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천화 6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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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화
자경산은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숙였다.
말리고 싶지만, 말린다 해서 들을 우문소소가 아니었다. 대신 그는 혁무천의 말을 전했다.
“무천이 말을 전하라 했습니다.”
우문소소의 큰 눈이 더욱 커졌다. 입가에는 환한 웃음도 피어났다.
“정말이야? 그런데 왜 이제야 말하는 거지? 아니지, 어서 말해 봐. 무천이 뭐라고 했지?”
자경산은 혁무천이 전하라는 말을 살짝 돌려서 말했다.
“어제 저녁의 일을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무슨……?”
“사공미미의 일 말입니다.”
자경산의 말에 우문소소의 표정이 서리라도 내린 것처럼 차갑게 굳어졌다.
“그가 그 일을 알고 있다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뭘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의 말을 믿어줄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는 그 일이 밝혀지는 걸 원치 않으면 더 이상 자신을 건들지 말라고 했습니다.”
“흥!”
차갑게 코웃음 친 우문소소의 눈에서 독기 서린 한광이 번들거렸다.
“그렇게는 안 될걸?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지금까지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거든.”
자경산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는 누구보다 우문소소를 잘 알고 있었다. 아마 그녀는 지금쯤 어떻게 하면 무천을 팔다리 잘린 풍뎅이로 만들어서 자신의 보석함에 가둘 수 있는지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입술을 살짝 깨문 우문소소가 말했다.
“끝까지 그가 나를 거부하면…… 그가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것을 철저히 망가뜨려 줄 거야.”
***
“그만! 무천 승!”
와아아아!
뜨겁게 달구어진 한낮의 연무장에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혁무천은 단 칠 초 만에 응노교를 나뒹굴게 만들고 포권을 취한 후 돌아섰다.
그 순간, 벌떡 일어선 응노교가 혁무천의 등 뒤를 공격했다.
“죽어라!”
“어? 저거……!”
“조심해!”
환호를 보내던 사람들이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그와 동시, 처음부터 그렇게 서 있었던 것처럼 응노교와 마주선 혁무천이 응노교의 손목을 잡고 도리깨처럼 휘둘렀다.
쾅!
응노교의 몸이 비무대 위에 내리꽂히며 천둥 같은 굉음이 터져 나왔다.
응노교의 몸이 두 치 두께의 판자로 만들어진 비무대 바닥을 부수고 반쯤 처박혔다.
“죽이지 않은 걸 다행으로 알아라.”
혁무천은, 충격을 받아서 부들거리는 응노교를 향해 한마디 던지고 다시 몸을 돌렸다.
아마 그가 응노교의 몸을 통해 공력을 쏟아내서 바닥을 먼저 부수지 않았다면 머리든, 몸이든 뼈가 박살났을 것이다.
몇몇 사람은 그 사실을 알고 경악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와아아아아!
“최고다, 무천!”
“무천! 네가 우승 먹어라!”
“무천! 무천!”
조금 전보다 배는 더 큰 함성이 천공을 뒤흔들었다.
함성은 혁무천이 비무대를 다 내려올 때까지 계속되다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응노교가 칠 초식도 버티지 못하다니, 소문보다 더 대단하군.”
“휘유우우, 이거 누가 우승할지 모르겠는데?”
구경꾼들이 술렁거렸다. 마도십문 중 하나인 비응방의 소방주 응노교의 칠 초 패배는 그만큼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비무대에서 내려온 혁무천은 주위를 둘러보고 조소를 지었다.
사공곽과 금가휘가 보이지 않았다. 연무장 어디에서도.
‘이제 곧 우문척이 없어졌다는 걸 알게 되겠지.’
두 사람은 우둔하지 않았다.
우둔하기는커녕 사도맹과 백마궁의 미래를 책임질 만큼 뛰어난 자들이었다.
그러니, 천화광이 정말 다른 누구 때문에 사라진 거라면, 그 대상이 결코 범상한 자는 아닐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천화광과 비교될 만한 자.
철혈마련 내에서 그 정도의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인물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지금 중앙의 제 사 비무대에서 비무를 준비 중인 마천문주의 제자 공손두.
사도맹의 작은 주인 사공곽.
패왕문의 소문주 구불청.
그리고 철혈마련의 둘째공자 우문양.
하지만 사공곽과 금가휘라면 그들에게 뒤지지 않는 사람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우문척에 대해서.
이제 곧 그의 뒤를 쫓기 시작할 터.
‘한바탕 바람이 불겠군.’
찻잔 안의 입바람으로 끝날지, 무림을 혼돈 속으로 몰아넣을 거센 피의 폭풍이 불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지난 수십 년 동안 경험해 보지 못했던 폭풍이 불 거라는 것이다.
혁무천은 무심한 표정으로 머릿속 생각을 정리하며 연무장 바깥으로 향했다.
그때 문인여진이 그에게로 다가왔다.
“무 공자, 승리를 축하해요.”
혁무천은 그녀의 인사를 담담한 표정으로 받아들였다.
“고맙소.”
“이제 내일 승부만 이기면 팔대마룡에 들겠군요.”
문인여진이 느릿하게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나직한 목소리가 묘하게 울렸다.
혁무천은 그 목소리의 정체를 알기에 쓴웃음이 나왔다.
‘어쨌든 대단하군. 저 나이에 소소선음공을 팔 성이나 익히다니.’
익히는 속도가 아여령보다도 더 빠른 듯했다.
“무 공자는 충분히 팔대마룡이 될 수 있을 거예요.”
문인여진이 다시 말을 건넸지만, 혁무천은 쓴웃음만 지은 채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아여령의 소소선음공을 직접 마주하니 기분이 묘했다.
그녀는 자신이 사라진 후 어떻게 지냈을까?
문인여진이 알고 있을까?
그가 엉뚱한 생각을 하는 사이 문인여진이 화제를 돌렸다.
“아, 미미는 이제 걸어 다닐 정도로 회복이 되었어요.”
“다행이군요.”
“무 공자는 정말 미미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건가요?”
“그렇소. 나는 그녀에게 아무런 마음도 없소.”
“그럼…… 저는 어때요?”
소소선음공을 펼친 문인여진이 발그레한 얼굴로 혁무천을 바라보았다.
어느 누구도 그녀의 질문에 부정의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문인여진이 저토록 아름다웠던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혁무천은 문인여진이 소소선음공을 펼치고 있다는 걸 알기에 별다른 동요가 없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여인에게 관심 없소.”
“여동생 때문인가요?”
“좋을 대로 생각하시오.”
“아쉽네요. 용기를 내서 말했는데.”
새침한 표정으로 말하는 모습이 절로 안아주고 싶을 만큼 애처로워 보였다.
물론 그것 역시도 절반 이상은 소소선음공의 영향이라 할 수 있었다.
혁무천은 그녀에게 소소선음공에 대해서 물어볼까 하다가 생각을 바꾸었다.
지금 그에 대한 대답을 듣는다 해서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가 아여령의 후손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때서.
자칫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만 받을지도…….
“다른 할 말이 없다면 이만 가보겠소.”
혁무천이 냉정하게 말하고는 포권을 취했다.
문인여진은 웃으며 마주 포권을 취했다.
“바쁘실 텐데, 괜히 제가 붙잡았나 보네요. 그럼 다음에 봐요.”
혁무천은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몸을 돌렸다.
문인여진은 걸어가는 그의 등을 바라보며 입술 끝을 씰룩였다.
‘곧 다시 만나게 될 걸? 내가 조금 질기거든.’
혁무천은 제 사 비무대 위를 올려다보았다.
마천문의 소성주, 서천마룡 공손두가 중앙에 서서 상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만한 표정을 지으며 서 있는 그는 상당히 키가 컸다.
등에 멘 검도 그의 키만큼이나 컸다.
그는 접수 마지막 날에 도착했다. 게다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혁무천과는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보고 있는 사이 그의 상대인 마수(魔手) 여동후가 비무대 위에 올라왔다.
곧 대결이 벌어졌다.
여동후는 마도의 절정고수인 여은백의 아들로 허창 일대에서 명성이 하늘을 찌르는 젊은 고수였다.
그러나 사천제일마룡이라 불리는 공손두의 상대가 되지는 못했다.
오 초식 만에 왼팔이 부러진 그는 패배를 자인했다.
여동후를 누른 공손두는 거만한 표정으로 포권을 취하고 비무대에서 내려왔다.
두 사람이 비무대 아래에서 그를 맞이했다.
혁무천은 그들을 보다가 눈빛을 빛냈다.
‘흠, 저자도 왔군.’
성도에서 만났던 자, 단양마권 양화송.
그가 공손두와 함께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보지 못했거늘.
그런데 마침 양화송이 고개를 돌리다가 그를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저 노… 친구는……?”
‘놈’이라고 하려던 그는 재빨리 ‘친구’라고 말을 바꾸었다.
왠지 기분이 께름칙했다.
꼭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것 같은 그런 느낌. 나중에 욕한 것을 알고 꼬투리를 잡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양화송이 아는 척하자, 공손두가 이채 띤 눈으로 혁무천을 바라보며 물었다.
“무천이란 자군. 양 장로가 아는 사람이오?”
“잘 안다고 할 수는 없고…… 성도에서 만난 적이 있네.”
“그래요? 의외군요, 무천이 성도에 갔었다니.”
“좀 이상한 자였지.”
“어떻게 말입니까?”
“뭐라고 말하기가 좀 애매한데…… 꼭…… 겉모습과 다르게 젊은 사람 같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네.”
양화송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렇게 말하자, 공손두도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그가 아는 양화송은 결코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남의 눈치도 보지 않았다.
패죽일 놈, 찢어죽일 놈, 묻어버릴 놈.
마음에 안 드는 자는 서슴없이 그렇게 칭했다.
그런데 뭔가를 꺼리며 말을 조심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공손두는 그래서 더 무천이란 자에게 흥미가 일었다.
“흠, 어디 어떤 자인지 한번 대화라도 나누어봐야겠군요.”
양화송이 흠칫해서 그를 말리려 했다.
하지만 말을 붙일 새도 없이 공손두가 혁무천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혁무천은 그 자리에 선 채,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공손두를 바라보았다.
이미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터였다. 그가 왜 다가오는지도 모르지 않았다.
피하려면 피할 수 있었지만 피할 마음도 없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마주쳐야 할지 모르는 자인 것이다.
마천문주 공손환의 아들.
오대마종 중 검마종 공손연의 후손.
과연 그도 자신을 배신했을까?
“이번 비무대회에서 가장 큰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그대를 이제야 만났군.”
공손두가 먼저 인사말을 건넸다.
오만함이 몸에 배어 있는 태도. 큰 키 때문인지 거만하게까지 느껴졌다.
“사천의 마룡에 대해서 많은 말을 들었지. 듣던 대로 자신감이 넘치는군.”
“하하하하. 나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다니. 믿는 구석이라도 있나?”
“나는 나만 믿지. 누구처럼 뒤에 대단한 뒷배가 없거든.”
혁무천의 도발적인 말에 공손두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졌다.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마천문을 믿고 행동한 적이 없다.”
“뭘 모르는군. 그대가 굳이 마천문의 이름을 들먹일 필요도 없어. 사람들은 그대를 마주하면 자연스럽게 마천문을 떠올릴 테니까.”
이마를 씰룩거리던 공손두가 의외로 순순히 인정했다.
“그 말도 일리가 있군.”
혁무천은 그의 태도를 보고 선입견을 버렸다.
어릴 때부터 팔대마세 중 하나인 마천문의 소문주로서 자란 그였다.
오만한 태도야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심성은 그리 나쁘지 않은 것 같군.’
마도문파의 제자, 마도인의 혈육이라 해서 모두 마인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은설을 만나면 그 사실을 말해주고 싶었다.
그래야 나중에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되어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뭐 그거야 나중 일이고…….
혁무천은 시선을 틀어서, 공손두 뒤에 비스듬히 서 있는 양화송을 바라보았다.
공손두의 몸집이 아무리 크다 해도 양화송을 완전히 숨길 수는 없었다.
“오랜만이오. 성함이 양화송이라고 하셨던가? 저번에 나를 만나면 가만두지 않을 것처럼 말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니지, 지옥 끝에 숨어 있어도 언젠가는 찾아내서 빚을 받아낸다고 했던가?”
혁무천은 말 상대를 양화송으로 바꾸었다.
흠칫한 양화송은 무슨 소리냐는 듯 얼버무렸다.
“난 그냥… 그대가 누군지 궁금했을 뿐이야. 지옥 끝에 숨어 있는 걸 내가 어떻게 찾는다고…….”
“만약 내 정체를 알게 되면 어떻게 하실 거요?”
“응?”
“양 노형은 스스로를 생각할 때, 신뢰가 있는 분이라 여기시오?”
“당연하지! 나는 신뢰를 목숨보다 중요시 하는 사람이야.”
혁무천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그럼 어디 두고 봐야겠군. 정말로 신뢰를 중요시 하는 분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