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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천화 28화

무료소설 귀환천하: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266회 작성일

소설 읽기 : 귀환천화 28화

28화

 

 

동굴 입구의 거처에는 그동안 사용했던 몇 가지 물품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종이도 몇 장 있었다. 그 종이에 글자 몇 자가 적혀 있었다.

 

[미안하게 됐네. 무공을 유출할 수 없어서 결정한 것이니 이해하기 바라네. 그곳에서 둘이 행복하게 살게나.]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행복하게 살라고?

정말 선의의 마음으로 자신들을 남겨 놓고 떠난 것이 아니다.

죽일 수 있었으면 죽이려 했겠지.

죽일 자신이 없으니까 그냥 놔둔 것뿐.

그런데 기분이 묘했다. 이상하리만치 화가 나지 않았다.

둘이 행복하게 살라고?

가슴 깊은 곳에서 묘한 감정이 피어났다.

섬을 빠져나가고자 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중요한 것은 당장 이 섬을 떠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어차피 자신은 세상에 나가봐야 할 일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지 않은가.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단 둘이 살며, 아이도 낳고…….

자신의 생각에 흠칫한 혁무천은 슬쩍 은설을 돌아다보았다.

어깨가 축 처진 은설이 동굴 밖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나야 그렇다지만, 은설은…….’

은설도 가족이 없긴 하나 자신과 단 둘이 사는 것이 싫을 수도 있다.

혁무천은 은설의 의향을 물어보기가 겁났다.

싫다고 하면 어쩌지?

그때 은설이 말했다.

“오빠, 황보 대협이 우리를 데리러 올까요?”

오지 않을 것이다. 올 사람들이라면 떼어놓고 갈 이유도 없다.

“양 할아버지는 데리러 오겠죠?”

오지 못할 것이다. 황보수가 살려두지 않을 테니까.

“황보 대협이 양 할아버지를 죽일까요? 죽이지는 않겠죠?”

은설도 현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부정하고 싶을 뿐.

“일단은 이곳에서 살아갈 방법부터 생각해보자. 언젠가는 누군가가 찾아올지도 모르니까.”

혁무천은 그렇게만 말하고 은설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이곳에서 둘이 사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은데…….’

 

***

 

동굴 속 벽에 있는 무공구결은 대부분의 내용이 지워져 있었다.

혁무천은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어서 놀라지도, 화가 나지도 않았다.

무공을 독차지하기 위해서 몰래 도망간 자들 아닌가. 구결을 그대로 놔두고 떠났을 리 없었다.

그런데 급히 지우느라 그랬는지 부분부분 남겨진 구결이 있었다.

그것만으로는 무공을 익힐 수 없을 거라 생각하고 놔둔 듯했다.

그러나 혁무천의 능력이라면 남겨진 것만으로도 제법 괜찮은 무공을 조합해낼 수 있었다. 절기라 부를 수 있는 무공도 재현해 내는 게 어렵지 않았다.

황보수 등이야 생각지도 못했겠지만.

그뿐이 아니었다.

구석진 곳에 간간히 적혀 있는 구결은 그들도 지우지 않았다.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미처 발견하지 못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혁무천은 그러한 글들을 둘러보고 냉소를 지었다.

‘지닌 능력만큼만 볼 수 있는 법이지.’

남은 글 중에는 선문답 같은 글도 있었다.

어떤 글은 혁무천조차 한참을 생각한 후에야 겨우 내용을 풀이할 수 있었다.

황보수 정도의 실력으로는 이해조차 못할 내용.

‘결국 황보수는 반쪽만 가져간 셈이군.’

 

혁무천은 무공에 대해서 신경을 끄고 은설과 행복하게 살 궁리만 했다.

먼저 그는 거처를 좀 더 편하게 가꾸기로 했다.

숲에서 나무를 자른 다음 침상도 만들고, 동굴의 출입구도 제법 문답게 만들었다.

은설도 하루가 지나자 마음이 진정된 듯 간간이 웃음을 보였다.

혁무천은 은설의 웃음을 보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자신과 단 둘이 있는 게 싫지는 않은 듯했다.

정말 다행이었다.

 

그날 이후의 생활은 그렇게 팍팍하지 않았다.

섬은 작았지만 알게 모르게 구경할 곳이 많았다. 나무의 종류도 다시 파악하고, 땅에서 자라는 식물도 분류했다.

식용이 가능한 것과 아닌 것을 가려내고, 땅속에서 자라는 덩이뿌리도 찾아냈다.

그런 사소한 일도 즐겁게 느껴졌다.

때는 겨울이었지만 혁무천의 가슴은 그 어느 때보다 포근한 봄날이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행복한 계절.

 

그렇게 겨울답지 않은 겨울이 보름쯤 지났을 때였다.

“오빠! 여기 좀 와보세요!”

은설이 놀란 목소리로 불렀다. 동굴 입구에서 백 장쯤 떨어진 섬 끄트머리였다.

혁무천은 황급히 몸을 날려서 그녀 곁에 내려섰다.

“무슨 일이야?”

“여기 좀 보세요.”

은설이 가리키는 곳에는 또 다른 동굴이 있었다.

넝쿨로 가려져 있어서 보이지 않던 곳을 은설이 용케도 찾아낸 것이다.

높이는 일 장쯤, 넓이는 그보다 조금 좁았다. 그래도 사람이 들락거리는 것은 어렵지 않아 보였다.

“사람이 살았던 것 같지는 않아요. 그쵸?”

은설의 말대로, 입구 쪽만 봐서는 사람이 살았던 것 같지는 않았다.

두껍게 낀 이끼며 입구를 뒤덮은 넝쿨들.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안쪽을 바라보던 혁무천은 너무나 확실한 흔적을 찾아내고 고개를 저었다.

저 안쪽 깊은 곳, 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이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살아 있는 자가 아니었다. 이미 오래 전에 생기가 빠져나간 자였다.

“이곳에 있어라. 내가 들어가 보마.”

 

안쪽은 생각보다 넓었다.

폭이 이 장이나 되고 높이도 일 장이 넘어서 마치 광장처럼 느껴졌다.

바로 그 광장 끝자락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는 자는 수염이 가슴까지 늘어진 노인이었다.

기이하게도 얼굴과 몸이 그대로 말라서 목내이처럼 변해 있었다.

그자의 앞에는 도복을 입은 사람이 쓰러져 있었는데, 몸은 뼈만 남아 있었다.

두 사람의 모습을 살펴본 혁무천은 대충이나마 상황을 유추할 수 있었다.

해골만 남은 자의 가슴 옷자락이 한 자 넓이로 부스러져 있고, 뼈 몇 개가 잘게 부서진 상태였다.

쓰러진 해골 주변의 돌로 된 바닥이 원의 형태로 파여 있는 걸 보면 엄청난 기운이 회오리친 듯했다.

‘앉아 있는 자를 공격하다가 역으로 당한 것 같군.’

결코 정상적인 대결은 아니었을 것이다.

동굴 안에서 대결을 펼친다는 것부터 정상이 아니니까.

그렇다면 왜?

무엇 때문에 공격한 걸까?

원한 때문에?

아니면 뭔가를 노리고?

혁무천은 앉아 있는 자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일 장 정도 거리를 두고 멈춰선 그는 주위의 벽을 둘러보았다.

이곳 동굴의 벽에도 글과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역시나 무공구결이었다.

아마 이곳의 주인도 섬에 들어왔던 정파명숙 중 한 사람이었나 보다.

그런데 그의 시선이 어느 한 글귀에 박혀서 움직일 줄 몰랐다.

 

[대천룡구검세(大天龍九劍勢)]

 

천룡. 북벽 앞의 거암에 적혀 있던 것과 글씨체가 같았다.

‘그곳에 검흔을 남긴 자인가?’

글귀 옆에는 각각 사십여 자에서 오십여 자로 이루어진 아홉 개의 구결이 적혀 있었다.

혁무천은 구결을 빠르게 읽어보았다.

심오한 구결은 하나하나가 극상승의 무리를 담고 있었다.

천하에 적수가 없었던 그조차도 새삼 대천룡구검세를 만든 자의 능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문에 암암리 전해오던 천풍마혼과 천룡구검을 융합하여 십칠 년 만에 대천룡구검세를 만들어냈도다.

……어리석은 자들. 마도를 멸할 무공이거늘, 마도에서 발원한 무공이라며 받아들이지 않으니 참으로 안타깝구나.

……인연이 닿은 자여, 대천룡의 혼으로 마도를 멸해다오.

- 천룡문 이십이 대 제자, 단목상이 남긴다.]

 

혁무천은 쓴웃음을 지었다.

“오빠! 뭐 있어요?”

“그래. 북벽에서 봤던 흔적의 주인이 여기에 있구나.”

“정말요? 저도 들어가 봐도 돼요?”

“들어와.”

쪼르르, 달려온 은설은 눈빛을 반짝이며 앉아 있는 시신을 바라보았다.

“이분이신가요?”

“그래. 아마도 다른 사람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혼자 이곳에서 지낸 것처럼 보인다.”

동굴벽에 남아 있던 문구에도 갈등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었다. 아마도 이 단목상 때문에 벌어진 일인 듯했다.

“벽에 적혀있는 건 이분이 남기신 무공인가 보죠?”

“그런 것 같다. 하지만 욕심내서는 안 된다. 네가 익히고 싶다 해서 익힐 수 있는 무공이 아니거든.”

은설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정말 제가 익히면 안 되는 거예요?”

“양강의 무공이어서 잘못하면 혈맥만 상한다. 여자는 대성할 수도 없고. 정 무공을 익히고 싶다면 내가 다른 걸 알려주마.”

절반은 사실이고, 절반은 사실과 조금 달랐다. 양강의 무공인 것도 이유지만, 그보다는 마공의 운용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다른 무공이요?”

은설이 고개를 번쩍 들고 혁무천을 바라보았다.

“동굴벽에 있는 무공만 추려도 네가 익힐 무공은 얼마든지 있어.”

“그곳에 있는 구결은 황보 대협이 지웠잖아요.”

“그는 이 오빠의 능력을 너무 무시한 것 같다. 남아 있는 구결만으로도 최소한 다섯 가지 무공은 복원할 수 있을 거다. 똑같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특히 팔십여 자로 된 문구 하나는 거의 완벽한 형태로 남아 있었다.

무진일선공(無盡一禪功)이라 했다. 도가의 무공인 듯했다.

한쪽 구석에 적혀 있기도 했고, 무공이라기보다 노자의 무위자연을 논하는 내용 같아서 황보수가 미처 신경을 쓰지 않은 듯했다.

혁무천도 읽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아서 외우기만 했을 뿐이었다.

“정말이죠?”

아쉬움을 털어낸 은설은 신이 나서 혁무천의 팔을 끌어안고 폴짝폴짝 뛰었다.

생각보다 은설의 가슴이 커서 팔이 꽉 끼었다.

혁무천은 팔을 빼지도 못하고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

더듬거리며 대답한 그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것 같은 기분에 시선을 벽 쪽으로 돌렸다.

유려한 글씨체로 쓰인 구결이 보였다.

대천룡구검세는 자신이 과거에 익힌 어떤 무공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절대의 무공이었다.

지옥화 정도만이 우위를 점할 수 있을 뿐.

그마저도 극히 미미한 차이일 듯했다.

지옥화와 빙정의 기운이 완벽하게 융화된 상태에서 대천룡구검세가 펼쳐지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벽의 구결을 바라보는 혁무천의 눈빛이 무저갱처럼 깊어졌다.

 

***

 

아침식사를 마치면 혁무천이 섬을 한 바퀴 돌며 다음 날 필요한 식량을 준비했다.

북벽 쪽의 바닷새는 훌륭한 먹거리였다.

새 자체는 물론이고, 새의 알도 중요한 식량이 되었다.

숲은 은설의 몫이었다.

그녀는 얼기설기 엮은 바구니를 들고 숲을 돌아다녔다.

돌아올 때쯤에는 채집한 버섯과 나물이 가득했다.

 

식량을 구하는 날 외에는 무공을 익히며 시간을 보냈다.

혁무천은 은설의 무공도 지도해주고, 자신 역시 대천룡구검세는 물론 천지벽에서 얻은 무공을 익혔다.

어지간한 고수들은 단순한 무공으로도 상대할 수 있었다.

문제는 강적을 만났을 경우였다. 그때는 자신의 무공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대천룡구검세와 천지벽의 무공이라면 자신의 무공을 쓰지 않고도 강적을 상대할 수 있을 듯했다.

 

두 사람은 단조로운 생활을 하면서도 싫증을 내지 않았다.

은설은 무공을 익히는 게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가끔 혁무천과 함께 섬을 돌아볼 때는 얼굴에서 함박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혁무천 역시 은설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지난날 혈해 속에서 살았던 삶을 보상 받는 기분이었다.

섬에 들어온 지 어느덧 다섯 달이 지나 완연한 봄이 되었다.

은설도 열아홉 살이 되어서 풋풋한 소녀가 여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키도 전보다 조금 더 커졌고, 몸매의 굴곡도 달라졌다. 혁무천의 눈에는 여전히 어린 소녀로 보였지만.

혁무천은 그동안 대천룡구검세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이제는 깊이를 더 다듬어서 자신의 무공과 융합하는 과제만 남아 있었다.

아마 평생을 해야 할 일일 듯했다.

 

봄꽃이 만발한 그날도 혁무천은 동굴로 가서 대천룡구검세의 구결을 풀이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그날따라 유난히 정신집중이 되지 않았다.

심장박동도 평소보다 빠른 듯 느껴졌다.

그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을 털어내기 위해서 운기행공에 전념했다.

바로 그 시각, 배 한 척이 무인도의 자갈이 깔린 해변에 닻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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