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천화 4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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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62회 작성일소설 읽기 : 귀환천화 40화
40화
경비무사도 뭔가 이상함을 눈치 챈 듯했다.
그런데 말투로 봐서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허락이 없어도 문을 열고 뛰어 들어오는 게 당연하다 할 수 있을 정도의 폭음이었거늘.
그 사실이 한상귀를 더욱 짓눌렀다.
‘혹시 소리와 기운을 저놈이 차단하기라도……?’
절정의 기운이 실린 강력한 충돌의 여파를 인위적으로 차단한 게 사실이라면, 자신의 경지를 훌쩍 넘어선 고수라는 뜻.
수하들을 불러들여봐야 득 될 게 없다.
그리고 아직 들어야 할 말이 남아 있었다.
“별 일 아니다. 시킬 일 있으면 부를 것이니 물러가 있어라.”
결국 한상귀는 수하들을 불러들이지 않았다.
그러고는 혁무천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말해봐라. 뭘 듣고 싶으냐?”
마침내 한상귀가 유혹의 구덩이에 빠졌다.
혁무천은 보일 듯 말 듯 가느다란 미소를 지었다. 입가의 미소와 달리 눈빛은 한겨울 하늘처럼 차가왔지만.
“바다에서 그녀의 옷을 발견했어. 어떻게 된 거지?”
그거라면 한상귀도 얼마든지 말해줄 수 있었다.
“그 계집…… 아니, 여자 아이는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졌다. 찾으려고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한참이 지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영파로 돌아왔지.”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져?
혁무천의 눈에서 으스스한 한기가 피어났다.
“육지를 십 리도 넘게 남겨놓고 바다에 스스로 몸을 던졌다면…… 죽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봐야겠군.”
아직은 바닷물이 차다. 게다가 헤엄쳐 건너기에는 육지가 너무 멀었다.
그런데 한상귀가 말했다.
“십 리는 무슨……? 아마 오 리도 되지 않을 거다.”
오 리가 안 된다고?
그럼 이야기가 달라진다.
무공은 비록 이류 수준이지만, 내공만큼은 자신이 도와주어서 일류고수 못지않은 그녀다.
헤엄을 칠 줄 안다면 오 리를 건너가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왜 그녀가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졌지? 누가 몹쓸 짓이라도……?”
그 말을 하는 혁무천의 눈에서 지옥의 귀화 같은 불길이 일렁거렸다.
그 눈빛을 본 순간, 한상귀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다급히 말이 튀어나왔다.
“아니다. 아무도, 아무도 건들지 않았다. 우리가 피곤해서 잠시 방심한 사이, 그 여자 아이가 냅다 바다에 뛰어들었을 뿐!”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은설이 스스로 결정해서 바다에 뛰어들었다는 뜻.
다행히도 치욕적인 일을 당하지는 않은 듯했다.
그런데 왜 스스로 몸을 던진 걸까?
혁무천은 은설에 대한 걱정으로 입안이 바짝 말랐다.
그때 한상귀가 몇 마디 말을 덧붙였다.
“어쩌면 어부에게 구함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해도문에 말해두었다. 혹시 그 계집에 대한 소식을 들으면 잡아 놓으라고.”
제발 그랬으면!
혁무천의 가슴에서 희망의 불꽃이 되살아났다.
은설이 죽은 게 확실하면 한바탕 살풀이를 벌이려 했다. 자신의 생명선이 다할 때까지 모든 힘을 개방해서라도.
그럼 축제의 분위기인 철혈마련에 피비린내 지독한 혈풍이 불어댔을 것이다.
하지만 은설이 살아있을지 모른다면…… 아직은 때가 아니다.
철혈마련에서 먼저 찾아내기라도 하면 은설이 위험해질 수 있다.
‘일단 은설의 상황부터 알아내야겠군.’
살았든, 죽었든.
대가를 받아내는 것은 그 이후에 해도 늦지 않다.
마음을 정리한 혁무천은 그쯤에서 한발 물러섰다.
“당신 말이 사실이라는 게 확인되면 무공을 건네주겠어.”
“뭐야? 흥! 네 말을 어떻게 믿고 기다리란 말이냐?”
“그럼 나는? 내가 당신 말을 어떻게 믿고 무공부터 건네줘?”
“그거야…….”
“그리고 어차피 당신에겐 다른 선택도 없어.”
“이이이……!”
“약속은 반드시 지키지. 물론 오늘 일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을 것이고.”
한상귀는 자신이 혁무천의 계책에 넘어갔다는 걸 알고도 강하게 반발할 수 없었다.
반발하면 무공을 얻기는커녕 목숨마저 위험해질지 모르는 것이다.
“좋다, 그렇다면 내가 믿을 수 있도록 무공의 일부라도 알려줘라. 그래야 네가 정말 비전된 무공을 알고 있다는 걸 믿을 수 있지 않겠느냐?”
혁무천은 그의 제안을 순순히 받아주었다.
“그거야 어려울 것 없지.”
그는 과거 칼 한 자루를 들고 천하를 종횡했던 건곤도제의 비전도법, 건곤붕산도(乾坤崩山刀)의 구결 중 일부를 알려주었다.
한상귀는 구결 일부만 듣고도 상승의 도법 구결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챘다.
“누구의 도법인가?”
“건곤도제의 건곤붕산도 중 첫 번째 초식.”
“으으음…….”
경악한 한상귀의 입에서 침음이 절로 나왔다.
도를 익힌 그가 어찌 건곤도제라는 이름을 모를까.
한때 천하제일의 도가로 불렸던 하북의 팽가조차 공경을 표했다는 도의 대가가 바로 건곤도제였다.
“정말…… 건곤도제의 도법을 알려주겠단 말인가?”
“당신이 그녀의 행방을 찾는 일에 협조해준다면 나머지 여섯 초식의 구결도 알려주지.”
“…….”
“참고로 말하자면, 나는 그 도법을 익히지 않았어. 구결과 도초의 흐름만 외웠을 뿐. 판단은 당신이 알아서 해.”
***
혁무천은 한상귀와 잠시 대화를 더 나눈 후 장로원을 나섰다.
경비무사를 따라 길을 되돌아가면서도 그의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은설이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졌다고 했다.
영리한 그녀가 죽으려고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살아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발걸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살아 있어야 한다, 설아야. 그러지 않으면 세상이 다시 피로 뒤덮일 테니까.’
그러다 문득, 들어올 때의 일이 떠오른 그는 고개를 돌려서 이층 건물을 바라보았다.
활짝 열렸던 창문이 닫혀 있었다.
자신을 집요하게 바라보던 아름다운 여인도 보이지 않았다.
‘누군지 몰라도 성깔 좀 있게 생겼던데…….’
잠시 후, 통제구역 경계선을 벗어나서 객당으로 돌아가던 혁무천의 눈빛이 싸늘하게 반짝였다.
저만치 앞에서 걸어오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남이녀. 그 중에 백마궁의 금가휘가 있었다.
‘저자도 왔군.’
금가휘 곁의 세 사람도 범상치 않아 보였다.
특히 두 여자는 미녀라는 호칭이 부족하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외모였다.
그들은 철혈마련 안에서도 당당하게 걷고, 대화를 나누며 웃어댔다.
금가휘에게 뒤질 것 없는 신분의 소유자들인 듯했다.
당금 마도의 젊은 고수들.
혁무천은 그들을 바라보며 냉소를 지었다.
‘만약 은설이 잘못되었기라도 하면 너도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거다, 금가휘.’
금가휘도 혁무천을 발견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응? 저자가 어떻게 여길……?’
은설이라는 소녀의 오빠이자, 풍양표국의 임시표사.
조홍의 손목을 부러뜨린 고수.
그리고 은석추를 구해간 것으로 의심되는 자.
설마 저자도 비무대회에 참석하려고 온 건가?
“금 공자, 아는 사람이에요?”
금가휘가 입을 닫은 채 한 곳만 바라보자, 바로 옆의 여인이 물었다.
“전에 만나본 적이 있소.”
다른 사람들도 대화를 멈추고 금가휘의 시선을 따라 눈을 돌렸다.
그 사이 거리가 십여 장으로 줄어들었다.
혁무천은 피하지 않았다.
금가휘가 이미 자신을 본 이상 피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오랜만이네. 언젠가 만났으면 했지만, 이곳에서 만날 줄은 생각도 못했군.”
금가휘가 먼저 말을 건넸다.
“어딘들 만나지 못할 곳이 있을까. 때로는 꾸며낸 이야기보다 더 거짓말 같은 일이 현실에서 벌어지곤 하지.”
“하하하, 자네 말이 많네.”
가볍게 웃음을 터트린 금가휘가 바로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때 이름도 모르고 헤어져서 서운했는데, 오늘은 알려줄 수 있겠지?”
“무천.”
“특이한 이름이군. 그런데 이곳에는 어쩐 일인가?”
“구경할 것이 많다고 해서.”
“설마 강동일화를 취하러 온 것은 아니겠지?”
“취하지 못할 것도 없지.”
“역시 대단한 배짱이야. 하지만 이번에는 뜻을 이루기가 어려울 거네.”
“그 말은 나를 이긴 후에 하도록.”
혁무천이 딱 잘라서 직설적으로 말하자, 금가휘의 입가에서 냉소가 피어났다.
“자신만만하군.”
“나도 소개시켜주게, 금 아우.”
갈색 무복을 멋들어지게 입고 청옥이 달린 영웅건을 쓴 청년이 말했다.
금가휘는 이해하기 쉽게 혁무천을 소개했다.
“조홍의 손목을 꺾은 친구입니다, 사공 형.”
“아! 자네가 전에 말한 그 임시표사?”
“예, 사공 형.”
갈색 무복의 청년이 혁무천을 바라보았다.
“나는 사도맹의 사공곽이라 하네.”
혁무천은 사도맹이라는 말에 멈칫했다. 그러나 워낙 표정 변화가 없어서 아무도 그 의미를 눈치 채지 못했다.
“금 아우에게 이야기 들었네. 앞으로 잘 지내보세.”
사공곽이 밝은 웃음을 지은 채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혁무천은 그 웃음에 속지 않았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눈동자 깊은 곳에는 일체의 웃음기가 없었다.
“잘 지내서 나쁠 건 없겠지.”
혁무천이 짧고 무뚝뚝하게 대꾸하자, 사공곽의 얼굴에서도 웃음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그 친구, 꽤 차갑군.”
“처음 만난 사람 앞에서 헤실헤실 웃기는 싫거든.”
“…….”
“호호호호, 말 몇 마디로 오빠를 당황하게 만들다니, 정말 마음에 쏙 드는 성격이네요.”
두 미녀 중 녹의 경장을 입은 여인이 낭랑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금가휘가 아는 척한 이후부터 혁무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얼굴의 반이 머리카락에 가려져 있긴 하나 남은 반쪽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렜다.
“저는 사공미미라고 해요. 여기 처음 만난 분을 보고 헤실헤실 웃은 이분이 제 오라버니죠.”
그녀는 사공곽의 여동생이었다.
사도맹의 소공녀.
다른 한 여인은 말도 꺼내지 못하고 혁무천을 바라보기만 했다.
조금 차갑게 느껴지는 분위기를 지닌 그녀는 혁무천에게 별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내심에서는 독한 결심이 싹트고 있었다.
‘잘 생긴 남자만 보면 꼬리를 치는 음탕한 년. 하지만 저 남자는 네 마음대로 되지 않을 거다. 내가 찍었거든. 절대 네 년의 치마폭 안에 들어가도록 놔두지 않을 거야.’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공미미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두 분이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렇게 여기 서서 시간을 보낼 수는 없잖아요? 어때요, 차라도 한 잔 하면서 좀 더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게.”
혁무천은 사공미미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차는 나중에 하지. 내가 좀 바쁘거든.”
그 말에 금가휘와 사공곽의 눈이 커졌다.
사공곽의 입에서는 ‘헉!’하며 헛바람을 집어삼키는 소리마저 났다.
‘저놈이 죽으려고 환장했나? 감히 지옥나찰의 청을 거절하다니.’ 그런 표정.
사공미미의 표정도 묘하게 틀어졌다. 눈초리가 가늘게 떨렸다.
강호의 그 어떤 남자도 자신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한 적이 없었다.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면 몽롱해진 눈으로 강아지처럼 꼬리를 흔들어댔다.
그런데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작자가 자신에게 난생 처음 겪는 경험을 선사하다니.
한편으로는 그래서 더 욕심이 났다.
오만한 말투, 남과 다른 태도.
단순히 잘생겼다기보다는 뭔가 신비함이 느껴지는 분위기.
정말 오랜만에 자신의 깊은 곳에서 불길을 이끌어내는 남자였다.
그녀는 화를 내는 대신 눈웃음치며 간드러지게 말했다.
“그럼 언제 가능한가요? 저는 언제든 상관없는데.”
혁무천이 사공미미의 청을 거절하는 걸 보고 긴장했던 남자들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공곽은 커진 눈이 잘게 떨리기까지 했다.
‘정말 저 여자가 내 동생 맞아?’
여동생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는 자신의 눈과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부친과 모친에게 이야기하면 자신만 미친놈 취급받을 것이다.
하지만 놀랄 일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