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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천화 27화

무료소설 귀환천하: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362회 작성일

소설 읽기 : 귀환천화 27화

27화

 

 

“무공은 절벽에 가득 적혀 있었다고 했어요. 그래서 아버지는 들고 나올 수가 없었어요.”

“아…….”

황보수는 그제야 왜 은석추가 빈손이었는지 이해되었다.

은설이 준비한 물품 중에 종이가 포함되어 있는 이유도.

영성진인이 천지벽에 구결을 남겼다더니, 다른 사람도 그리 한 듯했다.

“적어서 갖고 나올 수는 있었을 텐데?”

“무엇으로 적어요? 어디에 적어요? 표류하다 겨우 살아나신 분이.”

“…….”

“설령 붓 대용으로 적을 도구를 만들고 종이를 대신할 뭔가를 만들었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어설프게 적어서 갖고 나왔다가 누군가의 의심이라도 사면 그 뒷감당은 어떻게 해요?”

황보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버지는 당신 것이 아닌 것은 욕심내지 않았어요. 그것이 아무리 오래 전에 사라진 정파의 절학이라 해도요. 그래서 한 글자도 적지 않고 정은맹에 모든 것을 넘기려고 하신 거예요.”

동굴의 떨림 현상 때문인지 몰라도 은설의 목소리는 듣는 이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으음, 이 황보수가 은석추 형의 진심을 너무 가볍게 생각한 것 같군. 미안하네, 은 소저.”

황보수가 처음으로 사과의 말을 건넸다.

그 말에 은설의 서운함도 눈 녹듯 풀어졌다.

“한 분이 내려가서 확인해보세요. 아버지 말씀으로는 깊이가 십오 장쯤 될 거라고 하셨으니 준비한 밧줄이면 충분할 거예요.”

 

종환이 횃불은 입으로 물고, 손으로는 밧줄을 잡고 밑으로 내려갔다.

몸의 크기가 점점 작아졌다. 불빛도 지하로 계속 가라앉았다.

위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종환의 머리가 주먹 만해졌을 때, 바닥에 도착한 종환이 입에 문 횃불을 빼들고 고개를 들었다.

벽을 바라보는 눈이 점점 커졌다.

거대한 넓이의 동굴 벽에 수많은 그림과 글씨가 빽빽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 있습니다, 기주님!”

흥분한 그의 목소리가 동굴을 뒤흔들었다.

 

***

 

동굴 벽 정면에는 주로 구문팔가의 무공이 적혀 있었다.

좌우측 벽에는 당시 함께 갔던 정파 고수들의 무공이 적혀 있었고.

황보수는 그 중에서 황보세가의 최고고수였던 황보원의 무공을 발견하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오오오! 패왕신권도 있구나!’

 

동굴 벽에 적힌 무공구결을 옮겨 적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이끼가 끼어서 잘 보이지 않는 글자도 있었고, 각 문파의 무공이 뒤섞여 있기도 했다.

자칫 한 글자라도 엉뚱한 글자가 섞이면 내용이 달라질 수 있었다.

더구나 상승 무공구결은 작은 차이가 엄청나게 잘못된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신중을 기해야만 했다.

황보수와 종환은 한 글자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 확인하고, 또 확인하며 글자를 옮겨 적었다.

하루 종일 옮겨 적은 글자는 절벽에 적힌 글자 중 일 할도 되지 않았다.

 

한편, 황보수는 혁무천과 은설에게 무공구결을 넘겨주고 싶지 않았다.

은설에게는 무공을 얻을 수 있는 자격이 있었지만, 동굴 안의 구결은 모두 정파의 비전절기였다.

황보수라 해도 마음대로 넘겨줄 수 없었다.

혁무천은 그깟 정파의 무공이야 눈에 차지도 않았다. 은설이 원한다면 자신이 더 강한 무공을 가르쳐줄 수도 있었다.

은설이 마도의 무공을 배우고 싶어 하지 않을 것 같아서 먼저 말을 하지 않는 것일 뿐.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양보만 할 마음도 없었다.

“나와 은설이 동굴 안을 구경하는 것까지는 막지 마시오. 최소한 그 정도 자격은 있으니까.”

황보수는 반대하고 싶었지만, 무력으로 혁무천을 어찌할 수 없는 이상 방법이 없었다.

“알겠네. 대신 천지벽은 우리가 필사를 마칠 때까지 들어가서는 안 되네. 잘못해서 글자가 지워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천지벽의 무공 구결은 내용이 심오할 뿐만 아니라, 읽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혁무천이 들어가서 수작을 부리기라도 하면 큰 손실이었다.

황보수의 마음을 눈치 챈 혁무천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내가 고의로 글자를 지우기라도 할 것 같소?”

“그런 게 아니라…… 조심한다 해도 사람이 하는 일이다 보니 실수를 할 수 있지 않은가.”

혁무천은 황보수의 속이 뻔히 보였지만 순순히 받아들였다.

“좋소. 그럼 필사를 마칠 때까지는 천지벽에 들어가지 않겠소. 설아야, 네 생각은 어떠냐?”

“저도 괜찮아요.”

 

모든 글자를 베끼려면 시간이 걸리는 만큼 거처를 만드는 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일행은 동굴 입구를 거처로 삼았다.

나무를 베어와 엮어서 입구를 절반쯤 막고, 바닥에는 풀 더미를 깔았다.

그럭저럭 아늑한 거처가 만들어졌다.

이제 남은 문제는 식량이었다.

가져온 식량은 바닥나기 직전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고기잡이에 평생을 바친 양 노인이 함께 있다는 것이었다.

양 노인은 고친 배를 타고 정은맹 무사 셋과 함께 고기를 잡았다.

양 노인이 해안가에서 잡은 벌레를 바다에 뿌리면 고기가 몰려들었다.

정은맹 무사들은 검을 작살처럼 사용해서 고기를 찔렀다.

모두가 처음 경험해보는 고기잡이에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나중에는 서로 큰 고기를 잡기 위해서 눈을 번뜩였다.

 

양 노인과 무사들이 물고기를 잡을 동안 은설은 혁무천과 함께 원시림 안을 살펴보았다.

원시림 안에는 식용으로 쓸 수 있는 버섯과 열매가 제법 많았다.

어린 시절 어머니를 따라 산속에서 약초와 버섯을 채취했던 은설은 식용할 수 있는 버섯과 열매를 어렵지 않게 구분해냈다.

덕분에 사람들은 비린내 나는 물고기만 먹지 않아도 되었다.

 

***

 

무인도에 온 지도 어느덧 십오 일이 지났다.

황보수 일행이 동굴 벽의 무공을 옮겨 적는 일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 일이 끝나면 무인도에 머물 이유가 없으니 바로 떠날 예정이었다.

그런데 십육 일째 되던 날이었다.

정오 무렵, 혁무천과 황보수 사이에 설전이 벌어졌다.

“무슨 말이오? 섬에 대한 조사를 더 해보라니?”

“말 그대로네. 동굴 안에 무공을 남긴 선조께선 본래 떠났던 분들의 절반 밖에 안 되네. 다른 분들은 다른 곳에 남겼을 가능성이 크니 세밀한 조사가 필요할 것 같네.”

“하고 싶으면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알아서 하시오. 우리에게 하라 마라 하지 마시고.”

“어쨌든 그대와 은 소저도 동료 아닌가? 함께 하자는 게 뭐 나쁜 일인가?”

혁무천은 황보수의 반문에 피식, 실소를 지었다.

“동료라……. 필사한 구결도 보여주지 않는 분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소만.”

“대신 자네도 동굴 안에 들어가서 구경했지 않은가?”

“쓸 만한 구결은 모두 지워서 보이지도 않았소.”

“앞으로 발견하는 것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네.”

“좌우간 나와 은설은 시간이 남아돌아서 그동안 돌아다닐 만큼 돌아다녔소. 그런데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소. 더 조사한다고 해서 새로운 걸 발견할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으니 조사는 당신들이나 하시오.”

“그때는 그냥 구경삼아 돌아다닌 것 아닌가?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살펴보세.”

황보수는 이상할 정도로 집요하게 요구했다.

혁무천은 냉정하게 거절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정파의 무공에 아무런 욕심도 없는 그였다.

그런데 은설이 넌지시 말했다.

“오빠, 조금만 더 조사해 봐요. 정말 다른 분들의 무공이 다른 곳에 숨겨져 있을지 모르잖아요.”

“…….”

“그리고 숨겨진 무공구결을 찾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꼭 ‘보물찾기 놀이’하는 거 같잖아요.”

은설이 말을 마치고 배시시 웃었다.

혁무천은 차마 그 얼굴에 ‘하고 싶으면 너나 해.’라고 매몰차게 대할 수 없었다.

“좋다, 그럼 오늘 하루만 더 조사해보자.”

은설의 웃음이 더욱 밝아졌다.

그녀는 혁무천과 함께 다니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오늘은 바위산 북쪽에 가 봐요. 그쪽은 한 번밖에 안 가봤잖아요.”

 

점심식사를 마친 혁무천과 은설은 바위산 쪽을 둘러보았다.

바위산 자체는 별 것 없었지만, 바닷새가 군집을 이루고 있는 북쪽 절벽은 구경할 만했다.

바닷새는 북쪽 절벽 곳곳에 집을 만들어 놓았는데, 숫자가 수천 마리는 족히 될 듯했다.

혁무천과 은설이 의외의 흔적을 발견한 것은 그 북쪽 절벽에서 동쪽으로 돌아갔을 때였다.

처음으로 가본 그곳에는 수십 개의 칼날 같은 검봉이 망부석처럼 우뚝우뚝 서 있었다.

그런데 그 중 높이가 오 장이나 되는 거대한 바위를 바라보던 혁무천이 바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게 뭐죠?”

고개를 든 은설도 바위를 보고 눈이 커졌다.

바위는 바닷새가 싸지른 새똥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런데 그 새똥으로 뒤덮인 바위 전면에 수십 줄기 사선이 깊게 파여 있었다.

“누가 이곳에서 자신의 무공을 뽐낸 것 같다.”

혁무천이 감탄한 표정으로 말했다.

살아 있는 거룡이 용틀임하며 하늘로 솟구치는 듯했다.

바위 한쪽에는 살아서 꿈틀거리듯 힘이 느껴지는 글자가 일필휘지로 새겨져 있었다.

 

[천룡승천(天龍昇天) 마도멸세(魔道滅世)]

 

가히 절대의 경지에 오른 자가 검으로 남긴 흔적.

자신이 이 흔적을 남긴 자를 이길 수 있을까?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지옥화를 쓸 수 있다면 구성 공력만 펼쳐도 충분해.’

순수한 공력만으로 싸운다면?

글쎄다. 막아낼 수 있을까?

솔직히 순수한 검의 초식만으로 다툰다면 승부를 장담하기 힘들 듯하다.

정말 오랜만에 호승심이 일었다.

일개 검흔을 보고 호승심이 일어난 자신이 우스웠지만, 그만큼 눈앞의 검흔은 엄청났다.

‘누가 남겼는지 궁금하군.’

“오빠, 다른 곳도 찾아봐요. 정말 우리가 미처 못 찾은 게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은설은 뜻밖의 발견이 즐거운 듯 들뜬 목소리로 말하며 다른 곳으로 향했다.

혁무천은 순순히 그녀의 말에 따랐다.

그때 바위산을 돌아가던 은설이 놀란 소리를 내질렀다.

“어? 오빠! 저기 봐요!”

혁무천은 고개를 돌려서 은설을 바라보았다.

은설이 서쪽바다를 가리키고 있었다.

은설의 손가락을 따라가서 바다를 바라보던 혁무천의 눈이 한껏 커졌다.

배 한 척이 섬에서 멀어지며 안개의 벽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자신들이 타고 왔던 배였다.

그런데 그 배 위에 몇 사람이 서 있었다. 자신과 은설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혁무천은 그제야 황보수의 속셈을 눈치 채고 입술을 깨물었다.

“우리를 떼어놓고 가기 위해 그딴 소리를 했던 거였어.”

그랬다. 그들은 자신들만 떠나려고 혁무천과 은설에게 바위산 쪽에 대한 조사를 강요했던 것이다.

은석추만이 천운이 닿아서 이곳을 빠져나갔을 뿐, 과거 선조들조차 오랜 세월 섬을 벗어나지 못한 곳 아닌가.

양 노인만 처리하면 한동안 혁무천과 은설이 이 섬에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지 못할 거라 생각한 듯했다.

“이봐요오오오오오! 황보 대혀어어어업!”

은설이 두 손을 모으고 소리쳤다.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언뜻 배에 타고 있던 황보수가 고개를 돌린 듯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배는 멈추지 않고 안개벽 속으로 스며들 듯 사라져 갔다.

“오빠, 이제 어떡하죠?”

은설이 불안감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혁무천은 쓴웃음을 지었다.

“내려가서 어떻게 할 건지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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