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천화 3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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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413회 작성일소설 읽기 : 귀환천화 39화
39화
장로원은 내원의 문을 통과한 후로도 한참을 들어가야 했다.
혁무천이 경비무사를 따라 삼십 장쯤 걸었을 때 어디선가 자신 쪽을 향한 시선이 느껴졌다.
그는 시선의 주인을 향해 시선을 자연스럽게 돌렸다.
우측의 건물 이층에서 여인이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매우 아름다운 여인.
하얀 바탕에 연분홍빛이 섞인 화려한 장의는 그녀를 복사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아니, 목단화처럼 붉게 느껴졌다.
‘너무 화려하군.’
그녀의 우측에는 시비로 보이는 여인이 공손히 서 있었고, 좌측에는 호위로 보이는 젊은 무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그가 움직이는 동선을 따라 이동했다.
단순히 밖을 바라는 게 아니었다.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는 서너 걸음 걸을 동안 그곳을 바라보고 고개를 다시 돌렸다.
여인은 혁무천이 고개를 돌리자, 가늘게 그어진 아미를 찌푸렸다.
바람을 쐬려고 창밖을 보다 그 남자를 발견했다.
마침 바람이 불어와서 그 남자의 머리칼을 뒤로 밀어냈다.
아름답게 느껴질 정도로 잘 생긴 얼굴이 순간적으로 드러났다.
비록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때 그 남자가 고개를 돌려서 자신을 쳐다보았다.
어둡지도 않으니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봤을 것이다. 그런데 표정 변화도 없었고, 바라보던 눈빛도 담담했다.
바라본 시간도 잠시뿐. 몇 걸음 걸으며 고개를 돌렸다.
보통 때라면 그러려니 하며 지나쳤을 것이다.
남자는 여자의 발바닥을 핥는 종자들일 뿐. 관심을 둘 이유가 없으니까.
하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상했다.
“경산, 저기 호경당 무사와 함께 걸어가는 자가 누군지 알아?”
좌측의 호위무사가 대답했다.
“모르는 자입니다, 공녀.”
“한번 알아봐, 누군지.”
호위무사, 자경산의 눈꺼풀이 살짝 위로 올라갔다.
삼십 전후의 나이, 칼날처럼 뻗은 검미와 얇은 입술.
준수하면서도 얼음장처럼 차갑게 느껴지는 인상을 지닌 그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모시는 공녀는 지금껏 어떤 남자에게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호위를 맡은 지 오 년. 그에게 이번과 같은 명령을 내린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감히 의문을 품지는 않았다.
“알겠습니다, 공녀.”
철혈마련의 장로원은 모두 네 채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었다.
건물 하나에 방이 십여 개. 기거하는 장로는 모두 서른여섯 명이나 되었다.
한상귀는 그 네 채의 건물 중 맨 좌측의 건물에서 기거했다.
혁무천은 경비무사와 함께 두 번의 검문을 더 거친 후 그 건물 앞에 도착했다.
“한 장로님,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영파에서 오셨다 합니다.”
대답은 잠시 후에 들려왔다.
“잠시 기다려라.”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리고 스물을 셀 시간쯤 지났을 때 방문이 열렸다.
오십 대 중반쯤 되는 초로인과 칠순의 청의노인이 방에서 나왔다.
푸른색과 녹색이 섞인 무복을 입은 초로인이 청의노인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좋은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허허허, 나머지 이야기는 나중에 하세.”
“예, 만 선배. 뜻은 충분히 알아들었으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허허허허, 고맙네.”
초로인의 말에 가볍게 웃은 노인은 혁무천 쪽을 못마땅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마치 중요한 일을 방해받아서 기분이 상하기라도 한 것처럼.
하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못하고 그곳을 떠났다.
그제야 초로인이 혁무천을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나를 찾아온 사람이 너냐?”
그가 바로 칼이라면 천하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든다는 절혼마도(絶魂魔刀) 한상귀였다.
“그렇습니다.”
“영파에서 왔다고?”
“예, 장로. 해도문에서 왔습니다.”
해도문이라는 말이 나온 후에야 한상귀가 관심을 보였다.
“처음 보는 놈 같은데…….”
“그럴 겁니다. 장로께서 오셨을 때는 밖에 있었으니까요.”
“그래?”
한상귀는 혁무천을 똑바로 바라본 후에야 눈빛이 달라졌다.
얼굴부터가 보통이 아닌 놈이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빛에서는 묘한 위험마저 느껴졌다.
“나를 왜 찾아왔느냐?”
“전할 말과 답을 받아야 할 말이 있습니다. 들어가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만.”
언뜻 들으면, 비밀리에 전할 말이 있다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다.
한상귀도 그렇게 생각했다.
마침 해도문주에게 시킨 일도 있고.
“알았다. 들어가자.”
한상귀는 혁무천을 다탁으로 안내했다.
“앉아라. 일단 차나 한잔하고 이야기를 나누자꾸나.”
혁무천은 거절하지 않고 의자에 앉았다.
곧 어려보이는 시비가 나와서 찻잔을 내려놓고 차를 따랐다.
은은한 다향이 찻잔에서 피어났다.
혁무천은 시비가 차를 따르는 동안 물끄러미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얼굴을 붉힌 시비가 그를 힐끔거리며 뒤로 물러서자 고개를 들었다.
“들어라. 용정만은 못해도 매우 귀한 차니라.”
한상귀는 서두르지 않고 차부터 권했다.
혁무천도 말없이 찻잔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속에서 묻고 싶은 말이 서로 튀어나가려고 아우성쳤다.
-무명도에 갔었지?
-당신이 그곳에서 은설을 끌고 나왔지?
-은설을 어떻게 했지?
아니, 질문이고 뭐고 목뼈를 으스러뜨리고 싶었다.
팔다리 한두 개 부러뜨려놓는 것도 괜찮을 듯했고.
‘아직은 아니야. 조금만, 조금만 더 참자.’
뜨거운 차를 입안에 머금은 그는 일단 마음부터 가라앉혔다.
달칵.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은 한상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 무슨 일이냐? 혹시 뭐라도 알아낸 것이 있다더냐?”
혁무천은 그 말을 듣고서야, 해도문주와 한상귀 사이에 정말로 비밀스런 뭔가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쩌면 한상귀가 해도문주에게 정보 수집을 부탁했을 수도 있었다.
정은맹에 대해서든, 그들이 갖고 사라진 정파무공에 대해서든.
천천히 잔을 내려놓은 혁무천은 먼저 미끼를 던졌다.
“정파에서 숨겨 놓았다는 무공을 찾고 싶으신 거요?”
“그야 물론…….”
대답하던 한상귀의 눈빛이 강렬하게 번뜩였다.
젊은 놈의 말투가 이상했다.
쳐다보는 눈빛도 해도문 따위의 무사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차갑고 무심한 눈빛에는 오랜 세월 닳고 닳은 자신조차 섬뜩함을 느끼게 하는 무엇이 있었다.
의자에 앉은 채 뒤로 죽 미끄러지듯 물러난 그가 일어서며 물었다.
“너…… 누구냐? 정말 해도문 놈이더냐?”
“해도문에서 온 것은 맞지만, 해도문의 무사는 아니오.”
“그럼 누구란 말이냐? 정체를 밝혀라.”
혁무천은 그때까지도 의자에 앉아 있었다.
두 손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있는 모습이 너무 태연해서 한상귀도 함부로 손을 쓰지 못했다.
“무천.”
“무천?”
“당신이 원하는 것을 줄 수도 있는 사람. 단, 몇 가지 묻는 말에 대답해줘야 하겠지만.”
“……!”
한상귀는 치켜뜬 눈으로 혁무천을 노려보았다.
두 눈에서 번갯불이 번쩍이는 듯했다.
그래봐야 혁무천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쳐다볼 것 없소. 분노를 참고 있는 사람이 당신만 있는 건 아니니까.”
“무슨 개소리냐?”
“나 역시 참고 있단 말이오. 당신의 목을 쳐버리고 싶은 걸.”
찰나, 혁무천의 두 눈 깊은 곳에서 섬광이 번쩍 빛을 발하고 사라졌다.
한상귀는 그 눈빛과 마주친 순간 꼼짝할 수가 없었다.
토끼가 호랑이의 눈과 마주쳤을 때처럼.
“네가 왜 나를……?”
의혹에 찬 한상귀의 목소리가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가늘게 떨렸다.
“무명도.”
“무명도? 그게 어딘데……?”
의아해하던 한상귀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단 한마디 단어였지만, 그 안에는 많은 것이 담겨져 있었다.
“설마…… 그 섬……?”
“그곳에 정말 여자 혼자 살고 있었을 거라 생각했소?”
“그럼 네가 그곳에 있었단 말……?”
“이제 왜 내가 당신을 죽이고 싶어 하는지 알겠소?”
한상귀는 입술을 찢어지도록 깨물었다.
새파랗게 젊은 놈이다. 평소라면 안중에도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 섬에서 살았던 놈이라는 것이다. 전설의 무공이 숨겨져 있는 그 섬에서.
더구나 저 태연함과 자신의 눈빛에도 눌리지 않는 태도는 또 뭔가.
‘위험한 놈이야.’
그러나 한상귀도 나름대로 노회한 마도의 고수였다.
자신이 있는 곳은 철혈마련의 장로원. 제 놈이 제 아무리 간덩이가 크다 해도 함부로 설치지는 못하리라.
잠깐 사이 마음을 진정시킨 그가 혁무천을 노려보며 말했다.
“어이가 없군. 태풍이 온다 해서 급히 섬을 떠났는데, 이제 보니 너를 보호하려는 거였어.”
세찬 바람은 잠시 불고 말았다. 태풍은 구경도 못했다.
결국 그 계집과 사공이 자신들을 섬에서 끌어내기 위해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바로 눈앞의 젊은 놈을 구하려고.
“바보 같은 결정이었지. 그녀는 그대들이 나를 찾도록 해야 했어.”
혁무천은 입술 끝을 비틀며 냉랭하게 말했다.
정말 바보였다, 은설은.
그 때문에 자신은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야 하지 않는가 말이다.
“그곳에서 살아났으면 조용히 숨어 지낼 것이지, 왜 나를 찾아온 거냐?”
한상귀는 완전히 마음을 안정시키고 평소의 오만함을 되찾았다.
안 그래도 얻은 게 없어서 련주에게 한소리 들은 터였다. 그 바람에 짜증이 잔뜩 났는데, 행운이 저절로 굴러 들어왔다.
저놈이라면 뭔가 알고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어리석은 놈! 역시 젊은 놈이라 만용을 부리는구나.’
하지만 행운과 불행은 한끝 차이였다.
“반드시 알아내야 할 것이 있거든.”
화아아악!
차갑게 말을 뱉는 혁무천의 전신에서 가공할 기운이 폭사했다.
한상귀도 나름대로 대비하고 있었다.
아니 여차하면 젊은 놈을 제압해서 강제로 입을 열 작정이었다.
“어디서 감히!”
두 손을 교차시킨 그는 기막을 형성해서 밀려드는 기운을 막았다.
젊은 놈이 강하면 얼마나 강하랴!
철혈마련의 장로인 자신보다 강하진 않으리라.
쿠궁!
둔중한 굉음.
한상귀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주춤주춤 물러났다.
얼굴이 창백해진 그는 얼마나 이를 악다물었는지 이가 부서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혁무천은 물러서는 한상귀를 쳐다보며 몸을 일으켰다.
일어선 그가 한상귀를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죽 미끄러지는 것처럼 느껴진 사이, 두 사람의 거리가 다섯 자로 줄어들었다.
“아마 말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하게 될 거야.”
혁무천이 두 손을 들어서 교차시키며 뻗었다.
투명한 구가 형성되더니 한상귀를 덮쳤다.
눈을 치켜뜬 한상귀도 다급히 손을 들어서 방어에 나섰다.
떠더덩!
또 다시 북소리가 울렸다.
찢어질 듯 떨리는 한상귀의 눈초리.
‘크읍!’
신음을 삼킨 그의 안색이 창백하게 탈색되었다.
그런데 기이한 일이었다. 절정고수에게 충격을 줄 정도의 충돌이었는데 흐트러진 물건은 아무 것도 없었다.
심지어 탁자 위의 찻잔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반쯤 남은 찻물이 파문을 일으켰을 뿐.
“이제 대답을 들을 때가 된 것 같군.”
“네놈이……!”
한상귀가 눈을 치켜뜨고 이를 갈았다.
혁무천이 그런 한상귀를 향해 두 번째 미끼를 던졌다.
“내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면 당신도 손해 보지는 않을 거다.”
“……?”
“정파에서 숨긴 무공을 찾으려고 섬에 갔던 것 아닌가?”
“무슨…… 말이냐?”
“무슨 말인지 모르지는 않을 거고, 내가 묻는 말에 제대로 답해주면 그 중 하나를 주지.”
하나를 준다고?
한상귀는 그 의미를 깨닫고 이마를 찌푸렸다.
“설마…… 나에게 그곳에 있던 무공을 알려주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당신이 거짓말만 하지 않으면.”
생각지 못한 말에 한상귀의 눈빛이 흔들렸다.
혁무천이 조금 더 흔들어댔다.
“그럼 아마 당신의 정체된 무공도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거다.”
“도대체 내 입에서 무슨 말을 듣고 싶은데…….”
그때였다.
방문 밖에서 장로원 경비무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장로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혹 저희에게 내리실 명령이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