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천화 5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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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88회 작성일소설 읽기 : 귀환천화 52화
52화
철혈집정고는 지하 이층 지상 이층으로 된 건물이었다.
사 장 폭에 길이는 십이 장.
규모만 따지면 철혈마련 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만큼 컸다.
출입문은 평범하게 느껴질 정도로 작았는데, 그마저도 하나뿐이었다.
출입문을 통과하면 어린아이 손목 굵기의 쇠창살로 된 철문이 나왔다.
혁무천이 안으로 들어가자, 철문 안에 있던 사서가 인상을 쓰며 맞이했다. 끝나갈 시간에 온 그가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어떻게 오셨는가?”
혁무천은 먼저 철문 사이로 난 가로세로 한 자 크기의 공간으로 증패를 내밀었다.
“알아보고 싶은 게 있어서.”
힐끗 증패를 본 사서가 정색했다.
증패는 최소 백인대주 이상만이 지닐 수 있는 은패였다. 더구나 장로원의 표식이 찍혀 있었다.
“어느 분이 보내셨소?”
“한상귀 장로님께서 보내셨소.”
“뭘 알아보려는 거요?”
“과거 강호의 일과 관련된 정보나 첩보를 모아 놓은 게 있으면 보고 싶소.”
“시기는? 언제의 일을 알아보려는 거요?”
“오래 전의 일일수록 좋소. 오십 년 전쯤의 일도 좋고, 백 년 전의 일도 좋소.”
사서는 세필을 빠르게 놀려서 혁무천의 말을 세세히 적고는 철문을 열어주었다.
혁무천이 안으로 들어가자, 사서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옆에는 내부 경비를 책임진 무사 둘이 어깨에 힘을 바짝 주고 서 있었다.
“이분을 이층의 이십삼고(二十三庫)로 안내해드려.”
둘 중 체구가 조금 작은 무사가 몸을 돌렸다.
“따라오슈.”
철혈집정고는 모두 사십사고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 중 이십삼고는 이층의 세 번째 칸으로 구석진 곳에 있었다.
시간이 늦어서인지, 아니면 찾는 이가 본래 없는지 몰라도 혁무천이 그 안으로 들어갔을 때는 아무도 없었다.
“책을 손상시키면 안 되니 조심하슈.”
무사가 뒤에서 말했다. 그러고는 십삼고 입구에 서서 돌아가지 않았다.
감시하는 것도 그의 임무인 듯했다.
하긴 정보를 모아놓은 곳 아닌가. 혼자 보도록 놔두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혁무천은 일단 서고 안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그곳의 서류가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는 서고 안에서 풍기는 퀴퀴한 냄새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넓이는 열 평이 조금 넘는 정도.
서대에 꽂혀있는 서류도 있고, 바닥 한쪽에 차곡차곡 쌓여 있는 서류도 있었다. 바닥의 서류는 보는 사람이 많지 않은지 먼지가 수북했다.
서류는 대부분 책으로 묶여 있었는데, 표지에 작성 연도와 서류의 내용을 알리는 간단한 단어가 적혀 있었다.
혁무천으로서는 일일이 펼쳐보지 않아도 되니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잘하면 예상보다 빨리 찾아낼 수 있겠군.’
혁무천은 일단 시기가 오래된 서류를 찾아보았다.
가장 오래된 서류는 육십여 년 전에 작성한 것이었다.
혁무천은 책을 하나 들고 내용을 살펴보았다.
강호의 동향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이었고 자신이 원하는 정보는 한 줄도 없었다.
서류를 제자리에 내려놓은 혁무천은 다른 책을 집어 들었다.
반시진 째.
혁무천이 서류집을 스무 권쯤 봤을 때 십삼고로 한 사람이 들어왔다.
작은 키에 마른 몸매, 평범한 인상, 나이는 삼십 대 중반쯤.
그를 본 무사가 예를 취했다.
“오셨습니까.”
“응, 찾아볼 것이 있어서.”
그는 동행한 무사가 없었다. 게다가 감시무사가 친근한 척하는 것으로 봐서 내부의 인물인 듯했다.
그는 혁무천을 힐끔 보고는 혁무천의 반대쪽에 있는 서류를 뒤적였다.
자주 서류를 조사해본 듯 손길이 능숙했다. 일각도 되지 않아서 수십 권이 그의 손길을 거쳐 갔다.
그 모습을 보고 혁무천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하나 물어봐도 되겠소?”
장한이 고개를 돌렸다. 혁무천을 본 그의 눈이 커졌다.
“어? 그대는……?”
혁무천을 알아본 듯했다.
혁무천도 그러려니 했다.
장한이 내부 인물이라면 정보를 취급하는 사람 아닌가. 최근 철혈마련 내에서 이런저런 일에 엮인 혁무천을 몰라볼 리 없었다.
“알아볼 게 있어서 왔소. 그런데 막상 찾으려니 쉽지 않군요,”
“뭘 찾으려는데……?”
경계하는 표정. 소심한 성격인 듯했다.
“혹시 백 년 전후의 이야기가 적혀있는 서류는 없소? 백 년 전에 작성했다는 게 아니라, 그 당시의 이야기가 적힌 것 말이오.”
장한이 눈알을 굴리더니 손을 들어서 한쪽을 가리켰다.
“저쪽에 있는 걸 찾아보쇼. 강호에서 떠도는 소문 같은 걸 수집해서 적어놓은 서류인데, 옛날이야기도 제법 있소.”
그가 가리키는 곳에는 제대로 철이 되지 않거나, 뜯어져서 제멋대로인 서류가 많았다.
책으로 따지면 백여 권 정도.
다 살펴보려면 한 시진은커녕 하루는 꼬박 걸릴 듯했다.
할 수 없이 그는 장한에게 다시 물었다.
“혹시 저 서류를 본 적 있소?”
“전에 심심풀이로 본 적이 있긴 한데…….”
“그럼 저기에 백 년 전 만인혈사에 대한 내용도 있소?”
장한의 눈이 동그래졌다.
“만인혈사? 마천제에 대한 것 말이오?”
유명하긴 유명한가보다. 곧바로 마천제 이름이 나오는 걸 보면.
“뭐, 그것도 알고 싶고…… 어떤 서류인지 알려줄 수 있소?”
“나도 시간이 없는데…….”
장한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 혁무천은 귀신도 부린다는 방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수고해주시면 이걸 드리겠소.”
혁무천이 품속 주머니에서 한 냥 정도 되는 은자를 꺼내 내밀자, 흐릿하던 장한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을 발했다.
“나도 시간이 남으면 노형의 일을 도와드리리다.”
“그렇다면야 뭐…….”
장한은 슬그머니 손을 뻗어서 혁무천 손바닥 위에 있는 은자를 집었다.
집을 때는 굼벵이처럼 느렸지만 품속에 집어넣을 때는 번개처럼 빨랐다.
“험, 그럼 어디 보자…….”
장한은 서류더미 앞으로 가더니 겉만 보고 옆으로 하나 둘 밀어냈다.
“이건 아니고…… 이것도 아니고…… 이건 약간 적혀 있는 거고…….”
그러면서 내용이 조금이라도 적혀 있는 것은 혁무천이 볼 수 있도록 따로 뺐다.
정말 일 하나는 확실한 자였다.
혁무천은 장한이 빼놓은 서류만 살펴보았다.
다른 서류에도 그가 원하는 내용이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어차피 그것까지 다 살펴볼 시간이 없는 이상 포기하는 게 나았다.
먼지 풀풀 날리는 서류가 한 무더기 쌓일 때쯤, 혁무천이 서류 하나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열 장 정도밖에 안 되는 얇은 서류철이었다.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종이가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다.
접힌 부분은 닳은 곳도 있어서 몇몇 글자는 읽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사람들은 속고 있다. 마천제는 승천한 것이 아니다. 그를 따르던 대마천의 수뇌부에게 당해서 어딘가에 갇혀…….]
[대지진이 일어난 그날 이후…… 대마천 내부에서 피비린내 나는 숙청이 시작되었다. 마천제를 제거하고 대마천의 권력을 거머쥔 자들이 마천제를 따르던 간부들을 하나 둘 제거하기 시작…….]
[마도가 마운평 혈사 이후 정파를 완전히 제압하는데 삼십 년이나 걸린 것도 그 때문…….]
[놈들이 내 입을 막기 위해서 자객을 보냈다. 내 친구들은 이미 당한 듯하다. 그들의 눈을 언제까지나 피할 수 있을지…….]
“그거, 헛소문이오. 그와 비슷한 소문만 모아도 백 개는 될 거요.”
장한이 혁무천을 힐끗 보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는 두어 개의 서류를 집어서 혁무천에게 건넸다.
“이것도 비슷한 소문을 적어 놓은 거요. 뭐 첩보를 수집하는 사람은 뭐든 기록해 두어야 하니까.”
혁무천은 장한이 건네준 서류들도 읽어보았다.
개중에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문도 있었다.
[마천제는 여자보다 남자를 좋아한다. 그래서 혼인을 하지 않고 잘 생기거나 정력이 좋은 남자들을 밤에 은밀히 방으로 불러들여서…….]
‘미친놈들!’
혁무천은 어이가 없었다.
심지어……
[마천제는 본래 인간이 아니었다. 지옥에서 위선에 가득 찬 인간세상을 쓸어버리라고 염왕이 보낸…….]
혁무천이 염왕의 사자라는 이야기도 적혀 있었다.
하지만 혁무천은 처음에 봤던 서류의 내용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소문이라고 하기에는 이야기가 제법 구체적이었다.
더구나 그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귀령자가 왜 빙천동에서 그렇게 죽어 있었는지 설명이 되었다.
그런데 왜 그러한 소문이 퍼지지 않았을까.
‘그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오대마종과 천붕십이마 중 몇이 나를 배신했다는 건데…….’
그때 장한이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이것도 한번 보쇼. 나도 못 본 것 같은데, 재미있는 내용이 있구려.”
먼지가 수북한 서류였다. 달랑 두 장. 누렇다 못해 갈색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혁무천은 장한이 내민 서류를 받아서 읽어보았다.
[경인년 유월 팔일.
죽어가던 노인에게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음.
만인혈사는 경덕진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함. 누군가가 정파의 명숙들에게 정보를 줘서 경덕진에 있는 어느 일가족을 죽이게 만들었다고 함.
그 당시 혈겁을 당한 가족은 광천마 혁진학의 혈육이었는데, 놀랍게도 그 정보의 발원지가 바로 사천성 촉산에 있는 광천곡이었다고 함.
참고로 광천곡은 혁진학이 살던 곳임.]
뭐지?
혁무천은 그 서류의 내용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심장이 두근거린단 말인가.
설마…….
광천곡의 누군가가 조부님을 해치려고 정보를 흘렸던 건가?
그 당시, 자신의 가족이 경덕진에 사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심지어 조부님도 그 사건이 벌어지기 한 달 전에야 알았다고 했다.
조부님의 최측근이 아니면 알지 못하는 사실이 어떻게 정파에 흘러들어갔을까. 그것도 일제히.
‘광천곡의 간부 중 누군가가 정보를 고의로 흘렸단 말인데…….’
광천곡에는 자신이 후계자가 되는 걸 싫어하는 간부들이 몇 있었다.
그자들이라면 아버지가 돌아가는 걸 바라지 않을 터. 그런 일을 얼마든지 벌일 수 있었으리라.
그때 문득, 어떤 생각이 뇌리를 때렸다.
혁무천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파르르 떨렸다.
‘아냐, 그럴 리 없어. 그건 아닐 거야, 절대로…….’
장한은 그 많던 서류를 이각 만에 모두 살펴보았다.
“다 본 것 같수.”
때맞춰서 혁무천도 보던 서류를 내려놓았다.
“귀하가 찾는 건 뭐요? 시간이 조금 남은 것 같으니 약속대로 도와주겠소.”
“내가 찾는 건 작년 초겨울 경의 첩보에 관련된 거요.”
“오래된 것은 아니군. 어떤 내용을 찾으면 되는 거요?”
“백마궁에서 소궁주 금가휘와 암마령주 시우가 함께 움직인 적이 있소. 그와 관련된 내용을 찾고 있소.”
우연도 이런 우연이 있나.
당사자를 옆에 두고 그와 관련된 서류를 찾다니.
혁무천은 장한을 바라보았다.
장한이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혹시……?
장한이 혁무천의 눈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때 그들에게 쫓기던 자들이 있었소. 그 중 몇 사람의 인상착의가 최근 본 련에 들어온 사람과 일치해서 말이오.”
-당신과 당신 친구들 말이지.
마저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걸 꾹 참고 있다는 표정.
인상은 평범한 자가 속에 능구렁이 열 마리는 숨겨 놓은 것 같다.
‘어쩌면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 이곳에 온 것인지도 모르겠군.’
사실이 그랬다.
장한, 마호당주 원도민은 무천이 철혈집정고에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온 터였다.
“언제 알았지?”
혁무천은 원도민의 짐작을 부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철혈마련에 들어올 때부터 각오했던 바였다. 장대산을 들어오게 한 것도 마찬가지.
공격받을 상황에 처하면 정면 돌파로 뚫고나갈 작정이었다.
“귀하가 비무대회에 참가를 신청한 이후요. 아,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아직은 확실치 않아서 보고를 올리지 않았소.”
확실치 않아서 보고를 올리지 않았다? 철혈마련처럼 거대 세력에서?
그게 아니겠지. 아마 다른 이유가 있겠지.
“나에게 원하는 거라도 있나?”
혁무천이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원도민이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나오시니 솔직히 말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