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천화 7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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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19회 작성일소설 읽기 : 귀환천화 78화
78화
복우산 서쪽 끝자락의 깊은 계곡 안에는 아름드리나무로 가려진 제법 큰 장원이 있었다.
한때는 친왕의 별장이었던 곳으로, 지금은 중원의 삼대상단 중 하나인 낙양상단이 소유주였다.
평소에는 너무 조용해서 사람이 사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 안개가 짙게 낀 그날 오후 급보가 전해지면서 발칵 뒤집혔다.
장원의 중심 건물인 운정전도 폭발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심심곡이 철혈마련의 공격을 받았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맹주.”
상석에 앉아 있던 오십 대 중반의 중노인이 이를 악물고 전면을 노려보았다.
그가 바로 정은맹을 이끌고 있는 사마진웅이었다.
“현재 상황은?”
“첫 전서구 이후 연락이 두절된 걸로 봐서 심심곡을 포기하고 피신 중인 것 같습니다.”
“기재들은?”
“먼저 피신시켰다고 하는데, 아직은 정확한 상황을 모릅니다.”
마른 체구에 오십 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중년인이 침중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군사직을 맡고 있는 신기수사 이사명이었다.
“지원대는 보냈소?”
“팽조환 부맹주께서 우선적으로 적기주와 녹기주 무사 삼백을 데리고 출발했습니다. 대정원의 장로 세 분도 동행했습니다.”
“영천곡에도 이기를 보내서 만약의 상황에 대비하라 하시오.”
영천곡. 또 다른 기재 오십 명이 수련하고 있는 곳이다.
“그곳마저 공격을 받으면 본 맹의 꿈은 수십 년 뒤로 미루어질 거요.”
“알겠습니다, 맹주. 그리 명령을 내리겠습니다.”
이사명이 무거운 표정으로 대답하고 방을 나가자, 조용히 앉아 서있던 사마진웅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삼십 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자가 말없이 서 있었다. 그와 판박이처럼 비슷한 용모. 그의 장자인 사마신이었다.
“이제부터는 돌아설 수 없는 길을 가게 될 거다. 돌아서려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 할 수 있다만, 정말 끝까지 계획을 밀어붙일 거냐?”
“아버님께선 저들을 무너뜨릴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다고 보십니까?”
“기재를 지속적으로 키운다면 삼 년 안에 저들과 싸울 만한 힘을 키울 수 있을 것 같다만.”
옳은 말이다. 사마신도 그 의견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한 가지 문제만 없다면.
“저들은 정파가 힘을 키울 때까지 보고만 있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우리가 기재들을 양성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이제부터는 잔인할 정도로, 지독할 정도로 정파무사들을 공격할 겁니다.”
사실 그 때문에 사마신은 비전무공 얻은 것을 철저히 비밀에 붙이자고 했다. 그리고 진짜 능력 있는 기재 이삼십 명을 엄선해서 그 무공을 전하자고 했다.
하지만 정은맹의 장로들이 반대했다.
심지어 그의 부친이자 맹주인 사마진웅조차도.
엄선된 기재들만 그 무공을 익히면 일부 간부들의 사문과 가문의 제자들은 제외될 가능성이 컸다.
어느 문파는 많고, 어느 문파는 적고. 숫자에서도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차별해선 안 된다며 공평하게 기회를 주자고 했다.
말은 ‘공평하게’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능력도 없으면서 남이 자신들보다 더 가져가는 꼴은 볼 수 없다는 뜻이었다.
결국 그들의 뜻대로 수련에 임할 제자들을 일차로 선별했다.
그 숫자만 해도 모두 일백 명.
사마신이 주장했던 기재들에 비해서 세 배가 넘는 인원이었다.
게다가 그들을 가르칠 교관들 역시 각 문파에서 골고루 뽑았다. 그들에게도 비전의 무공을 익힐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니 마도의 눈을 속이고 은밀히 진행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할 수밖에.
그래서 사마신은 다른 계획을 세웠다.
훗날 세상은 자신을 욕할지 모른다. 아니 마도만큼이나 악인이라 할지 모른다.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는 이상 어쩔 수 없다.
악인 소리를 듣는 한이 있더라도 마도를 몰아내고 정의를 세울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나 하나 악인이 되어 강호에서 마도를 몰아낼 수만 있다면…….’
스스로 나락에 몸을 던지리라!
“신아야.”
“예, 아버님.”
“다른 사람들이 뭐라 해도 나는 너를 믿는다. 힘든 일이 있으면 언제든 이 애비와 상의하도록 해라.”
“감사합니다.”
하지만 사마신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부친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을 거라는 걸.
당장 죽어가더라도.
도움을 청하면 함께 죽을 테니까.
‘지옥에 가는 건 저 혼자로 족합니다.’
***
칼날 같은 능선을 넘고 넘어 칠십 리를 달렸다.
절정 경지에 이른 고수도 폐가 터질 듯했다.
이쯤 도주했으면 추적이 끊어졌겠지.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속도가 점점 늦추어졌다.
“힘내라! 속도를 늦추지 마!”
황보수가 발걸음을 늦추는 청년기재들을 향해 소리쳤다.
지칠 대로 지친 청년들은 그의 다그침이 못마땅했다.
“헉헉, 기주님! 적이 쫓아오지도 않는데 조금 쉬었다 가지요!”
“그게 좋겠습니다. 이러다가는 적과 싸우기도 전에 심장이 터져서 죽겠습니다!”
“적과 싸워보지도 못하고 도망치는 것만 해도 억울한데, 쫓아오지도 않는 적 때문에 이게 뭡니까?”
비전 무공을 익히기 시작하며 나름대로 자신이 생긴 청년들이다. 그들은 마도의 공격을 받고도 검 한번 휘두르지 못한 채 쫓기듯 도망치는 것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황보수는 청년들의 반발이 의외로 거세자 이를 악다물었다.
철혈마련은 추적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잠깐의 휴식이 피를 부를 수 있었다.
하지만 계속 다그치는 것도 한계에 봉착한 상태였다.
“좋다, 그럼 일각만 쉬었다가 출발한다!”
청년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걸음을 멈추고 여기저기 자리를 잡고 쉬었다.
개중에는 아예 드러누운 자도 있었고, 가부좌를 틀고 운공을 하는 자도 있었다.
철혈마련의 추적은 정파의 기재들이 생각한 것보다 끈질기고 집요했다.
우문척은 한순간도 쉬지 않고 정파기재들의 흔적을 뒤쫓았다.
나뭇가지 꺾어진 흔적, 발에 차여 흩어진 자갈의 흔적, 풀이 짓눌린 흔적, 그 모든 것이 그들을 인도했다.
그렇게 네 시진, 태양이 서쪽 봉우리 꼭대기로 떨어질 무렵 마침내 꼬리가 잡혔다.
저만치 계곡의 공터에서 쉬고 있는 일단의 무리가 보인 것이다.
우문척의 입가에 하얀 웃음이 번졌다.
“생각보다 빨리 잡았군.”
“적이다!”
경비를 서던 무사의 외침이 들렸다.
벌떡 일어난 황보수가 다급히 소리쳤다.
“모두 일어나라! 출발한다!”
“적이 많지 않으니 싸워봅시다, 기주!”
“우리보다 숫자가 적은 것 같은데? 괜히 도망쳤잖아?”
청년 기재들은 달려오는 우문척 일행을 보며 무기를 빼들었다.
일부는 도주할 생각이 없는 듯 아예 결전의 자세를 취했다.
황보수가 다그쳤다.
“놈들의 후위가 오면 위험해진다! 일단 최대한 멀리 가야 한다!”
“기주, 예전의 우리가 아닙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청년 기재들 중 수좌를 다투는 남궁욱이 자신 만만하게 말했다.
그는 처음부터 황보수의 후퇴명령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남궁세가의 비전 검법인 제왕검을 육성까지 익힌 터였다. 영약의 도움을 받아서 내공이 상승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절정 경지에 오른 그는 마도의 무사들이 겁나지 않았다.
“남궁 형 말씀이 옳습니다. 마도 놈들을 모조리 짐승의 밥으로 만듭시다!”
청년들이 남궁욱을 지지하며 기세를 올렸다.
황보수는 이를 악다물었다.
어쩌면 청년들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적의 숫자는 오십여 명 정도. 반면 자신들은 청년기재 오십여 명에 청검기 무사 삼십여 명까지 팔십여 명. 숫자가 적보다 많았다.
게다가 청년들은 비전 무공을 익히며 실력이 일취월장한 상태 아닌가 말이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
세상에는 가끔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지곤 한다.
생각지 못했던 고수가 등장해서 모든 예측을 뒤틀어버리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
‘그자도 그랬지.’
문득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절세미남의 얼굴에 깊이를 알 수 없는 호수처럼 조용했던 자. 하지만 강호에서 쟁쟁한 절정고수가 그에 의해 단숨에 죽어갔었다.
자신 역시 그를 건드리지 못하고 도망치듯 섬을 떠나와야만 했다.
만약 철혈마련의 무리 중에 그러한 고수가 있다면?
그때 어떤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때렸다.
맹의 고수들조차 저들을 막지 못했다는 것은 저들 중에 부맹주와 기산검협을 능가하거나 그에 준하는 고수가 있다는 말.
눈을 치켜뜬 그는 달려오는 철혈마련의 무리를 노려보았다.
유유자적 꼿꼿이 선 채로 대지 위를 미끄러져 오는 자가 눈에 들어왔다.
얼굴에 미소조차 떠올라 있는 듯했다.
‘위험해!’
황보수는 다급한 표정으로 청년들을 향해 소리쳤다.
“일단 물러선다! 명령대로 해!”
하지만 기세가 오른 청년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기주께서는 너무 걱정 마십시오. 저들은 우리가 처리하겠습니다. 하하하하!”
“마도 놈들에게 정의가 무엇인지 보여줍시다!”
“내가 앞장서겠소!”
오늘부터 정의단은 마도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리라!
청년들은 활활 타오르는 기운을 주체하지 못하고 철혈마련의 무리를 향해 몸을 날렸다.
황보수는 속이 울컥했지만 청년들을 그대로 방치할 수도 없었다.
“청검기는 정의단원들을 보호하라!”
청검기 무사들은 제멋대로 구는 청년기재들이 마음에 안 들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철혈마련과의 싸움을 은근히 바라고 있던 터였다.
그들은 명령이 떨어지자 검을 빼들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정의단원들은 강했고, 기세가 충천한 상태였다.
철혈마령대원이 뒤로 밀리면서 대여섯 명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정의단원들의 뜻대로 되는 듯했다.
남궁욱도 철혈마령대원 하나를 쓰러뜨리고 포효했다.
“마도의 놈들아! 지옥으로 보내주마!”
그동안 가슴에 쌓인 울분의 응어리를 토해내는 듯했다.
철혈마령대가 쓰러지는데도 구경만 하고 있던 우문척이 그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차가운, 살기가 깃든 살소였다.
“지옥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는 철부지군. 그렇다면 본 공자가 지옥의 공포를 알려주지.”
나직이 중얼거린 그가 마침내 발걸음을 뗐다.
그리고 그때부터 정의단은 공포를 경험해야만 했다.
우문척이 앞으로 나아가며 우수를 떨친 순간,
쾅!
정의단원 하나가 피를 뿌리며 튕겨 나갔다.
뻥 뚫린 그의 가슴에서 피가 쏟아지며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삼 장이나 날아간 그는 눈을 부릅뜨고 널브러졌다.
우문척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또 다른 먹이를 향해 나아갔다.
부맹주 남궁무룡을 곤란하게 만든 그의 무위는 청년 기재들이 상대하기에 너무 강했다.
게다가 그는 정파의 청년 기재들이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악랄한 살수를 거침없이 펼쳤다.
상대의 팔을 어깨부터 뜯어내고, 뜯어낸 팔로 목을 쳐서 목뼈를 부러뜨렸다.
가슴을 쑤셔 심장을 뜯어내기도 했다.
“이 아수라 같은 놈!”
분노한 청년 기재 둘이 악을 쓰며 그를 공격했다.
순간, 우문척이 달려드는 자들을 보며 쌍장을 쳐냈다. 그때도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피어나 있었다.
콰과광!
굉음이 터져 나오고, 우문척에게 달려들던 자들 중 하나가 피분수를 뿜으며 튕겨나갔다.
하나는 겨우 공격을 막아내고 안색이 창백해진 채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우문척이 물러서는 자를 향해 걸음을 내딛으며 독수리 발톱처럼 꺾어진 손가락을 내리쳤다.
그의 손가락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뻗어나갔다.
상대도 사력을 다해서 검을 휘두르며 방어했다.
쩡!
검을 튕겨낸 손가락이 상대의 가슴에 박혔다.
우문척은 가슴에 박힌 손가락을 움켜쥐며 부서진 뼈와 이지러진 살과 심장을 한꺼번에 뜯어냈다.
“끄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초원을 뒤흔들었다.
그 와중에도 곳곳에서 정의단원들이 쓰러졌다.
정의단 청년기재들의 뜨거워진 가슴에 스멀스멀 공포가 밀려들었다.
적을 쓰러뜨린 것은 처음 공격할 때뿐이었다.
공격을 시작한 후 반의반 각도 지나지 않았는데 정의단원 이십여 명이 쓰러졌다.
청검기 무사들까지 합하면 삼십여 명, 사 할에 이르는 무사들이 죽어간 것이다.
“모두 후퇴해!”
황보수의 악쓰는 소리가 다시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