다가 암초에 부딪쳤다. 그러다 결국 다시 섬 쪽으로 밀려났다.
그가 공력을 일으켜서 중심을 잡지 않았다면 뗏목이 뒤집어지고 제멋대로 암초에 부딪쳤을 것이다.
몇 번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그는 다시 섬 쪽으로 빠져나와서 양 노인이 배를 몰던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양 노인은 좌우로 오가면서 암초와 소용돌이를 통과했었다.
소용돌이가 약하게 일어나는 곳을 찾아서 철저히 그곳으로만 배를 몬 듯했다.
그는 뗏목을 몰고 소용돌이 앞까지 간 다음 바다를 살펴보았다.
겉으로는 천천히 휘도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물 밑에서는 꾸르륵 소리를 내면서 무시무시한 소용돌이가 휘돌고 있었다.
“응? 저건……?”
한참 동안 바다를 살펴보던 그의 눈빛이 어느 순간 번뜩였다.
수십, 수백 개의 소용돌이 사이에서 거품이 일었다 스러지는 게 보였다. 소용돌이가 부딪치면서 하얀 거품 띠가 형성되었다.
‘혹시……?’
그는 하얀 띠가 생성 되는 곳으로 뗏목을 몰았다.
다른 곳보다 뗏목에 가해지는 충격이 덜했다.
그는 공력을 일으킨 상태로 철저히 띠를 따라서 이동했다.
때로는 소용돌이가 양쪽에서 끌어당기기도 했다. 그러나 서로 당기려는 힘 때문에 뗏목은 어느 쪽으로도 끌려가지 않았다.
좌로, 우로…….
하얀 거품 띠는 생성되는가 싶으면 스러지고, 다시 생성되었다.
바다가 만들어내는 길은 불규칙했다. 하지만 그조차도 혁무천에게는 하늘이 내린 한 가닥 동아줄이었다.
무아의 경지에서 하얀 띠를 따라 이동한 지 얼마나 되었을까, 갑자기 바다가 고요해지고 뿌연 안개만이 보였다.
마침내 소용돌이와 암초의 바다를 통과한 것이다.
***
배 위에는 모두 아홉 명이 있었다.
양 노인과 무사 일곱, 그리고 은설까지.
무사들은 오랜 뱃길에 지친 듯 여기저기 앉거나 누워 있었고, 은설은 멍한 표정으로 동쪽 바다만 바라보았다.
‘오빠는 내가 납치된 것을 알까? 아마 알 거야. 현명한 분이니까.’
이틀 전.
무사들은 섬에 오르자마자 곧장 동굴로 찾아왔다. 양 노인이 말해준 듯했다.
은설은 양 노인이 살아 있는 게 반가우면서도 의아했는데, 나중에서야 진실을 알 수 있었다.
황보수는 양 노인을 죽이려 했다. 무공비급을 지키기 위해서 도주해야만 하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분명 죽음을 확인했을 것이다.
그런데 공격을 받아 도주하다 보니 양 노인의 죽음을 확인하지 못했고, 그들을 공격했던 자들이 양 노인의 목숨을 구했다.
바로 앞에 있는 자들, 철혈마련의 무사들이.
그로부터 다섯 달 후, 양 노인을 돌본 그들이 양 노인을 설득해서 섬을 찾아온 것이다.
“젊은 놈이 있다고 했는데, 어디 있지?”
무사들은 은설을 윽박질렀다.
은설은 최대한 연약한 표정을 짓고 태연하게 말했다.
“그 사람은 뗏목을 타고 혼자 섬을 떠났어요. 너무 위험해서 둘이 타고갈 수가 없었거든요. 나중에 데리러 온다고 했는데…….”
나중에는 눈물을 훌쩍거리며 욕을 해댔다.
“흑흑흑, 왜 데리러 안 와, 이 나쁜 놈아!”
그러고는 무사들에게 매달렸다.
“저 좀 데려가주세요, 아저씨. 혼자 이곳에 있으면 얼마나 외로운지 아세요? 제발 데려가주세요!”
무사들을 이끌고 있는 노인은 황보수보다도 더 강하게 느껴졌다.
더 중요한 것은 무사들의 정체였다.
그들은 놀랍게도 철혈마련의 고수들이었다. 구대마세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대세력의 무사들.
혁무천이 아무리 강해도 이들을 모두 이길 수는 없을 듯했다. 그래서 그녀는 섬에 혼자 있는 것처럼 말했다.
철혈마련 무사들이 혁무천을 찾아내는 것보다는, 혁무천이 상황을 파악하고 몰래 암습하는 게 나을 테니까.
무사들은 눈물콧물 질질 짜며 중얼거리는 은설을 놔둔 채 동굴을 조사했다.
한 시진을 조사했지만, 그들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거의 다 지워진 흔적뿐이었다.
그렇게 조사가 끝나갈 때쯤 양 노인이 넌지시 말했다.
“나으리들, 날씨가 심상치 않습니다요. 밤이 오기 전에 암초군과 소용돌이를 빠져나가야 합니다요. 아무래도 내일부터 바람이 거세져서 며칠 동안 폭풍이 불 것 같습니다요.”
무사들도 이미 양 노인에게 그간의 사정을 다 들은 터였다.
무공은 정파의 비밀단체인 정은맹 놈들이 다 챙겨갔다고 했다. 벽에 남은 구결도 모두 지웠고.
그럼에도 이곳까지 온 것은 양 노인이 한 말의 진위를 확인하려는 것일 뿐.
아쉬움을 털어낸 그들은 은설을 끌고 바닷가로 갔다.
무사들이 예상보다 빨리 섬을 떠나려 하자 은설도 당황했다.
하루이틀 정도는 더 있을 줄 알았는데…….
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혁무천이 다치지 않도록 무사들을 따라서 조용히 떠나는 수밖에.
그 후 이틀이 지난 지금, 은설은 육지가 얼마 남지 않은 바다 위에 있었다.
‘이대로 잡혀갈 수는 없어.’
백마궁에서도 아버지를 잡아가두고 고문을 했다. 이들이라 해서 그렇게 하지 말란 법은 없었다.
더구나 자신은 여자이기 때문에 그 어떤 참담한 일을 당할지 몰랐다.
입술을 깨문 은설은 고개를 돌려서 육지 쪽을 바라보았다.
십 리쯤?
반 시진 후면 도착할 듯했다.
오른쪽을 슬쩍 훔쳐보았다. 작은 섬이 보였다. 무인도인 듯했다.
거리는 오 리 정도?
큰 섬도 있었는데, 그곳까지는 십 리도 넘을 듯했다.
그녀는 다시 바다 위를 바라보았다.
때마침 물 위를 떠다니는 커다란 통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양 노인이 통나무와의 충돌을 피하려고 배를 틀었다.
통나무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그때였다.
“자자! 그만 일어나라! 곧 육지에 도착할 거다!”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은설은 마음이 다급해졌다.
무사들이 모두 일어난다면 그 어떤 기회도 없을 것이다.
입술을 질끈 깨문 그녀는 느릿하게 움직여서 배의 가장자리로 이동했다.
두어 사람이 나른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지하는 자는 없었다.
슬쩍 주위를 둘러본 그녀는 짐짓 비틀거리는 척하다가, 실수라도 한 것처럼 바다 쪽으로 꼬꾸라졌다.
“어어어어!”
풍덩!
무사들이 놀라서 소리쳤다.
“엇? 저 계집이……!”
“끌어올려!”
그런데 바다에 빠진 은설의 모습이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간 거야?”
“그쪽에서도 안 보이나?”
“안 보입니다!”
“젠장! 혹시나 해서 데려왔더니, 다 와서 말썽이군.”
그 와중에도 배는 바람을 타고 계속 전진했다.
바다 위를 떠다니던 커다란 통나무가 배에서 점점 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