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천화 4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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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30회 작성일소설 읽기 : 귀환천화 41화
41화
혁무천이 태연히 말했다.
“이봐, 여자. 그대는 아무 남자에게나 그렇게 웃으며 말하나?”
사공미미의 눈초리에 옅은 주름이 파였다. 입가에 떠오른 미소도 더욱 짙어졌다.
“아무 남자에게나 하지는 않아요. 제 마음에 드는 남자에게만 그렇게 말하죠.”
“지나치게 솔직하군.”
“자신의 마음을 속이고 얌전만 빼는 것보다는 솔직한 게 좋지 않나요?”
은설도 솔직한 면이 있었다.
그 때문에 가끔 당황하기도 했었다.
자신도 좀 더 솔직하게 말했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면 은설이 자신을 놔두고 그들을 따라가지는 않았을 텐데…….
“하긴 솔직해야 할 때는 솔직한 게 좋지.”
“호호호호, 역시 통하는 게 있네요.”
“착각하진 마. 그렇다고 해서 그대가 마음에 든다는 건 아니니까.”
“보아하니 아직 혼인을 하지는 않으신 것 같은데, 혹시 좋아하는 여자 있나요?”
“물론 있지.”
혁무천은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사공미미는 실망하지 않았다.
저런 남자에게 여자가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 아니야?
“어떤 분인가요?”
“아주 예쁜 여자.”
“그런데 왜 함께 안 오셨어요?”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나도 모르거든.”
뜻밖의 대답에 사공미미가 커진 눈을 깜박거렸다.
멍청하니 구경하던 사공곽과 여인도 커진 눈으로 혁무천을 바라보았다.
반면 금가휘는 눈을 좁히고 이마를 찌푸렸다.
그는 혁무천이 말하는 여자가 누군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여자라고 하기에는 조금 어린 그 소녀를 말하는 것이겠지.
‘설아라고 했던가?’
그런데 그녀가 어디로 갔기에 행방을 모르는 걸까.
혹시 정말로 은석추를 구해간 자가 저자 아닐까?
사실이라면 의문이 하나 더 늘어난다.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간 후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그때 찾아내기만 했어도…….’
그도 암마령주 시우와 함께 배를 빌려서 바다로 나갔다.
열흘 넘도록 수십 개의 섬을 뒤져보았다.
그러나 자신들이 찾던 자들이 모습을 드러낸 곳은 주산도의 어촌이 마지막.
하늘로 솟았는지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는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결국 보름 만에 수색을 중단하고 영파로 돌아왔다.
그런데 오늘, 그가 나타났다.
느슨해졌던 마음을 차갑게 식힌 금가휘는 혁무천을 응시했다.
만약 저자가 비급을 찾아 떠난 자들 중 하나라면 반드시 알아내야 할 것이 있다.
백마궁의 후계자 자리를 굳히기 위해서라도.
‘가후가 신경 쓰여서 오지 않으려 했는데, 오길 잘했어.’
금가후는 그의 바로 아래 동생으로, 암암리에 그의 후계자 자리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번에 뜻밖의 소득을 얻어간다면 후계자 자리를 굳힐 수 있으리라.
“혹시 그녀와 영파에서 헤어지지 않았나?”
그가 슬쩍 건너짚어 물었다.
혁무천은 더 이상의 질문을 막았다.
“더 이상은 묻지 마. 지금은 대답해줄 기분이 아니니까.”
“그럼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지.”
그때 사공미미가 슬쩍 끼어들었다.
“무 공자, 그 여자 분을 찾을 때까지 저와 사귀어보면 어때요?”
“생각 없어.”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말하세요.”
혁무천은 사공미미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은설과 너무 많이 달랐다.
그녀의 두 눈에서는 어떤 욕망이 들끓고 있었다. 너무 뜨거워서 자칫하면 데일지도 모를 그런 욕망의 불길이.
그래서 왠지 거부감이 일었다.
“너무 기대하지는 마.”
냉정하게 말한 그는 사공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동생 데리고 다니려면 고생 좀 하겠군.”
“…….”
사공곽은 또 말문이 막혔다.
아니라고 대답하자니 거짓말이고, 인정하자니 여동생에게 시달릴 것이 걱정되었다.
혁무천은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럼 다음에 또 보지.”
사공곽은 등을 보이며 걸어가는 혁무천을 노려보았다. 살짝 치켜뜬 눈에서 노기가 일렁거렸다.
하지만 곧 풀썩, 실소를 터트린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 사공곽이 말 몇 마디에 바보가 되다니, 문인 소저 앞에서 체면이 말이 아니구려.”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사공 공자가 잘못한 게 아니라 저 공자가 조금 특이한 거죠.”
조용히 서 있던 여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문을 열었다.
가느다랗게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무척 부드러웠다. 듣는 이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목소리.
미모를 따지면 사공미미보다 조금 떨어지지만, 그녀에게는 다른 장점이 많았다.
그녀의 말에 사공곽의 표정이 바로 풀어졌다.
사공미미는 다른 의미로 그녀의 말을 받아들였지만.
“언니 마음에는 안 들지 몰라도, 난 저 사람의 그런 점이 좋아.”
“그래? 그럼 잘해 봐.”
여인, 문인여진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녀는 혁무천의 눈에서 한시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가 한 말도 한마디 한마디 곱씹어 보았다.
그래서 혁무천이 사공미미에게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지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너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어. 그저 귀찮은 여자로 볼 뿐.’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오른 것도 그 사실을 눈치 챘기 때문이었다.
***
금가휘 일행과 헤어진 혁무천은 곧장 객방으로 돌아갔다.
머릿속에서 한 여인의 목소리가 낮게 울리고 있었다.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저 공자가 조금 특이한 거죠.”
기이한 목소리였다.
가늘고 부드러우면서도 긴 여운을 주는 목소리.
사공미미와 나누었던 모든 대화가 그 목소리에 의해 녹아버린 듯했다.
‘아여령, 그녀의 후예인가?’
혁무천은 그와 비슷한 목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그와 동갑내기였다.
아름다운 여인.
절세의 미녀는 아니지만 누구나 그녀를 아름답게 여겼다.
그녀는 부친의 뜻을 거역하고 그를 따랐다.
그를 사랑했기 때문에.
하지만 그는 그녀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복수가 우선이었으니까.
‘미안하다, 여령.’
문득 한쪽에 조용히 서 있던 여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생각해 보니 아여령의 눈매를 많이 닮은 듯했다.
“그 나이에 거의 팔성 경지까지 익힌 것 같던데…….”
남들에게는 그저 듣기 좋은 목소리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의 고행이 필요하다.
비전의 심법을 익혀야 하니까. 세 살부터 시작해서 변성기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그리고 변성기 이후 본격적인 소소선음공을 익힌다.
그 목소리는 바로 그 무공의 결정체였다.
본인의 목소리이면서도 음공이기도 한 것이다.
그 때문에 과거 정파에서는 소소선음공이 마공이 아님에도 괴이한 무공이라 하여 마공으로 치부했다.
‘언제 한번 물어봐야겠군.’
자신이 빙천동에 들어가고 난 이후 아여령이 어떻게 살았는지…….
방으로 들어가자 엽기천이 일어나서 맞이했다.
“어떠하던가?”
“장로원 쪽은 출입이 철저히 통제되고 있더군.”
“아마 비무대회가 끝날 때까지는 통제가 풀리지 않을 거네.”
“상관없어. 이미 만나봤으니까.”
엽기천이 눈을 부릅떴다.
“만났다고?”
“해도문에서 왔다고 하니까 만나주더군.”
담담한 혁무천의 말에 엽기천은 어이가 없었다.
다른 곳도 아닌 철혈마련의 내원에 들어가면서 거짓말을 하다니.
“그러다 들키면 어떡하려고…….”
“그거야 그때 가서 고민하면 될 일이지.
“한 장로가 뭐라고 하던가?”
잘못 되면 꿈을 펼치기는커녕 목숨을 내놓아야 할지 모른다. 혁무천이야 떠나면 그만이지만.
“자신이 아는 대로 말해주더군.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해 보면 알겠지만.”
“그가 순순히 말해줬다고?”
엽기천은 정말 놀란 듯 눈이 한껏 커졌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지. 얻고 싶은 게 있는 이상은.”
“으음, 그렇다면 다행이긴 한데…….”
“걱정 되면 여기서 각자 갈 길로 가지.”
“자네를 못 믿어서가 아니네. 상대가 철혈마련이어서 그런 것이지.”
“당신은 나와 상관없이 당신 계획대로 밀고 나가. 그럼 엉뚱한 일이 터져도 별다른 피해는 없을 거야.”
“알았네. 아, 자네가 나간 사이 수상한 자가 우리 쪽 객당에 새로 들어왔네.”
혁무천이 한상귀를 만나러 간 사이 엽기천은 객당에 있는 인물들의 면면을 조사해보았다.
그들 중 누가 자신의 적수가 될지 알 수 없으니까.
“그래?”
“매우 특이한 자였네.”
특이하다고?
“몸이 빼빼 말랐는데, 눈이 꼭 쥐새끼처럼 작더군.”
빼빼 마른 몸에 눈이 작아?
혁무천은 그 말에 별 감흥이 일지 않았다.
아무리 작다한들 동대안의 눈보다 더 작을까?
“그자 외에는?”
“아직은 특별히 눈에 띄는 자가 없네.”
혁무천은 그러려니 하며 고개만 주억거렸다.
주요 세력의 청년고수들은 영빈각에 방을 배정 받았다.
객당에 있는 자들은 대부분 중소문파 소속이거나 개별적으로 찾아온 자들.
엽기천의 신경을 건드릴 만한 자가 몇 없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비무대회 참가신청을 내일부터 받는다고 했던가?”
“맞네. 자넨 어떻게 할 건가? 참가할 건가?”
본래는 참가할 마음이 없었다. 그럴 기분도 아니었고.
그런데 생각을 달리 먹었다.
은설이 살아 있다면 자신을 찾을지 모른다. 어쩌면 섬으로 찾아갈 수도 있고.
비무대회에 나가 자신이 섬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살아 있다면, 육지에 있다면 자신에 대한 소문을 들을지도 모르니까.
“상황 봐서.”
***
“그자가 장로원의 한상귀 장로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장로원을 나와서 내원을 벗어난 이후 사도맹의 사공곽과 백마궁의 금가휘를 만났습니다.”
자경산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우문소소가 이마를 살짝 찌푸렸다.
“사공곽과 금가휘를?”
“예, 공녀. 특히 금가휘를 잘 아는 듯했습니다.”
“그럼 사공미미와 문인여진도 만났겠네?”
자경산의 표정이 미미한 변화를 보였다.
그는 그녀들에 대해 말 하고 싶지 않았다. 특히 문인여진에 대한 이야기는.
그러나 질문이 나온 이상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렇습니다.”
“사공미미가 꼬리를 쳤겠군.”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천박한 년.”
우문소소의 입에서 상스런 욕이 튀어나왔다.
자경산은 쓴웃음을 옅게 베어 물었다.
누구보다 우문소소를 잘 아는 그였다. 아마 이 아름다운 여인은 사공미미를 찢어죽이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자신이 가져야 할 물건에 흠이 났다 생각하고.
“문인여진은?”
“그녀는 무천과 아무런 말도 나누지 않았습니다.”
“그래?”
그제야 우문소소의 표정이 풀어졌다.
그녀는 꼬리를 쳐대는 사공미미보다 조용하게 구경만 한 문인여진이 더 신경 쓰였다.
얼굴이나 몸매는 사공미미가 더 아름다웠다. 문인여진은 예쁘다기보다 귀엽게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남자들이 그녀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이상하게도 문인여진 쪽을 더 신경 썼다.
바라보는 눈빛도 달랐다.
사공미미를 보는 남자들의 눈빛은 대부분 음욕으로 물들어 있었다. 반면 문인여진을 바라볼 때는 단순한 육체적 욕망보다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이 더 강한 눈빛이었다.
그래서 의문이었다.
왜 남자들은 사공미미보다 문인여진을 더 사랑하고 싶어 할까.
귀엽게 보여서?
단순히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무천이 말을 걸긴 했어?”
“아닙니다. 무천이란 자도 문인 소저에게 말을 건네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함께 있는 건 아니겠지?”
“무천은 그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눈 후 객당으로 갔습니다.”
우문소소의 입가에 다시 싱긋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자신이 찍은 남자의 행동에 만족했다.
사공미미와 문인여진처럼 아름다운 여자들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을 남자가 몇이나 될까?
아마 백 명 중 하나도 안 될 것이다.
“그도 비무대회에 참가할까?”
“내일부터 참가신청을 받으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잘 살펴봐. 그리고 참가하면 나에게 알려줘.”
“예, 공녀.”
고개를 숙인 자경산의 눈에서 한광이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