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천화 4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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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19회 작성일소설 읽기 : 귀환천화 42화
42화
스르릉.
한상귀는 도를 도집에 넣으며 콧등을 두어 번 씰룩였다.
“놈의 말이 사실이었어.”
건곤붕산도의 첫 번째 초식이라는 도초를 한 시진에 걸쳐 분석해보았다.
무천이란 놈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사실인지 알아야 이후의 상황에 적절히 대처할 수 있으니까
결과는?
최소한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놈이 알려준 일 초식의 구결은 상승 도법이었다.
자신이 익힌 도법도 절정의 상승 도법이었지만, 놈이 알려준 도초가 그보다 한 수 위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고민이었다.
강제로 뺏을 수 없는 이상 나머지 도법을 얻으려면 놈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그럴 경우 련주를 속이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이다.
련주를 속인다는 것은 자칫 죽음과 직결될 수도 있는 일.
욕심을 내기에는 부담이 너무 컸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야.’
그렇다. 도법도 얻고 죽음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방법도 간단하다.
자신이 철혈마련을 떠나면 된다.
적절한 이유를 댈 수만 있다면 련주가 순순히 보내줄지도 모른다.
‘순순히 보내주지 않으면 몰래 떠나면 돼.’
멀리 떨어진 곳에 가서 일파를 일구는 것도 나름 괜찮을 듯하다.
잘하면 과거의 하북제일가, 팽가처럼 일세를 풍미할 수 있는 세가를 일굴 수도 있다.
무사라면 누구나 그런 미래를 꿈꾸지 않던가.
‘그래, 철혈마련이 대단한 곳이긴 하지만, 이곳의 장로로만 지내다가 죽을 순 없지.’
자신이라 해서 일대종사(一代宗師)가 되지 말란 법은 없잖아?
그가 막 결심을 굳혔을 때 밖에서 힘이 실린 목소리가 들렸다.
“장로님, 회의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철컥.
세 치 정도 남은 도신을 세차게 집어넣은 그는 방을 나섰다.
석양이 서산에 걸쳐서 하늘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마치 다가올 미래를 예언이라도 하듯.
***
그날 오전에는 바람이 몹시 불어댔다.
하늘은 구름이 잔뜩 끼어서 언제 비가 와도 이상하지 않은 날씨였다.
하지만 대연무장 우측에 있는 건물 앞에 모여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날씨를 아랑곳 하지 않고 뜨거운 열기를 뿜어냈다.
비무대회 참가신청이 시작된 것이다.
철혈마련에서는 모두 두 차례에 걸쳐 쭉정이들부터 골라냈다.
그저 운이 좋기만 바라고 이름이나 알려보기 위해 나선 자들이 많았다.
최소 칠 할은 그런 자들이라고 봐야 했다.
골라내지 않으면 한 달 내내 비무대회를 진행해야만 할 것이다.
“불합격!”
“합격!”
“불합격!”
“불합격!”
“너 이 자식! 뭐하는 거야? 불합격!”
“오! 제법인데? 합격!”
건물 안에서 합격과 불합격을 알리는 소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들려왔다.
“한번만 더 하게 해주십시오, 심판관님!”
“왜 나에게는 남들보다 더 굵은 나무를 준 거요! 인정할 수 없소!”
참가자들이 사정하는 소리와 불만에 찬 목소리도 양념처럼 섞여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같은 과정을 거치는 것은 아니었다.
마도세력에서 추천을 받은 청년들은 그 기본심사를 거치지 않고도 참가할 수 있었다.
그들은 멀리서 여유를 부리며 선별 과정을 지켜보았다.
사공곽, 금가휘, 사진효 등도 그러한 자들 속에 있었다.
“그자도 참가할까?”
사공곽이 참가신청자들 쪽을 보며 말했다.
사진효가 반문하듯 답했다.
“참가하려는 게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여기 왔겠소?”
금가휘는 그에 대해 다른 생각이 있었지만 말을 아꼈다.
대신 눈빛을 반짝이며 참가자들을 쳐다보던 사공미미가 앵두 같은 입술을 열었다.
“사 공자가 그와 함께 들어왔다던데, 사실인가요?”
사진효의 표정이 곧바로 환해졌다.
“그렇소, 사공 소저.”
“그럼 그 사람에 대해서 잘 아시겠네요?”
“만난 것은 하루밖에 안 되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들보다는 잘 알 거요. 뭘 알고 싶소, 소저?”
“그가 어떤 여자를 좋아하는지 알아요?”
“그건…….”
생각지 못한 질문에 사진효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잘 모르시나 보군요.”
사공미미는 더 상대할 이유가 없다는 듯 미련을 두지 않고 시선을 돌렸다.
그제야 사진효는 사공미미가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이제 보니 이 계집이 그놈을 좋아하나 보군.’
이해 못할 것도 없었다. 그놈은 자신이 얼굴 가죽을 벗기고 싶을 정도로 잘 생겼으니까.
하지만 남자는 얼굴이 전부가 아니었다.
‘흥! 아마 밤일은 내가 그깟 놈보다 나을걸?’
그도 사공미미에 대한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스무 살이 되기 전부터 밤에 남자들을 방으로 끌어들였다고 했다.
심지어 잘생기고 몸이 좋은 젊은 남자를 보면 그녀가 직접 밤에 찾아간다는 말도 있었다.
그래서 그도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무천이라는 놈만은 못해도 그 역시 준수하다고 소문난 얼굴이었다.
‘찾아오면 확실하게 죽여주겠어.’
사진효가 엉뚱한 욕심을 부리고 있을 때, 문인여진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사진효의 성격을 바로 알아보았다. 그의 내면에 얼마나 독한 심성과 음욕이 쌓여 있는지도.
먼저 알아본 만큼 이용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듯했다.
‘그래, 사공미미. 너에게는 저런 자가 어울려.’
***
사람들의 시선이 대연무장 쪽으로 몰려 있던 그 시각, 객당의 마당에서 사소한 다툼이 벌어졌다.
방 안에 있던 혁무천은 다투는 소리를 듣고 눈을 크게 떴다.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 그가 놀란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너는 눈이 얼마나 커서? 눈 크다고 잘 보이는 줄 알아? 발랑 까진 콧속으로 빗물이 다 들어갈 놈이 어디서 시비야?”
“뭐? 이 쥐새끼 같은 놈이!”
“다른 일만 아니면 네놈 목에 구멍이 나도 진즉 났을 거다, 이놈아!”
“웃기는 소리! 누군 참고 싶어서 참는 줄 알아? 사제가 부탁하지만 않았으면 내가 네놈 눈알을 먼저 뽑아냈을 거다!”
혁무천은 창문을 열고 밖을 바라보았다.
객당 앞 마당에서 눈이 작은 자와 콧구멍이 훤히 보이는 코를 지닌 자가 티격태격 싸우고 있었다.
눈이 작은 자를 바라보던 혁무천이 실소를 지었다.
‘훗, 엽기천이 말한 자가 동대안이었군.’
그랬다.
눈이 작은 자는 구강에서 헤어진 동대안이었다.
도대체 왜 그가 이곳에 온 걸까.
그 와중에도 두 사람의 말싸움은 계속되었다.
신기한 것은 모욕적인 말을 퍼부으면서도 손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 모습을 실실 웃으며 바라보았다.
그들이 보기에는 두 놈 다 정말 웃기는 놈들이 아닐 수 없었다.
“사형!”
누군가가 달려오며 소리쳤다.
스물두세 살쯤?
얼굴이 곱상한 자였다.
색 바랜 청의를 입고 등에 검을 매고 있었는데, 키가 제법 컸다.
그가 나타나자, 동대안과 다투고 있던 자의 태도가 갑자기 변했다.
당황한 표정을 지은 그가 두 손을 흔들며 변명했다.
“사제, 내가 먼저 싸움을 건 것 아니야. 정말이야.”
“제가 뭐라고 했어요? 이곳에서는 함부로 싸우면 안 된다고 했죠?”
“정말이라니까? 저자가 먼저 내 코를 보고 비웃었단 말이야.”
“좀 참았어야죠. 사문의 숙원을 이루기 위해서 왔는데, 그 정도도 못 참아요?”
사형이란 자는 자라처럼 목을 쏙 집어넣고 눈치만 봤다.
동대안도 더 이상 일이 커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저 젊은 친구를 봐서 나도 참겠어. 이제 그만하지.”
사형이란 자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동대안을 흘겨보았다.
동대안마저 물러서자 자신만 못된 사람이 된 듯했다.
‘눈알이나 아니나 콩만 한 놈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이야.’
‘진짜 돼지코처럼 생겼네.’
동대안은 그 말을 속으로만 삼켰다.
무심코 그 말을 내뱉었다가 소란이 벌어지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때 자주 들어본 목소리가 들렸다.
“동 형, 거기서 뭐하는 거요?”
동대안이 휘둥그레진 눈을 돌려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다.
커져봐야 거기서 거기였지만.
“어? 무천?”
“끝났으면 안으로 들어오시오.”
동대안이 환하게 웃으며 혁무천의 방을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멀뚱히 서 있던 사형제 두 사람도 혁무천의 방을 바라보았다.
그 중 사제인 청년의 눈이 이채를 발했다.
“강 사형.”
“어?”
“우리도 저 사람에게 가요.”
“뭐? 왜?”
“이건 순전히 감인데, 저 사람이라면 우리에게 많은 도움이 될 거 같아요.”
사형이라 불린 강탁은 동대안이 싫어서 거부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제의 감은 지금까지 한 번도 잘못된 판단을 내린 적이 없었다.
그 감 덕분에 목숨을 구한 적이 어디 한두 번이던가.
“정말 그럴 것 같아?”
“예, 저 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니에요.”
“보통 사람이 아니면?”
“그건 저도 모르겠어요. 이상하게 그 이상은 저도 감이 잡히지 않아요.”
강탁은 놀란 표정으로 자신의 사제를 바라보았다.
사제가 그렇게 말할 정도라면 정말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좋다. 그럼 가보자.”
혁무천은 먼저 궁금한 것부터 물어보았다.
“대체 여긴 왜 온 거요?”
“심심해서.”
동대안다운 대답이었다.
“설마 강동일화라도 얻을 수 있을까 해서 온 거요?”
“나는 얼굴만 예쁜 여자는 싫네. 여자란 자고로 눈이 커야 해.”
“…….”
예상치 못한 대답에 혁무천은 말문이 막혔다.
한편으로는 동대안의 마음이 이해되었다.
눈 때문에 마음고생이 오죽 심했으면 눈이 큰 여자를 원할까.
“그럼 정말 심심해서 온 거요?”
“뭐 대산이 한 말도 있고…….”
“대산이? 대산이 뭐라고 했는데……?”
“할아버지가 죽기 전에 뭘 찾으라고 했는데, 세 개로 나누어진 그 물건 중 하나가 여기 철혈마련에 있다고 하더군.”
“대산은 지금 어디 있소?”
“이십 리쯤 떨어진 마을에. 덩치 큰 모습이 특이해서 백마궁 놈들이 알아볼지 모르거든. 그래서 숨어 있으라고 했네.”
혁무천은 피식, 실소를 지었다.
특이한 것만 따지면 동대안도 대산에게 뒤지지 않는다.
저 작은 눈을 못 알아볼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나마 다행이라면 대산과는 처지가 다르다는 것이다.
대산은 백마궁의 주요인물 중 많은 사람이 얼굴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동대안은 아는 사람이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적었다.
‘그런데 찾으려는 게 뭐기에 철혈마련에 있다는 거지?’
그때 동대안이 눈치를 보며 물어보았다.
“은설은 어디 있나? 함께 안 왔어?”
혁무천의 얼굴이 얼음처럼 차갑게 굳어졌다.
“내가 이곳에 온 건 은설을 찾기 위해서요.”
동대안의 눈이 구슬처럼 동그래졌다.
“뭐? 왜 은설을 이곳에서 찾아?”
“며칠 전에…….”
혁무천은 간략하게 지난 상황을 말해주었다.
은설이 바다에 뛰어들었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동대안의 얼굴도 석고처럼 굳어졌다.
“그 개새끼들이 설마 은설을 어떻게 한 건……?”
“나도 그에 대해 걱정이 많았는데, 다행히 그건 아닌 것 같소.”
“그걸 어떻게 믿어? 도적 같은 놈들이 은설처럼 예쁜 아이를 그냥 놔두면 그게 이상…….”
침을 튀겨가며 씩씩거리던 동대안이 슬며시 말꼬리를 끌었다. 그러고는 혁무천의 표정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뭐, 아무튼 예쁜 여자가 앞에 있으면 남자들은 다 늑대가 되는 법이야. 친구고 뭐고 다 소용없어.”
“어쨌든 지금은 살아 있기만 바랄 뿐이오.”
“그래, 살아 있어야지. 살아 있을 거야.”
“살아 있어야 하오. 천하를 위해서라도.”
동대안은 어깨를 후드득 떨었다.
서리 낀 얼음송곳이 등골을 타고 쑤셔 박히는 듯했다.
‘지미, 심장이 얼어붙는 줄 알았네.’
똑똑.
혁무천과 동대안이 잠시 대화를 멈추었을 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뒤이어 공손한 목소리가 들렸다.
“노형, 잠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