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천화 2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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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추적은 제법 끈질겼다.
끊어질 만하면 이어지고, 이제 따돌렸다 싶으면 바짝 따라붙었다.
밤하늘을 소스라치게 울리는 휘파람소리가 사람들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렇게 꼬박 밤을 내달린 황보수와 혁무천 일행이 구주를 얼마 남겨 놓지 않았을 때였다.
십여 명이 좁은 계곡 길에 늘어서서 그들이 갈 길을 가로막았다.
몇 명은 마호방 무사들이었다. 그러나 사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세 사람은 복장부터가 달랐다.
풍기는 기운은 더더욱 달랐고.
황보수는 바로 그 세 사람을 보고 표정이 굳어졌다.
“혹시…… 구주삼살?”
세 중년인 중 가운데 서 있던 키 작은 자가 조소를 지었다.
“후후후, 우리가 누군지 알아봤다면 더 이상 도주할 수 없다는 것도 알겠군.”
황보수는 상대가 순순히 정체를 인정하자 주먹을 움켜쥐었다.
비록 맞상대 해본 적은 없지만, 강남에서 살성으로 이름 높은 자들이 바로 구주삼살이다.
소문만큼 실력이 있다면 자신과 실력 차가 크지 않은 절정고수들.
“무천, 자네가 저 삼살 중 하나만 맡아주게.”
황보수가 짧게 말하고 움켜쥔 주먹에 공력을 집중시켰다.
혁무천은 눈매를 가늘게 좁히고 고개를 끄덕였다.
“은설, 너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 뒤에서 멀어지지 마라.”
“예, 오빠.”
은설에게 혁무천의 말은 부처님 말씀보다 진리였다.
그런데 키가 작은 자, 구주삼살 중 첫째인 만대가 살기 번뜩이는 눈으로 혁무천을 노려보았다.
“괜찮은 낯짝이군. 네놈의 얼굴 가죽을 벗겨서 인피면구를 만들면 비싸게 팔 수 있겠어.”
혁무천의 입가에 하얀 웃음이 번졌다.
“당신 얼굴 가죽은 구멍이 숭숭 뚫려서 동전 한 푼도 받기 힘들 것 같군.”
만대는 곰보였다. 자국이 제법 깊이 파여서 평소에도 누군가가 얼굴 이야기를 하면 무척 싫어했다.
단지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언젠가는 자신을 놀린 자의 사지를 찢어서 죽인 적도 있었다.
“건방진 놈! 어디 머리가 잘리고도 주둥이를 놀릴 수 있는지 보자!”
노성을 내지른 그가 튕기듯 몸을 날렸다.
혁무천의 입가에 맺힌 하얀 조소가 더욱 짙어졌다.
격장지계.
과한 공력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상대의 역린을 건드렸는데 만대가 제대로 걸려든 듯했다.
휘아아앙!
뭉툭한 만대의 칼이 푸른 살기를 동반한 채 대기를 갈랐다.
혁무천은 물러서지 않았다. 물러서기는커녕 오히려 상대의 도세 속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죽어!”
만대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칼을 그었다.
혁무천은 우수를 들어서 칼의 궤적을 따라 내쳤다.
땅!
만대의 칼이 위로 튕겨나갔다.
혁무천은 얼굴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진 만대를 보며 좌수를 뻗었다.
만대도 좌수를 뻗어서 맞섰다.
쾅! 와직!
굉음과 부서지는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크억!”
짧은 비명을 터트린 만대가 와락 일그러진 얼굴로 황급히 물러섰다.
덜렁거리는 그의 좌수가 괴이한 각도로 꺾어져 있었다.
혁무천은 물러서는 만대를 그림자처럼 따라붙으며 검을 뽑았다. 그의 무심한 표정은 만대의 정신마저 무너뜨렸다.
그는 만대의 경악으로 치켜떠진 눈을 직시한 채 검을 사선으로 올려쳤다.
간결하면서도 목적이 분명한 연환공격이었다.
안색이 해쓱하게 질린 만대는 전력을 다해서 칼을 휘두르며 몸을 뒤로 뺐다.
그러나 혁무천의 움직임은 그가 예상한 것보다 배 이상 빨랐다. 검은 보이지도 않았다.
만대가 헉! 하며 헛바람을 들이켰을 때, 혁무천의 검은 이미 그의 심장을 가르며 지나간 후였다.
“크억!”
누구도 상상치 못했던 상황.
구주삼살 중 이살과 삼살을 공격하던 황보수가 비명에 흠칫하며 잠시잠깐 눈을 돌렸을 때는 만대가 피를 뿌리며 쓰러지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황보수는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지만 한눈을 팔 겨를이 없었다. 이살과 삼살이 그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었다.
이를 악문 그는 전력을 쏟아냈다. 평소 드러내지 않던 파황권마저 아낌없이 퍼부었다.
파파팡!
공명음이 귀청을 울리며 이살과 삼살의 접근을 막았다.
종환과 정은맹 무사들 역시 전력을 다해서 마호방 무사들을 공격했다.
그때 만대를 몇 수만에 처리한 혁무천이 황보수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적과의 생사투에서 예를 논하는 건 풋내기들이나 하는 짓.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최대한 빨리 적을 처리하는 게 최선이다.
혁무천은 힐끗거리는 삼살을 향해 검을 들이밀었다.
“죽어라, 개자식!”
노성을 내지른 삼살이 몸을 날리며 혁무천을 향해 칼을 내리쳤다.
혁무천은 무심한 표정으로 검을 흔들어서 삼살의 칼을 한쪽으로 흘려내고 검을 쥔 손목을 비틀었다.
검첨이 성난 뱀처럼 머리를 틀며 삼살을 노렸다.
기겁한 삼살이 몸을 젖히며 칼을 휘둘렀다. 젖 먹던 힘까지 쏟아낸 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일그러졌다.
찰나의 순간, 실낱같은 빈틈을 파고든 검기가 삼살의 어깨와 가슴을 차례대로 꿰뚫었다.
벼락이라도 맞은 듯 삼살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그의 두 눈에 떠올랐다.
비틀비틀 뒷걸음질 치는 그의 가슴에서 피가 솟구쳤다.
대살과 삼살이 피를 뿌리며 무너지자, 이살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견디지 못하고 꽁무니를 뺐다.
살아남은 마호방 무사들도 믿었던 삼살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걸 보고 정신없이 도주했다.
주위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혁무천은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검을 회수했다.
무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 그는 은설을 바라보았다.
“가자, 은설.”
황보수는 할 말이 많았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더욱 묵직해진 가슴만 답답할 뿐.
운만으로 만대를 몇 초식 만에 죽일 수는 없다.
삼살을 쓰러뜨린 검은 또 어떠한가.
결국 자신이 예상한 것보다 더 강하다는 말인데…….
처음에 건드리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이란 말인가.
적으로 대했다면 과연 자신이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을까 싶었다.
‘최악의 상황을 생각해서 미리 대응할 방법을 생각해 놓는 게 좋겠어.’
그의 옆에 서 있던 종환은 아예 안색이 회칠이라도 한 것처럼 창백했다. 당연히 부상을 당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제길, 누가 저렇게 무서운 놈인 줄 알았나.’
***
황보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백마궁의 추적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추적해오는 자들이 예상 못할 길로 가는 것과 추적자들의 추적속도보다 더 빨리 가는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 방법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다.
백마궁이 마호방을 움직인 이상 지리적 여건은 자신들보다 그들이 더 유리했다.
결국 속도를 높이는 수밖에.
그렇게 잠자리조차 잠깐식의 노숙으로 때운 그들은 영파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 바람에 뒤를 쫓는 백마궁 일행과의 거리가 쉽게 줄어들지 않았다. 휴식을 포기하고 힘들게 강행군한 대가는 취한 셈이었다.
사흘 후.
황보수는 전당강 건너편에서 갈등이 서린 눈빛으로 항주를 바라보았다.
그는 고민 끝에 강을 건너지 않았다.
천보장에 도움을 청하려던 계획은 자연적으로 취소되었다.
그들도 완전한 아군은 아니었다. 서로 원하는 바가 있어서 잠정적으로 협력하는 것일 뿐.
자신들이 영파로 향하는 목적을 알게 되면 그들 역시 욕심을 낼 가능성이 컸다.
‘진인사 대천명이라 했다. 일단 진행시키고 방법은 나중에 생각해보는 수밖에.’
다시 이틀 후.
영파에 도착한 혁무천과 황보수 일행의 행색은 낭인이 따로 없었다.
후줄근한 행색. 피곤에 절은 표정.
하지만 그들은 편히 쉴 시간조차 없었다.
백마궁이 추적을 포기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들에게 꼬리가 잡히기 전에 목적을 완수하고 영파를 떠나야 했다.
영파 남단의 해궁은 이백여 호의 평범한 마을이었다.
선창에는 이십여 척의 크고 작은 배가 정박해 있었다.
선창에 도착하자 은설이 말했다.
“귀에 큰 점이 있는 양 노인을 찾으라고 했어요.”
황보수는 수하들을 시켜서 양 노인을 찾아보았다.
이 각쯤 지났을 때 종환이 양 노인을 찾아냈다.
양 노인은 구석진 곳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다. 하얗게 쇤 머리, 주름이 가득한 얼굴은 햇볕에 새카맣게 그을려서 나이가 백 살이 넘었다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무슨 일로 이 늙은이를 찾으신 거요?”
“몇 달 전, 무인도에서 사람을 구하신 적이 있지 않소?”
황보수의 말에 양 노인의 눈빛이 세차게 흔들렸다.
“이 늙은이는 그런 곳 모르오.”
양 노인은 눈길을 돌렸다. 두려움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두려워하실 필요 없소. 우리는 노인장이 구해준 사람의 부탁을 받고 왔으니까. 우리를 그곳까지 데려다 주면 대가는 충분히 드릴 거요.”
“…….”
“은자 백 냥이면 아마 고기를 잡지 않고도 여생을 편히 살 수 있을 거요.”
양 노인이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황보수는 조용히 서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양 노인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조건을 걸었다.
“그럼 그 대가를 먼저 주시오. 그곳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면 아무리 엄청난 대가를 받는다 한들 무슨 소용이겠소?”
“먼저 준다 해도 같은 결과 아니오?”
“나는 잘못되어도 손자 녀석은 편히 살았으면 싶어서 그러오.”
황보수는 양 노인의 마음을 이해하고 품속에서 주머니를 꺼냈다. 주머니 안에는 긴급하게 사용할 비자금이 들어 있었다.
그는 다섯 냥짜리 황금 조각을 꺼내서 양 노인에게 내밀었다.
“이거면 은자 백 냥의 값어치는 될 거요.”
양 노인은 떨리는 손으로 황금 조각을 받아들었다. 그의 평생 가장 큰 돈을 만져볼 날이라 할 수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주시오. 손자 녀석에게 다녀오겠소.”
“혹시 모르니 우리 무사가 따라갈 거요. 그 점은 이해해 주시오.”
“그러시구려.”
황보수는 종환을 딸려 보냈다.
양 노인은 이각쯤 지났을 때 돌아왔다.
“일단 배부터 빌립시다. 이 늙은이의 배는 작아서 모두 태우고 갈 수 없소.”
양 노인의 고깃배는 서너 명이 겨우 탈 수 있을 정도로 작았다.
그 배로 백 리도 더 떨어진 바다를 건너 무인도까지 가기에는 너무 위험했다.
“지금은 파도가 센 철이 아니니 적당한 배면 될 거요.”
황보수와 혁무천은 양 노인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바다에 관한 것은 양 노인이 고수였다.
양 노인은 십여 명이 탈 수 있는 배를 구해온 다음 닷새 분의 식량 등 몇 가지 물건을 준비했다.
황보수 일행도, 혁무천과 은설도 그 시간을 이용해서 옷가지와 만약을 대비한 물품을 구비했다.
의외라면 은설이 종이를 제법 많이 샀다는 것이다. 혁무천은 의아했지만 ‘필요하니 샀겠지.’하고는 가볍게 넘어갔다.
그 사이 해가 중천에서 서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준비를 모두 마치자 양 노인이 마침내 배를 띄웠다.
“주산도에서 하루 쉬고 내일 아침에 그곳으로 갈 거외다.”
“그곳까지 얼마나 걸릴 것 같소?”
“날씨가 좋으니 하루 한나절이면 될 거요.”
양 노인의 말대로 파도는 높지 않았다.
바람도 약한 서풍이 불어서 적당한 속도로 전진하기에는 최적이었다.
배는 그날 해가 지기 직전에 주산도 남단에 도착했다.
바로 그 시각, 영파에 도착한 금가휘 일행은 황보수와 혁무천 일행을 수소문했다.
어둠이 칙칙하게 깔릴 무렵, 남단의 어촌인 해궁에서 그들을 봤다는 자들이 나왔다.
“양 노인이라는 어부와 배를 빌려 타고 바다로 나갔다고 합니다.”
금가휘는 보고를 받고 눈살을 찌푸렸다.
은근히 오기가 생겼다.
어렵지 않을 줄 알았던 추적이 칠 일 이상 이어졌다.
그러고도 놓쳤다.
물론 아직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바다로 나간 이상 찾아내기는 더 어려워질 것이다.
육지에서야 수소문해서 찾아냈지만, 바다에서는 물고기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일 아닌가.
“우리도 배를 빌려 타고 가보세. 아마 주산도 쪽으로 가면 놈들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네.”
시우는 이대로 포기하지 않을 생각인 듯했다.
자신 역시 포기할 마음은 없었다.
“좋습니다. 그럼 일단 배와 유능한 사공부터 구하고,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출발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