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천화 2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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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415회 작성일소설 읽기 : 귀환천화 20화
20화
동시에 귀를 후비는 날카로운 냉소.
“켈! 어리석은 놈, 죽을 자리를 알아서 찾아오는구나.”
대경실색한 동대안은 그림자를 향해 두 손을 휘둘렀다.
“호오! 제법인데?”
늙수그레한 목소리의 주인은 정말 감탄했다는 듯 말하며 동대안의 공격권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 움직임은 무척 빠르고 변화가 심해서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동대안은 당황하지 않고 더욱 공격을 강하게 펼치며 그림자의 주인을 몰아붙였다.
그림자의 주인은 동대안의 무공이 예상했던 것보다 강하다는 걸 알고 은은한 노기를 발산했다.
“오냐, 이놈. 내가 네놈의 두 다리를 예쁘게 잘라주마.”
냉랭히 말한 그가 두 손을 뻗은 순간, 칼날처럼 예리한 바람이 어둠 속에서 휘몰아쳤다.
동대안도 방심하지 않고, 옆구리에 꽂힌 섬혼을 빼들었다.
슈슈슈슉!
섬뜩한 섬광이 어둠 속에서 번뜩이고, 허공에 구멍이 숭숭 뚫렸다.
“헛!”
그림자 주인의 입에서 헛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염소수염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귀혼마(鬼魂魔) 모광유.
신법이 어찌나 신묘한지 사람들은 자신을 귀신 보듯 한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놈은 신법도 자신 못지않게 신묘했고, 손에 들린 꼬챙이 같은 검은 더더욱 예리했다.
“이 찢어죽일 놈이!”
노기가 치민 그에게서 살기가 뻗쳤다.
동대안도 눈에 힘을 주고 섬혼을 뻗었다.
‘흥! 어디 누가 죽는지 보자고!’
광천곡에 처박혀서 십 년 넘게 지낸 그였다. 고수라 할 만한 자와 싸워본 지가 언제던가.
사부와 겨룬 게 십이 년 전이던가?
그 후 제대로 싸워본 적이 없었기 때문인지 신이 났다.
게다가 섬혼은 역시 그와 천생연분처럼 잘 어울리는 무기였다.
흥이 인 그는 도주하는 것도 잊고 신나게 섬혼을 찔러댔다.
“눈도 꼭 쥐눈깔만 한 게 어디서……!”
모광유는 노화가 머리꼭대기까지 솟구쳤다.
집마원에서 지낸지 십 년, 언제 이런 수모를 겪어 보았던가.
그러나 분노만으로는 동대안을 찢어죽일 수 없었다.
“이 개늙은이야! 나만한 쥐 봤어?”
동대안은 동대안대로 분노가 끓었다.
자기 눈이 어때서!
섬혼에서 번뜩이는 섬광이 살기를 품고 우박처럼 쏟아졌다.
하지만 모광유도 숱하게 생사를 넘나든 고수였다.
“뭐? 개늙은이? 오냐, 이놈! 누가 죽나 해보자!”
한편, 혁무천도 한 사람과 마주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보이는 자는 머리가 희끗한 노인이었다. 허리가 구부정했는데, 두 눈에서 기괴한 광망이 번들거렸다.
“클클클, 그놈들, 운도 없구나. 하필이면 집마원으로 들어오다니.”
혁무천은 잠깐 사이 결정을 내리고 은석추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거인에게 전음을 보내며 검을 뽑았다.
<내가 저자를 막는 동안 이 사람을 데리고 멀리 떨어져 있어.>
어둠 속,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거인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은석추에게 다가갔다.
“어? 너……?”
혁무천의 앞을 막아선 노인이 거인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거인을 아는 듯했다.
혁무천도 미처 몰랐던 사실이어서 흠칫했다.
백마궁의 노인이 안다는 건 거인 역시 백마궁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는 뜻.
그러나 이제는 어쩔 수 없었다. 운명에, 자신의 느낌을 믿는 수밖에.
“만 할아버지, 난 여길 떠날 거야.”
은석추를 안아 든 거인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정말 너구나. 이놈아, 어떻게 된 거야? 그 모습은 또 뭐고? 도대체 몇 달 동안 어디 갔다 이제 나타나서……?”
“백마옥 지하에 있었어.”
노인이 경악해서 다시 물었다.
“뭐? 네가 그곳에는 왜……? 혹시…… 궁주가……?”
하지만 혁무천은 두 사람이 계속 대화를 나누게 놔둘 수 없었다. 언제 경비무사들이 몰려들지 몰랐다.
<뒤로 물러서.>
만감이 교차하는 눈으로 노인을 바라보고 있던 거인은 은석추를 안고 거리를 벌렸다.
혁무천은 내심 안도하며 곧장 노인을 향해 몸을 날렸다.
말씨름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고요한 밤하늘에 싸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제 곧 백마궁의 무사들이 들이닥칠 것이다.
어쩌면 그 전에 집마원이라는 이곳의 고수들이 더 몰려올 수도 있고.
“순순히 잡히기는 싫다 이건가? 하긴, 그러니 복면을 쓴 거겠지.”
노인은 지팡이를 들어서 혁무천의 검을 상대했다.
혁무천은 그의 정면으로 날아가며 검을 빠르게 뻗었다.
그는 공력을 팔 성 이상 끌어올리지 않으려 조심했다. 자칫하면 자신의 목에 있는 생명선이 줄어들 테니까.
최소한의 힘으로 최선의 결과가 나오게 해야 한다.
‘상대가 얕볼 때 최대한 피해를 줘야 해!’
노인, 만대곡은 가소로웠다.
감히 자신에게 정면대결을 하겠다고 달려들다니.
그는 조소를 지으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단숨에 머리를 부숴주마!”
지팡이에서 뻗어나간 기운이 어둠을 쪼개며 혁무천의 검에 맞섰다.
떠더더덩!
굉음이 연이어 울리고, 만대곡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물러섰다.
혁무천은 물러서는 만대곡을 향해 검기를 쏟아냈다. 빠르고도 강력한 검기는 검강에 뒤지지 않는 위력을 발휘했다.
눈 깜짝할 새, 밤하늘에 피어난 수십 개의 푸른 검화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밀려갔다.
“이놈이……!”
만대곡은 이를 악물고 뒤로 이삼 장 물러섰다.
자존심이 상했다.
자신의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저 복면인은 새파랗게 젊은 놈이 분명했다.
그런데 자신이 밀리다니.
이 무슨 개망신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는 자존심을 따질 겨를도 없었다.
혁무천의 공격은 단 일푼의 빈틈도 허락하지 않았다. 빠르고 강한데다 면면부절 끊어짐이 없었다.
그림자처럼 따라붙으며 뻗어가는 그의 공격에 만대곡은 등골이 오싹할 지경이었다.
결국 어깨에 일검을 맞은 만대곡이 ‘크읍!’하는 신음을 삼키고는 뒤로 몸을 날렸다.
“동 형!”
혁무천은 동대안을 부른 후 즉시 우측으로 방향을 틀고 땅을 박찼다.
담장이 저만치 있었다. 거인이 그쪽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동대안도 모광유를 놔두고 훌쩍 신형을 날렸다.
‘씨바, 괜히 따라와서…….’
입이 한 자는 쭉 삐져나왔다.
“어딜 도망가느냐 이놈!”
모광유가 동대안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쫓아가지는 않았다.
대나무처럼 삐쩍 마른 놈의 검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섬뜩했다. 아마 신법이 조금만 느렸어도 몸에 구멍이 두어 군데는 더해졌을 것이다.
게다가 만대곡마저 칼침을 맞은 상황.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욕만 퍼부었다.
“이 눈구멍이 좁쌀만 한 놈아! 이리 안 와!”
동대안은 이를 으드득 갈았다.
‘이런 씨이이! 염소대가리 같은 늙은이가……!’
마음 같아서는 당장 돌아가서 늙은이의 입에다 꼬챙이를 꽂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꾹 참고 담장을 넘어갔다.
삐이이익!
워낙 빨리 벌어진 일이다 보니 그제야 소성이 밤하늘을 뒤흔들었다.
***
담장을 넘은 혁무천은 은석추를 넘겨받고 빠르게 달렸다.
곧 대대적인 추적이 있을 터, 백마궁에서 최대한 멀어져야 했다.
의외라면 거인이 멀리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따라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은석추가 충격을 받을까봐 속도를 적당히 조절했다고는 하나 덩치와 달리 발걸음이 제법 빨랐다.
그뿐 아니라 이 근처의 지리도 잘 알고 있었다.
“서쪽으로 가면 갈대로 뒤덮인 십리평이 나와. 그 안으로 들어가서 방향을 틀면 백마궁 사람들을 따돌리기가 좀 더 쉬워질 거야.”
혁무천은 그의 말을 믿고 이동했다. 어차피 그나 동대안은 이 근처의 지리에 대해서는 눈뜬 봉사나 마찬가지였다.
혁무천 일행은 십리평에 들어가서 서쪽으로 꺾어졌다. 그렇게 십리평을 관통한 후에야 그들은 잠시 휴식을 취했다.
거인에 대해서 알게 된 것도 그때였다.
“내 이름은 장대산이야.”
나이는 이제 열아홉 살.
그는 백마궁 사람이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의 할아버지, 패혼신마라 불렸던 장염이 백마궁의 장로였다.
석 달 열흘 전에 숨을 거두어서 이제는 혼자가 되었지만.
“궁주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니까 나를 가두었어.”
장염이 가진 물건을 빼앗기 위해서.
하지만 그는 그 물건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니 내놓을 수도 없었다.
“나는 정말 그 물건을 본 적이 없어. 어디에 있는지도 몰라.”
백마궁은 그의 말을 믿지 않고 고문을 가했다. 무려 석 달 동안이나.
아마 혁무천이 구해주지 않았다면 뇌옥에 갇혀서 고문을 받다가 죽어갔을지도 몰랐다.
“뭔데 그걸 빼앗겠다고 너처럼 어린애를 고문해?”
동대안이 호기심에 물어보았다. 혁무천도 조금은 궁금했기에 거인, 장대산을 바라보았다.
장대산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사실대로 말했다.
“혈천여록(血天旅錄).”
그 한 단어에 동대안은 경악했고, 혁무천은 표정이 묘하게 굳어졌다.
동대안이 동그래진 눈으로 물었다.
“마천제의 혈로에 대한 글이 적혀있다는 그 책?”
“나는 잘 모르는데, 그렇다고 들었어.”
“소문으로는 그 책에 마천제의 무공도 적혀 있다고 하던데, 사실이냐?”
“나는 모른다니까.”
“하긴…… 백 년 동안 그런 책이 있다는 말만 돌았지 본 사람이 없는데, 네가 알 리가 없지.”
동대안은 아쉬워하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 그만 쉬고 출발하지.”
혁무천이 나직이 말하고 일어났다.
그는 대산이 말한 책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 책은 자신이 복수심을 북돋기 위해 틈틈이 적은 일기와도 같았다.
문제는 그 안에 자신이 구상했던 무공도 적혀 있다는 것이다.
지옥화를 기반으로 한, 만인의 피를 갈구하는 아수라의 불완전한 무공이.
단, 만약의 상황을 생각해서 자신만이 해독할 수 있는 순서로 적어 놓은 터라, 다른 사람은 아무리 본다 한들 그 글을 해석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또 모를 일이었다. 세상에서는 가끔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나곤 하니까.
‘빙천동에 들어갈 때 없앴어야 했는데…….’
사실 자신의 잘못만은 아니었다.
누가 빙천동에서 백 년이나 보낼 줄 알았나?
‘그런데 누가 그 책을 세상에 내놓은 거지?’
문득 이해할 수 없던 귀령자의 죽음이 떠올랐다.
어쩌면 단순히 통로가 무너져서 빙천동 안에 갇힌 것이 아닐지도 몰랐다.
***
화려한 대전 안에 죽음과 같은 침묵이 흘렀다.
기둥에서 타오르는 열두 개의 등잔불이 유난히 붉게 느껴졌다.
형형한 눈빛을 빛내며 상석의 백색 거대한 의자에 앉아 있는 장년인.
회색수염이 가슴까지 늘어진 그의 좌우에는 석상처럼 무표정한 무사 여덟 명이 서 있었고, 앞에는 두 사람이 엎드려 있었다.
“지하금옥에 있던 사호실과 팔호실의 죄수를 모두 놓쳤다고?”
“아직 놓친 것은 아닙니다. 추살대를 보냈으니 곧…….”
사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자가 엎드린 채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대답했다.
“너는 그들이 어떤 죄수인지 잊은 모양이구나.”
“속하가 어찌 잊겠습니까?”
“잊지 않았는데 어찌 도망치도록 놔두었단 말이냐? 그들은 비록 죄수지만, 하나하나가 너보다 더 가치가 있는 자들이니라.”
“궁주! 속하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래, 죽을죄를 지었지. 아암, 죽을죄를 지었어.”
엎드려 있던 중년인이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떨리는 두 눈에 공포가 서려 있었다.
실수 한번 했다고 해서 설마 당주인 자신을 죽이려 할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그런데 오른손을 쳐든 궁주의 말투에 진득한 살기가 담겨 있지 않은가 말이다.
“사, 살려주십시오, 궁주! 그동안 세운 공을 생각해서라도……! 집마원의 장로님들도 놓쳤을 정도로 강한 놈들이었습니다!”
그의 간절한 목소리가 울린 순간, 상석의 중년인이 손을 흔들었다.
엎드려 있던 중년인은 공포에 질려서 몸을 뒤로 뺐다.
그가 석 자쯤 물러섰을 때 한 줄기 가공할 기운이 그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끄드드드득.
중년인의 머리가 소름끼치는 기괴한 소음과 함께 뒤틀렸다.
“끄으으으윽!”
중년인은 악귀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손을 들어서 머리를 감쌌다.
어느 순간, 중년인의 머리 칠공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더니, 머리가 터져 나갔다.
그의 옆에 엎드려 있던 중년 무사는 그 즉시 뒤로 몸을 날렸다.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좌우에 늘어서 있던 무사 중 셋이 유령처럼 이동해서 그자의 앞을 막아섰다.
동시에 시퍼런 도광이 대전의 허공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비켜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