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천화 2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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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79회 작성일소설 읽기 : 귀환천화 21화
21화
사색이 된 중년 무사는 악다구니를 쓰며 대항했다.
그러나 오 초도 버티지 못하고 두 팔과 머리가 떨어져 나갔다. 세 줄기 피분수가 사방으로 뿌려지며 대전 안을 붉게 적셨다.
상석의 중년인, 백마궁의 궁주인 금적위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로들은 놓쳐도 용서받을 수 있지만, 너희들은 아니지.”
차갑게 뇌까린 그의 두 눈에서 등잔불을 모두 더 합친 것보다 더 붉은 살광이 번뜩였다.
“흥! 내가 얻지 못한 것은 남도 얻어서는 안 된다. 시우, 놈들을 찾아내라. 데려오지 못할 상황이면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반드시 죽여라!”
있는 듯 없는 듯 한쪽에 고요히 서 있던 회색무복의 중년인이 느릿하게 두 손을 맞잡고 예를 취했다.
백마궁주 금적위의 오른팔이라 할 수 있는 암마령주 시우가 그였다.
“예, 궁주.”
***
혁무천 일행은 이틀 동안 잠깐의 휴식만 취하며 이동했다.
백마궁의 추적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완벽히 따돌렸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래도 상당한 거리를 벌린 것만은 분명했다.
그렇게 얼마를 갔을까, 석양이 시뻘건 주단을 펼치며 서산으로 넘어가는 시각, 숲속에서 사당을 발견했다.
“저곳에서 쉬었다 가는 게 어떻겠나?”
동대안이 제발 좀 쉬었다 가자는 표정으로 말했다.
혁무천은 순순히 받아들였다.
동대안의 말처럼 쉬고 싶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더 이상의 강행군은 은석추에게도 무리였다.
사당 안은 제법 넓었다.
문을 열자 산신인지 토지신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신상 셋이 보였다.
신상의 뒤에는 십장생이 그려져 있는데, 오랜 세월을 지나며 곳곳이 지워져 있었다.
중앙에 불을 피운 흔적이 남아 있는 걸 보면 다른 여행객들도 가끔은 이곳에서 머물다 가는 듯했다.
혁무천은 은석추를 한쪽에 눕히고 몸을 살펴보았다.
상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좋지 않았다. 아직 숨이 붙어 있긴 하나 살아 있다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진 상태였다.
혁무천은 은석추의 몸에 공력을 조심스럽게 주입해서 약해질 대로 약해진 십이장경을 다스렸다.
그동안 동대안과 대산은 땔감을 주워왔다.
곧 사당 중앙에서 모닥불이 피어나며 따뜻한 열기가 맴돌았다.
동대안은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작은 눈을 가늘게 좁히고 혁무천을 바라보았다.
‘저러다 누가 공격하면 어떻게 하려고…….’
운기 중에 공격을 받으면 위험하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도 자신과 대산 앞에서 운기를 하고 있었다.
자신들을 믿는다는 걸까?
저 어리벙한 대산은 몰라도 자신을 믿고 운기하는 모습을 보자 묘한 생각이 들었다.
‘슬쩍 건드려볼까?’
그런 충동심이 느껴지면서 손이 근질거렸다.
실행으로는 옮기지 못했지만.
‘쩝, 슬슬 배가 고파지는데, 뭐라도 잡아올까?’
혁무천은 이 각 정도 십이장경을 다스린 후 기해혈에서 손을 뗐다.
표정이 밝지 않았다.
“지독한 놈들. 철저히 죽지 않을 정도로만 목숨을 붙여놓고 고문을 했군.”
“4호실에서 매일 매일 고문이 있었어. 소름 끼치는 신음이 하루도 빼놓지 않고 들렸어. 하지만 저 사람은 그렇게 오랫동안 고문을 받으면서도 굴복하지 않았어.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대산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하며 존경심이 담긴 눈으로 은석추를 내려다보았다.
혁무천도 어느 정도 예상했던 터였다. 그래도 대산의 말을 들으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죽으면 은설이 슬퍼할 텐데…….’
그런데 은석추를 바라보던 그가 고개를 들고 이마를 찌푸렸다.
곧 문이 열리더니, 밖으로 나갔던 동대안이 중간 크기의 멧돼지를 한 마리 잡아서 돌아왔다.
축 늘어진 멧돼지를 한쪽에 던져 놓은 그가 말했다.
“누가 이쪽으로 오고 있어.”
혁무천도 이미 누군가의 접근을 느끼고 있었다.
모두 십여 명. 제법 강한 기운을 지닌 자들이 사당의 사방에서 은밀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절정고수였다.
백마궁의 추적자들일까?
그건 아닌 듯했다. 그들이었다면 지독한 살기가 느껴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왜?
다가오는 자들의 목적은 은석추일까, 아니면 대산일까.
아니면 그냥 이곳을 지나가려는 사람들일까.
그는 일어서서 나타날 자를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끼이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문 밖에 세 사람이 서 있었다.
삼사십 대쯤으로 보이는 자들.
두 사람은 무기를 소유했고, 짙은 남색 무복을 입은 사십 대 중년인 한 사람은 무기가 없었다.
예상했던 대로 그들은 백마궁의 무사가 아니었다.
“뭐 하나 물어봐도 되겠나?”
무기가 없는 사십 대 중년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혁무천이 담담한 어조로 답했다.
“좋으실 대로. 대신 모르는 것은 대답해줄 수도 없으니 이해하시오.”
중년인의 시선이 혁무천 뒤쪽에 있는 은석추 쪽으로 향했다.
“저기 누워 있는 저 사람, 이름이 뭔가?”
“왜 그걸 알고 싶은 거요?”
“솔직하게 말하지. 어제 백마궁에 있는 친구에게서 급박한 소식을 들었네. 누군가가 은석추라는 사람을 뇌옥에서 빼내 도주했다더군.”
의외의 말에 혁무천의 표정도 무심하게 가라앉았다.
은석추를 알고 있는 자들, 또는 단체. 그 중 은석추를 구하려고 할 만한 곳은 하나뿐이다.
정은맹.
‘정보가 빠르군.’
그 말인 즉, 정은맹의 조직이 예상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크다는 뜻이다.
“범인은 모두 셋인데, 그 중 한 사람이 웅이산 깊은 곳에 사는 흑곰보다도 덩치가 더 크다고 했네.”
“그쪽에서 솔직하게 말하니 나 역시 거두절미하고 묻겠소. 왜 은석추라는 사람을 찾는 거요?”
“우리 사람이니까.”
“우리 사람이라……. 정말 그 사람을 동료로 생각했다면 어찌 한 달이 넘도록 백마궁에 그냥 놔둔 거요?”
“상대는 백마궁이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무작정 쳐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네.”
그 말은 혁무천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대해본 백마궁은 과거의 구문팔가에게 뒤지지 않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아니, 힘만 따진다면 더 강할 듯했다.
정은맹이 어느 정도 힘을 지녔다 해도, 백마궁의 총단을 치려면 전력을 다해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일개 무사 하나를 구하겠다고 자신들의 전력을 다 드러낼까?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리고, 백마궁에서 순조롭게 빠져나온 것이 온전히 자네들 능력 때문이었다고 보는가?”
중년인의 말을 듣고 혁무천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반짝였다.
“귀하의 사람들이 우리를 도와주기라도 했단 말이오?”
“시간을 끌어서 추적을 방해했다고 하더군. 그 이후에는 추적의 방향을 틀기도 했고.”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다.
어쩐지 쉽게 빠져나왔다 싶었는데, 뒤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을 줄이야.
“사실이라면 신세를 졌군요.”
“신세를 졌다 생각하면 저 사람을 우리에게 넘겨주게.”
“미안하지만 그건 어려울 것 같소.”
순간, 중년인의 좌우에 서 있던 자들에게서 강력한 기운이 폭사했다.
그 중 우측의 장한이 다그치듯 말했다.
“어린 친구가 건방지구나! 어른이 그 정도 이야기했으면 고맙다고 인사하고 물러설 것이지!”
혁무천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남색 무복의 중년인에게 되물었다.
“귀하도 그렇게 생각하시오?”
“어쨌든 목숨을 걸고 백마궁까지 들어가서 은석추를 구했으니, 자네들도 순순히 물러서기에는 아쉬울 거네.”
“물론이오. 그런데 우리가 왜 저 사람을 구했는지 아시오?”
“그건…….”
중년인은 말하기 곤란한 듯 말끝을 흐렸다.
대신 조금 전의 삼십 대 장한이 말했다.
“뭔가 욕심나는 게 있으니까 구한 것 아니냐?”
“귀하들이 저 사람에게 지시했다는 비밀임무와 관련된 것 말이오?”
남색 무복의 중년인은 표정이 굳어졌고, 삼십 대 장한은 싸늘하게 코웃음 쳤다.
“흥! 역시 노리는 게 있었군.”
“나는 그 비밀이 무엇이든 관심 없소.”
“그런데 왜 건네주지 않겠다는 것이냐?”
“저 사람을 딸에게 데려다 주어야 하기 때문이오.”
뜻밖의 대답에 삼십 대 장한의 눈이 커졌다.
“뭐, 뭐라? 딸?”
“그렇소. 우린 저 사람 딸의 부탁을 받고 백마궁에 들어갔던 것이오. 그러니 저 사람을 딸에게 데려다주기 전까지는 누구에게도 넘기지 않을 거요.”
남색 무복의 중년인도 혁무천의 말이 의외였는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은석추의 딸이 그대들에게 청부를 했다고?”
“청부가 아니라 부탁을 받은 거요.”
“은석추의 딸과 어떤 사이인가?”
“은설은 내 의동생이오.”
중년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딸이 아비를 찾고 있는 거라면 강제로 빼앗기도 애매했다.
그러나 은석추는 중요한 비밀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사실이라면 자신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비밀을 알아내야만 했다.
“우리는 은석추가 반드시 필요하네. 만약 우리가 은석추를 데려갈 생각이라면, 대항할 건가?”
“조금 전에 대답한 대로, 나는 저 사람을 딸에게 데려다주어야만 하오. 누구든 방해한다면, 적으로 대할 거요.”
“흥! 건방진!”
삼십 대 장한이 코웃음 치며 앞으로 나섰다.
남색 무복의 중년인은 멈칫했지만 그를 막지 않고 놔두었다.
말로 해서 안 된다면 무력을 사용하는 수밖에.
그만큼 은석추가 가진 비밀은 맹에 중요했다. 피를 보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얻어야 할 만큼.
물론 그가 알고 있다는 전제하의 일이지만.
팟!
장한이 땅을 박차고 튀어나갔다.
거리라고 해봐야 삼 장 안팎.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장한이 혁무천을 향해 쌍장을 내쳤다.
후우우웅!
혁무천은 장한의 쌍장이 코앞에 다가온 후에야 우수를 들었다.
두 사람 사이의 허공이 비틀리는가 싶더니,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장한이 뒤로 튕겨졌다.
중년인의 눈매가 흠칫 떨렸다.
시선이 가려져 있어서 정확한 상황을 볼 수는 없었다. 확실한 것은 일류 중의 일류고수가 단 한 수만에 밀렸다는 사실이었다.
자신조차 십여 초를 상대해야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고수거늘.
“손을 쓰겠다면 막지 않겠소. 단, 이후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그대들이 책임져야 할 거요.”
차가운 혁무천의 경고에 중년인의 눈썹이 송충이처럼 꿈틀거렸다.
“그대가 대단한 고수라는 걸 미처 몰라봤군. 하긴 그런 실력이 있으니 단 둘이서 백마궁에 들어간 것이겠지.”
말을 끝낸 그의 전신에서 정갈한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났다.
와장창!
갑자기 창문 하나가 박살나며 무사 하나가 사당 안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그는 한 걸음도 옮기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어느새 그의 목에 동대안의 꼬챙이처럼 가느다란 검이 대어져 있었다.
아마 마음만 먹었다면 그 검은 이미 침입자의 목을 뚫거나 베어버렸을 것이다.
“어떻게 할까? 그냥 죽일까?”
동대안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작은 눈이 더 작아지고, 눈동자도 깨알만하게 줄어들었다.
그 눈동자에서 묘한 살기가 맴돌았다.
“놔주시오. 단, 앞으로는 침입자가 누구든 상관하지 말고 베시오.”
혁무천의 말에 동대안이 검을 거두고 입꼬리를 비틀었다.
“알았네. 그렇게 하지. 나도 그게 편하거든.”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남색무복 중년인의 표정이 굳어졌다.
자신이 전력을 다한다면 저들을 제압할 수 있을까?
이리저리 재 봐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결국 입술을 지그시 깨문 그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지금은 모험을 할 때가 아니었다.
“좋네, 좋아. 그럼 이렇게 하지.”
“말씀해 보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