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천화 23화
무료소설 귀환천하: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502회 작성일소설 읽기 : 귀환천화 23화
23화
혁무천은 주입하던 진기를 서서히 줄이며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은석추의 떨리던 입술이 힘겹게 벌어지며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쉬이이이.
“서어어얼…….”
“예, 설이에요. 아버지 딸, 은설.”
은설은 눈물을 쏟아내면서도 미소를 지으려 노력했다.
“설…… 설아…….”
“으허헝!”
끝내 참지 못하고 은설이 울음을 터트렸다.
“내 딸…… 설……아를…… 보고…… 죽을 수 있다니…… 하늘도…… 무심치…… 않구나…….”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가 부르트고 터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가슴이 아릿해진 혁무천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났다.
“은설, 울면서 시간만 보내지 말고 이야기를 나누어 봐라.”
한참 동안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만 흘리던 은설이 떨리는 손을 내밀어서 은석추의 손을 꼭 잡았다.
어머니의 죽음을 말해야 하나?
갈등이 일었지만 말하지 않기로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하면 충격만 받을 테니까.
“그런데…… 여긴…… 어디……?”
“구강 강씨 아저씨네 집이에요.”
“어, 어떻게 네가 여기까지……?”
시간이 가며 몸이 조금 풀렸는지 처음보다는 안정된 목소리였다. 그래봐야 바짝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알아듣지 못할 만큼 작은 목소리였지만.
“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왔어요. 보고 싶어서…….”
“설아…….”
은석추의 거친 얼굴에도 자잘한 경련이 일었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은석추가 말했다.
“설아…… 가까이…….”
“아버지…….”
은설이 무릎걸음으로 몸을 바짝 붙였다. 은석추가 은설의 손을 잡은 손에 힘을 주고 입을 열었다.
“내 말…… 잘 들어……라…….”
목소리가 어찌나 작은지 바로 옆에 있어도 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혁무천이야 더 작은 소리도 또렷하게 들을 수 있었지만, 듣지 못하는 척하고 쳐다보지도 않았다.
은석추의 말은 한참 동안 이어졌다. 숨이 가쁜지 잠깐잠깐 쉬어가긴 했지만 말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렇게 반각쯤 지났을 때 은설이 소리쳤다.
“아버지!”
혁무천이 굳은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은석추의 기운이 급격히 약해지고 있었다.
“비키게! 안으로 들어가 봐야겠네!”
“조금만 기다려보쇼. 들어가도 되면 무천이 들어오라고 할 거요”
밖에서 다급해하는 황보수와 동대안의 맞서는 목소리가 들렸다.
혁무천은 칼부림이 나기 전에 밖을 향해 말했다.
“들어오시오.”
덜컹!
방문이 세차게 열리며 황보수와 두 장한이 안으로 들어왔다.
“이제 우리가 좀 이야기를 나누어봐야겠네.”
이번에는 황보수도 양보할 수 없다는 듯 딱딱하게 긴장한 표정이었다.
혁무천은 옆으로 비켜섰다. 약속을 한 이상은 그들에게도 기회를 주어야 했다.
은석추에게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황보수는 침상 앞에서 무릎 꿇은 채 은석추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는 은설을 내려다보았다.
“잠깐 할 이야기가 있네. 비켜주었으면 싶네만.”
“싫어요. 아버지와 함께 있을 거예요.”
“잠깐이면 되네.”
황보수는 차마 강제로 떼어내지는 못하고 은설을 달랬다.
은설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혁무천을 올려다보았다. 혁무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켜주라는 듯.
은설은 눈물을 소매로 쓱쓱 닦아내며 옆으로 비켜났다.
황보수의 시선이 이번에는 혁무천에게로 향했다.
“자네도 은 소저와 함께 잠깐 나가 있게나.”
혁무천은 순순히 몸을 돌렸다.
“설아, 나가자.”
“오빠…….”
“얻을 게 있는 이상 함부로 하지는 못할 거다.”
냉소를 띤 그의 말에 황보수와 장한들은 인상만 쓸 뿐 반박하지 못했다. 사실이 그러했으니까.
‘빌어먹을 놈.’
은설도 그제야 마지못한 표정으로 혁무천을 따라 움직였다.
황보수는 반각도 되지 않아서 밖으로 나왔다. 무척이나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혁무천은 그들의 마음을 짐작하고 속으로 코웃음 쳤다.
은설과 은석추의 대화를 모두 들은 그였다.
그들이 알고자 하는 비밀은 이미 은석추가 은설에게 모두 넘겨주었다.
욕심 때문이 아니었다. 아버지로서 딸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수단이었다.
정은맹이 정체가 드러나는 위험을 무릅쓰고 나섰다는 것은 그만큼 비밀의 가치가 크다는 뜻이다.
가치가 큰 만큼 남들이 아는 것 역시 원하지 않을 터. 그들이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 모든 흔적을 지우려 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걸 그도 알고 있었던 거지.’
어쨌든 저들은 은석추가 입을 다물고 있어도, 죽을까봐 심하게 다룰 수 없어서 속만 탔을 것이다.
“은 소저, 잠깐 이야기 좀 했으면 하는데.”
“나중에 해요. 지금은 아버지가 더 중요하니까요.”
은설은 황보수의 대화 요청을 거부하고 다급히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장한 하나가 이마를 찌푸리며 쏘아붙이듯 말했다.
“금방 돌아가실 것도 아닌데, 잠깐도 시간을 내지 못하나?”
“나중에 하면 되잖아요. 저는 지금 촌각이라도 더 아버지와 함께 있고 싶단 말이에요.”
혁무천도 한마디 나섰다.
“그 아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두시오.”
“흥! 우린 급히 알아봐야 할 것이 있네. 은석추가 그러더군, 자신이 알아낸 비밀을 딸에게 말했다고.”
“그럼 더욱 더 조심해야지.”
“뭐?”
“은설에게서 뭘 알아내고 싶으면 기다려. 저 아이가 말할 때까지.”
얌전히.
그 말은 하지 않았지만, 표정이나 어조에 왠지 비웃음이 배어있는 것만 같다.
황보수도 그 점을 느끼고 울화가 치밀었지만 입술을 깨물며 참았다.
은설이 알고 있는 비밀은 그만큼 중요했다.
정은맹의 존립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어쩌면 무림의 판도를 뒤흔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은석추는 결국 그날을 넘기지 못했다.
어둑한 하늘이 붉게 물들어갈 즈음, 은석추는 은설의 손을 꼭 잡은 채 숨을 거두었다. 왠지 편안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은설은 아버지의 시신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혁무천에게 오래 살지 못할 거라는 말을 듣긴 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하루를 못 넘길 줄이야.
가슴이 미어졌다.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슬픔을 억눌렀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표국의 표사보조를 하며 강호에 나온 그녀 아닌가.
겉모습과 달리 내면은 무척 단단하게 다져져 있었다.
“은설, 일단 아버지를 가매장하고 나중에 정식으로 장례를 치르는 게 좋을 것 같다만?”
혁무천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장례를 치를 시간이 없었다.
황보수 등이 많은 시간을 주지는 않을 터. 게다가 언제 백마궁의 추적대가 들이닥칠지 모른다.
은설은 그의 말뜻을 바로 알아듣고 소매로 쓱쓱 눈물을 닦았다.
“강 아저씨, 이 근처에 양지바른 곳이 있으면 알려주세요.”
처연한 표정으로 서 있던 강수평이 바로 대답했다.
“저쪽 뒷산에 좋은 곳이 있다. 관은 내가 알아보마.”
***
다음 날 오전. 은석추의 가매장을 준비하고 있는데 정은맹 무사가 다급히 대장간 안으로 들어섰다.
“기주, 백마궁이 장강을 건너오고 있습니다.”
황보수는 이마를 잔뜩 찌푸렸다.
“생각보다 빠르군.”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르는 것은 위험합니다, 기주.”
황보수는 은설을 바라보았다.
“은 소저, 더는 출발을 늦출 수 없네. 은석추가 찾아낸 곳을 알려주게.”
은석추가 지닌 비밀은 어느 한 장소에 대한 것이었다.
칠십 년 전, 마도와의 전쟁에서 정파가 패퇴한 후 정파의 수뇌 십여 명이 중원을 떠나 어디론가 사라졌다. 정파의 비전무공이 실린 비급을 몸에 지닌 채.
정파의 비전무공마저 마도에 빼앗기게 되면 복수의 길이 그만큼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게 그런 결정을 내린 이유였다.
그들은 마공을 넘어설 무공을 익힌 후 마도를 무너뜨리고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자 했다.
그런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 단 한사람도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정파는 물론이고 마도에서조차 그들의 은신처를 찾기 위해 수십 년 간 천하 곳곳을 뒤졌다.
은석추가 포함된 정은맹의 조사대 역시 비밀의 장소를 찾기 위해 떠났고, 결국 은석추 혼자 살아남았다.
겨우 목숨을 건진 그는 정은맹으로 향했다. 하지만 장강을 건너던 중 그를 알아본 백마궁 고수에게 붙잡혔고, 백마궁은 비밀을 캐내기 위해서 그를 고문했다.
정은맹은 은석추가 잡힌 것을 알고도 모른 척했다.
은석추가 정파고수들의 은신처를 알아내지 못한 줄 안 것이다.
은신처를 찾아냈다면 그곳에서 선조들이 남긴 무공비급을 찾았을 것이고, 최소한 몇 권은 갖고 나왔을 것 아닌가.
백마궁이 그 비급을 얻었다면 잠입해 있던 호접들이 바로 그 사실을 간파했을 것이다.
하지만 백마궁은 그를 잡고도 별 소득을 건지지 못했다고 했다.
정은맹은 미련 없이 은석추를 포기했다.
그의 목숨을 구하겠다고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낼 수는 없었다. 어렵게 심어 놓은 호접 역시 희생시킬 마음이 없었고.
은석추의 충성심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의 가치는 한번 쓰고 버려도 되는 똥패에 불과했다.
상황이 급변한 것은 백마궁의 고문이 한 달 가까이 이어졌을 때였다.
정은맹에 긴급 정보가 전해졌다. 은석추가 뭔가를 알고 있는 것 같다는 정보가.
그 소식을 들은 정은맹은 정확한 사실을 파악해보기 위해 황보수를 긴급 파견했다. 그런데 혁무천이 한발 먼저 은석추를 구해서 백마궁을 벗어난 것이다.
“걱정 마세요. 저도 최선을 다해서 도울 거예요.”
은설이 다부지게 대답했다.
아버지는 자신이 아버지를 대신해서 정은맹을 비밀의 장소로 안내해주기를 바랐다.
정은맹과의 신의를 지키기 위함이기도 했고, 험한 강호에서 혼자 살아갈 딸이 걱정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정은맹이라면 딸을 지켜줄 수 있겠지, 그리 생각한 듯했다.
은설은 아버지의 말에 따를 작정이었다. 어차피 아버지의 복수를 하려면 그녀도 정은맹의 힘이 필요했다.
황보수는 은설의 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이군. 소저가 돕는다면 우리 역시 최대한 예우를 해주겠네.”
은설은 고개를 끄덕이고 강수평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를 부탁드려요, 아저씨.”
강수평이 안쓰러워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라. 백마궁 놈들은 네 아버지의 발끝도 찾지 못할 거다.”
그제야 표정이 조금 풀어진 은설이 혁무천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오빠, 함께 가실 거죠?”
혁무천은 정은맹의 약속을 믿지 않았다. 은설과 함께 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러지.”
그런데 동대안은 함께 가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은석추가 숨기고 있던 비밀이 궁금하긴 했지만, 더 이상의 고생은 사절이었다.
“어, 나는 할 일이 있어서 함께 갈 수 없을 것 같은데…….”
혁무천은 두 말 하지 않고 그를 놓아주었다.
“좋을 대로 하시오. 대산도 굳이 따라올 것 없다.”
대산은 고집부리지 않고 순순히 그의 말에 따랐다.
“몸을 추스른 후 주인을 찾아가겠어.”
빠른 이동이 힘든 몸 상태. 그는 혁무천의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혁무천은 대산의 ‘주인’이라는 말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기약도 없는 헤어짐이었다. 시간이 흐르다 보면 언젠가는 잊혀질 한순간의 인연일 뿐. 찾아오지 않는다 해도 서운할 것이 없었다.
“그만 가자, 은설.”
구강을 출발한 일행은 려산을 끼고 서남쪽으로 오십여 리를 더 내려갔다.
백마궁이 강수평의 대장간을 덮친 것은 그때쯤이었다.
다행히 강수평은 은석추의 시신을 가매장한 후 대장간을 비우고 도주한 후였다.
“놈들이 도주했습니다. 이곳을 떠난 시간은 한 시진이 조금 넘었다 합니다, 령주.”
대장간 인근을 수색한 무사가 무릎을 꿇고 보고를 올렸다.
회의를 입은 중년 무사, 시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남쪽을 바라보았다.
“방향은?”
“서남쪽으로 가는 걸 봤다는 자가 있습니다.”
“서남쪽이라…….”
은석추가 온 곳이 서쪽이었다.
멀리 도주를 하는 게 아니라 은석추가 온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일 수도 있다.
그가 지닌 비밀을 밝히기 위해서.
‘정말 그놈이 전설의 장소를 찾아냈다면 천하가 뒤집어지겠군.’
그 사실이 알려진다면 수많은 파리떼가 꼬일 터.
그 전에 찾아내야 한다.
“숙부, 놈들이 동해로 가려는 것 아닐까요?”
준수한 청년이 시우의 곁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백마궁의 소궁주, 금가휘였다.
“그럴 가능성이 크네. 그러니 다른 자들이 그들에 대한 비밀을 눈치 채기 전에 잡아야만 하네.”
“으음, 놈들을 잡으려면 며칠 간 바삐 움직여야겠군요.”
“할 수 없지. 쫓아가세.”
“그러죠.”
짧게 대답한 금가휘의 이마에 내천 자가 그어졌다.
‘설마 그들은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