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천화 5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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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엽 형의 비무 순서가 되려면 두 시진 정도 남았어. 많은 시간이 남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적은 시간도 아니야. 지금부터라도 수백 번 반복해서 펼치다 보면 최소한 두세 개의 변화는 융화시킬 수 있을 거야.”
엽기척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승산이 삼 할 정도밖에 되지 않아서 운에 맡기다시피 했는데, 이제는 자신의 힘으로 올라설 수 있는 희망이 보였다.
“오늘 승리하면 선물을 하나 주지.”
게다가 혁무천이 덧붙여 한 말에 피가 뜨겁게 끓었다.
무사에게 주겠다는 선물이 뭐겠는가. 더구나 비무대회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주겠다는 선물이다.
“그럼 이제 나를 상대라 생각하고 검을 펼쳐 봐.”
엽기천은 검을 빼들고 혁무천과 마주섰다.
한 시진 후.
엽기천의 몸이 땀으로 흥건히 젖었다.
그는 섬전귀검을 스무 번 이상 펼쳤다. 혁무천은 적수공권으로 그를 상대했고.
나름대로 자신 있었던 섬전귀검이 혁무천의 가벼운 손짓에 번번이 막히거나 뚫렸다.
혁무천이 펼치던 검을 떠올리며 변화를 주려 했지만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그 대가로 그는 수십 대를 얻어맞았다.
그나마 공력이 실리지 않아서 내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고통은 그대로 전해졌다.
오죽하면 한쪽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측은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까.
이를 악문 엽기천은 반시진 정도가 더 지나자 거의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섬전귀검을 펼쳤다.
시작을 했으니 끝장을 보자는 심정이었다.
어차피 검의 변화를 얻지 못하면 비무대회에서도 승산이 희박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어?”
지켜보던 동대안이 눈을 홉떴다.
“아!”
목량도 짧은 탄성을 발했다.
벼락처럼 뻗어나가던 엽기천의 검이 순간적으로 잔상을 남기며 흐릿해진 것이다.
아마 공력을 조금 더 끌어올리고 빠르기를 조절한다면 변화가 더 심해질 듯했다.
그러한 검의 변화는 연환으로 펼쳐진 네 개의 초식에서 한 번씩 일어났다.
땅!
엽기천의 검이 맑은 소리와 함께 옆으로 밀려났다.
하지만 이번에는 혁무천도 그를 치지 않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조금 나아졌군.”
동작을 멈춘 엽기천은 멍한 표정으로 자신의 검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펼치고도 믿어지지 않았다.
섬전귀검으로 그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니.
멍하니 서 있는 그에게 혁무천이 말했다.
“비무까지 한 시진도 남지 않았으니 이제 쉬면서 몸을 추슬러.”
그를 바라보는 엽기천의 눈매가 잘게 떨렸다.
“고맙네, 무 형.”
“고마워할 것 없어. 그대가 노력으로 얻은 거니까.”
“하지만 무 형이 아니었으면…….”
“그 정도로는 한 번 정도만 이길 수 있을 뿐이야. 명심해. 쾌(快)가 변(變)을 동반하면 위력이 배가 된다는 걸.”
“명심하겠네.”
혁무천은 그 정도에서 지도를 마치고 몸을 돌렸다.
자신의 사차전 비무 차례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왜들 그러고 있어? 구경 안 갈 거야?”
***
혁무천의 사차전 비무 상대는 남경 응천방의 소방주인 도개산이란 자였다.
남경 제일의 청년 고수.
응천방의 미래.
이름 앞에 숱한 미사여구가 붙어 있는 그는 철조를 능숙하게 사용해서 혁무천을 공격했다.
무천이 백마궁의 장로 유곽과 막상막하의 대결을 벌인 일은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도개산도 그 소문을 들은 터라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서 혁무천을 몰아붙였다.
기형병기인 철조에는 날카로운 칼날 다섯 개가 독수리의 발톱처럼 위아래로 솟아 있었다.
위쪽의 칼날 세 개는 상대의 살과 뼈를 가르고, 아래쪽 작은 칼날 두 개는 상대의 무기를 잡아채는 역할을 했다.
거기다 공력까지 더해지면 철판조차 찢어발길 수 있어서 상대하기 껄끄러운 무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칼날이 녹청색으로 물들어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독이 발라져 있는 듯했다.
혁무천은 비무대회에서 무기에 독을 바른 도개산의 악독한 행위를 용서치 않았다.
십여 초식이 지났을 때, 혁무천의 장력이 도개산의 옆구리에 박혔다.
콰직!
뼈가 부러지는 소리.
허리를 굽히고 뒤로 물러서는 도개산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뒤이어서 혁무천이 우장을 들어 허공을 격하고 내쳤다.
후웅!
강력한 장력이 대기를 터트릴 듯 공명을 일으키며 도개산을 덮쳤다.
눈을 치켜뜬 도개산이 전력을 다한 철조공으로 방어막을 형성시켰다.
쾅! 쩌정!
굉음과 함께 철조의 칼날이 부서지며 사방으로 튀었다.
도개산 역시 뒤로 튕겨진 뒤 나뒹굴었다.
비틀거리며 겨우 일어난 그는 혁무천의 다음 공격을 대비하며 뒤로 물러났다. 충격이 큰 듯 일그러진 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탈색되어 있었다.
혁무천은 그를 더 이상 공격하지 않았다. 공격할 필요도 없었다.
“네 어깨에 박힌 칼날부터 처리해. 내가 죽였다는 말을 듣고 싶지는 않으니까.”
창백하던 도개산이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혁무천 말대로 부서진 칼날 중 큰 조각 하나가 그의 어깨에 박혀 있는 것이다. 독이 발라진 칼날이.
“헉! 이, 이런…….”
화들짝 놀란 도개산은 뒤로 주르륵 물러선 후 어깨에 박힌 칼날을 빼냈다.
푸르스름하게 변색된 핏물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그는 급히 손을 품속에 넣어서 작은 함을 꺼내고는 검은 단환 하나를 꺼내 복용했다.
칼날에 바른 독은 맹독 중의 맹독인 혈갈독이었다. 당장 해독시키지 않으면 독기가 심장까지 침투할 수도 있었다.
단환을 씹어서 삼킨 그는 어깨에 박힌 칼날을 빼냈다.
그 사이 눈치 빠른 심판관이 나와서 깃발을 높이 들었다.
“무천 승!”
무천은 냉랭한 표정으로 포권을 취한 후 비무대에서 내려왔다.
‘비겁한 짓을 한 놈은 고생 좀 해도 돼.’
부서진 철조의 칼날이 도개산의 어깨에 박힌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부서지며 튕겨 오른 칼날 중 하나를 향해 혁무천이 지풍을 튕겨서 그에게 되돌려 보낸 것이다. 도개산으로서는 그나마 어깨에 박혀서 목숨을 건진 것이 다행이었다.
엽기천의 비무는 점심시간이 지난 후에 시작되었다.
상대는 강서성 삼대문파 중 하나인 절명도문의 여한평이란 자였다.
강서성의 청년고수 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고수.
그의 입장에서 엽기천은 가소로운 존재였다.
자신의 출세를 위한 발판 정도라고나 할까.
엽기천의 검은 빠른 걸 빼면 특별한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어중간한 쾌검.
그 정도의 쾌검으로는 자신의 솜털도 건드릴 수 없으리라.
자신이 넘친 여한평은 여유 있게 엽기천을 상대했다.
비무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엽기천의 몸 두어 군데에 상처가 났다.
엽기천은 간담이 서늘한 위기를 몇 번이나 가까스로 넘겼다.
혁무천과의 비무를 경험해보지 않았다면 위기를 넘기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후후후후, 지금이라도 패배를 시인하고 내려가게나.”
여한평은 공격을 늦추고 여유를 부렸다.
엽기천은 그 틈을 이용해서 흔들린 진기를 진정시켰다.
“아직은 아니야. 혹시 아나? 갑자기 그대의 발목이 부러져서 내가 이길지.”
검을 움켜쥔 그는 혁무천과의 비무를 떠올리려 애썼다.
“아직 혼이 덜 났다면 어쩔 수 없지.”
여한평이 조롱하듯 말하며 공세를 강화했다.
츠츠츠츠…….
광폭한 도기가 대기를 갈가리 찢으며 엽기천을 향해 밀려갔다.
이를 악 다문 엽기천은 신법을 펼치며 상대 공세의 빈틈을 찾으려 노력했다.
여한평의 도세에 상처가 두 군데 더 늘어났다.
그렇게 십여 초식쯤 지났을 때였다.
<지금!>
혁무천의 전음이 귀청을 때렸다.
“차아앗!”
엽기천은 반사적으로 기합을 터트리며 전력을 쏟아냈다.
여한평은 엽기천의 검에 별다른 변화가 없는 걸 보고 도를 좌우로 휘저었다.
엽기천의 검로가 그의 도세에 휘말려서 철저히 차단되었다.
여한평의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떠올랐다.
‘어리석은 놈. 그딴 실력으로 어디서 감히…….’
바로 그때, 순간적으로 엽기천의 검이 미미하게 변했다.
똑같은 검초로 생각하고 적당히 상대하며 기회를 노리던 여한평이 눈을 치켜떴다.
엽기천의 검이 갑자기 두 개로 나누어져서 날아드는 것 아닌가.
“엇?”
흠칫한 여한평은 급히 몸을 틀며 칼을 휘둘렀다.
그의 칼끝에서 솟구친 도기가 채찍처럼 휘어지며 검영 하나를 갈랐다.
그러나 진검이 아닌 환영인 듯 그의 칼은 허공을 가르고 지나갔다.
동시에 또 하나의 잔상이 그의 어깨를 파고들었다.
“으윽!”
악다문 잇새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엽기천은 한번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연이어서 삼 초식을 펼쳤다.
이전과 같으면서도 다른 검초였다.
검이 쾌속하게 뻗어나가던 중 일으킨 변화는 정신이 흔들린 여한평을 혼란스럽게 했다.
뒤로 물러나는 여한평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검에 찔린 어깨가 빗장뼈까지 건드린 듯 칼을 제대로 휘두를 수조차 없었다.
그 바람에 다시 가슴에 스치듯 상처를 입었다.
“이런 빌어먹을!”
엽기천은 사력을 다해서 여한평을 몰아붙였다.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무공을 펼칠 수 없기라도 한 듯.
여한평도 신법만으로 피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몸을 틀 때마다 어깨가 부서지는 듯했다.
“그만!”
도저히 안 되겠는지 여한평이 뒤로 훌쩍 물러나며 소리쳤다.
엽기천은 공격을 멈추고 여한평을 노려보았다.
멀찍이 물러난 여한평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엽기천 승!”
심판관이 소리쳤다.
와아아아아!
구경꾼들에게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약자를 위한 환호였다.
강자들의 전유물이라 할 수 있는 오차전이다. 그런 오차전에 삼류문파에서 온 엽기천이 올라가자 마치 자신들이 올라간 것처럼 열광했다.
비무대에서 내려오는 엽기천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었다.
심장이 벌떡벌떡 뛰었다.
그때만큼은 몸의 상처도 고통스럽지 않았다.
육십여 명이 겨루는 오차전에 진출했지 않은가.
설령 패하더라도 중간간부는 확보한 거나 다름없었다.
“정말 재미있는 친구들이야.”
천화광이 멀리서 혁무천 일행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분명 엽기천이라는 자는 어제까지만 해도 여화평의 적수가 아니었지. 그런데 하루 만에 달라졌어.”
유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천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십니까?”
“강자의 옆에 있다 보면 전염되듯 능력이 향상되는 법이지.”
유궁도 그 말만큼은 인정했다.
자신만 봐도 지난 몇 년 사이 실력이 일취월장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때 천화광이 불쑥 물었다.
“유궁, 무천이 어젯밤 소소를 만났다고 했지?”
“예, 소성주. 그리고 뒤늦게 알았습니다만, 우문척도 만난 것 같습니다.”
“우문척을?”
천화광의 눈에서 싸늘한 광채가 번뜩였다.
“무천이 우문 소저를 만난 후 철혈집정고에 갔는데, 우문척이 나중에 그곳에서 나왔습니다.”
천화광은 유궁의 말을 듣고 눈을 가늘게 좁혔다.
두 사람에게는 마땅한 접점이 없었다.
동생인 우문소소 때문일까?
하지만 그가 아는 한 우문척은 우문소소를 신경 쓰지 않았다.
정보를 얻기 위해 갔을 수도 있긴 한데, 그런 일이라면 아랫사람을 부리면 될 일이다.
그렇다면 무천이란 자 때문에 갔을 가능성이 크다는 건데…….
그는 우문소소에 이어서 우문척까지, 철혈마련 우문가의 자식들이 무천을 욕심내는 게 못마땅했다.
‘흥! 네 마음대로 안 될 거다, 우문척.’
남들은 우문척을 무시했다. 우문척보다는 우문양을 더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그는 생각이 달랐다.
외사촌 형제인 우문척을 잘 알아서만이 아니다.
외숙부인 우문강천은 강한 후계자를 원하는 자다.
우문척에게 능력이 없다면 진즉 우문양을 후계자로 삼고도 남았다.
결국 우문척을 아직까지 후계자의 자리에 그대로 놔두고 있다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뜻.
‘우문척에게 뭔가 비밀이 있어.’
비밀이 있다면 결코 가벼운 비밀은 아닐 터. 그를 제대로 평가하려면 그 비밀이 밝혀진 다음이어야 한다.
‘내가 네 가면을 벗겨주마, 우문척.’
그때 한쪽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고개를 돌리자, 두 손을 든 채 환히 웃으며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 자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