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천화 6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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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73회 작성일소설 읽기 : 귀환천화 63화
63화
목소리가 그쳤을 때는 소리친 자가 어느새 십여 장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를 본 혁무천의 눈빛이 깊어졌다.
‘천화광?’
만마성의 소성주인 천화광이 분명했다.
저자가 무슨 일로 자신을 쫓아온 걸까.
잠깐 생각하는 사이, 날아온 천화광이 혁무천 앞에 내려섰다.
“무슨 일로 날 찾아왔나?”
혁무천의 무심한 말투에 천화광은 눈을 가늘게 좁혔다.
“물어볼 것이 있다, 무천.”
“나와 대화를 나눈 것은 처음 같은데, 뭘 물어보겠다는 거지?”
언제 봤다고 질문질이야? 그런 표정.
가늘게 좁혀진 천화광의 눈이 잘게 떨렸다.
무천이 건방지다는 말을 듣긴 했다. 그런데 막상 직접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비무대회 도중에 어딜 가는 거냐?”
“내가 어딜 가든, 그대가 무슨 상관이지?”
“혹시…… 우문척을 만나러 가는 것 아니냐?”
“우문척? 그를 왜 내가 만나러 가?”
“우문척을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으니, 그가 철혈마령대와 함께 철혈마련에서 나왔다는 걸 모르진 않겠지?”
“뭐?”
혁무천은 눈을 치켜떴다.
천화광 말대로 두어 시진 전에 우문척을 만났다. 그때만 해도 떠날 기미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천화광이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닐 터. 그럼 어디를 간 걸까. 그것도 철혈마련의 핵심 전력 중 하나인 철혈마령대와 함께.
“몰랐나?”
“우문척이 어딜 가든 내가 어떻게 안단 말이냐.”
“그럼 이 새벽에 어딜 가려고 나온 거냐?”
말 못할 것도 없었다.
“마련 안은 답답하고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해서 다른 거처를 찾아보려고.”
“정말 그 이유 때문에 나온 거냐?”
“아니면 내가 왜 나와? 시간이 아까우니 더 물을 것 없으면 그만 가보겠다.”
냉랭하게 말을 던진 혁무천은 대화를 끝내고 몸을 돌렸다.
그러나 천화광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답답해서 나왔다고? 이 꼭두새벽에?
그 말을 믿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하지만 다그친다고 해서 대답해줄 놈도 아닐 터, 할 수 없이 마지막 한 수를 던졌다.
“그게 아니라, 정파의 비전무공을 찾으러 가는 거겠지. 우문척과 함께.”
몸을 돌리려던 혁무천이 다시 천화광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면서 머리카락이 뒤로 날아가며 차가운 눈빛이 다 드러났다.
“우문척이 정파의 비전 무공을 찾으러 갔다고?”
뚫어지게 혁무천을 바라보던 천화광이 코웃음을 치며 반문했다.
“흥! 끝까지 발뺌할 생각이냐?”
“못 믿겠으면 따라와 봐. 그럼 내가 우문척을 만나러 가는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있겠지.”
혁무천은 차갑게 받아치고 몸을 돌렸다. 천화광이 뒤에 있는데도 겁날 것 없다는 듯.
천화광은 그런 혁무천의 등을 보며 입술을 질겅 깨물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유궁이 만마성의 비밀거점에 소식을 전하고 돌아오려면 한나절 정도는 시간 여유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천을 이대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좋아, 네놈이 어디로 가는지 보자.’
천화광의 오기는 한 시진 만에 흔들렸다.
혁무천 일행은 계속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바쁜 걸음도 아니었다. 한 시진 동안 기껏해야 삼십 리를 이동했을 뿐. 답답함에 속이 끓었다.
‘일단 아침까지만 따라가 보자. 우문척과 아무 관계도 없으면 돌아가야겠어.’
그 와중에 또 다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
우문소소는 아침 해가 뜬 후에야 혁무천이 떠났다는 사실을 알고 분을 참지 못했다.
쨍그랑!
찻잔을 바닥에 세차게 내던진 그녀가 자경산을 닦달했다.
“경산! 너는 그가 떠날 때까지 뭐 했어? 왜 그걸 이제야 안 거야!”
자경산은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다. 변명할 것도 없고, 괜히 변명해봐야 우문소소의 화만 더욱 더 북돋을 뿐이었다.
“왜 말이 없어?”
짝!
우문소소가 능어 같은 손바닥으로 자경산의 뺨을 후려쳤다.
“말해 봐!”
짝!
비단천 찢어지는 소리에 방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자경산은 연달아 뺨을 맞고도 입을 굳게 다문 채 움직이지 않았다.
맞을 때마다 우문소소를 향한 마음에 균열이 갔다.
“설마 그가 떠나길 바란 건 아니겠지?”
“…….”
“바랐던 거야?”
“…….”
“그가 떠나야 나를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나 보지?”
“……아닙니다.”
“아니라고? 그런데 왜 그가 떠나게 내버려뒀어, 왜?”
내버려둔 게 아니다.
그는 모두가 잠든, 자신이 은신처에서 우문소소를 지키던 인시에 떠났다. 그래서 알 수 없었던 것뿐이다.
“어디로 갔는지 찾아 봐! 추혼단에는 내가 말해 놓을 테니, 그들을 이끌고 가서 무조건 찾아내서 데려와!”
“예, 공녀.”
“명심해. 그를 찾지 못하면 네가 그토록 원하던 답을 영원히 얻을 수 없을 거야.”
차가운 우문소소의 말에 자경산은 고개를 숙인 채 이를 악물었다.
“알겠습니다, 공녀.”
“만약 그가 오지 않겠다고 하면…… 팔다리를 다 부러뜨려서라도 끌고 와. 빨리!”
자경산은 포권을 취하며 깊이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렸다.
벌겋게 달아오른 턱의 근육이 바위처럼 단단하게 도드라졌다. 악다문 이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만 같았다.
걸음을 내딛는데 가슴에서 쩍 소리가 나는 듯했다.
오랜 세월 굳건하게 다져져서 절대 부서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한 여인에 대한 환상이 갈라지는 소리였다.
그 여인은 십 년 전과 너무나 달랐다. 아니, 어쩌면 자신의 눈에 단단히 씌워져 있던 껍질이 이제야 벗겨져 나간 것인지도 모른다.
‘원한다면… 그를 데려다 주리다.’
***
진시(辰時:오전7시~9시) 무렵.
혁무천 일행은 연평을 삼십 리 남겨놓고 갈대가 우거진 강가의 멋진 객잔으로 들어갔다.
객잔은 규모가 작아서 탁자가 여덟 개밖에 안 되었다. 그래도 대나무로 엮은 외벽이 바깥 풍경과 어우러져서 운치가 있었다.
마침 빈 탁자가 두 개 있어서 혁무천 일행이 탁자 두 개를 모두 차지하고 요리를 시켰다.
혁무천과 동대안이 나란히 앉고, 맞은편에 천화광이 앉았다. 빈자리가 있으면 따로 앉았겠지만 없으니 동석할 수밖에.
“제길, 식사하다 체하겠네.”
동대안이 투덜거렸다.
탁자를 가운데 두고 다섯 자.
고수에게는 눈도 깜짝일 여유가 없는 필살의 거리였다.
더구나 그들은 친구가 아니었다.
언제 살수를 펼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뭘 그렇게 봐?”
동대안이 천화광을 흘겨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자신의 눈을 쳐다보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처럼 눈이 작은 것에 대해서 한마디 하고 싶은 눈치였다.
그런데 천화광이 뜻밖의 말을 했다.
“당신 눈이 독수리의 눈만큼이나 좋다고 하던데.”
동대안의 표정이 확 풀어졌다.
“하, 하, 하. 천 공자가 뭘 좀 아는군. 솔직히 말해서, 독수리의 눈이 아무리 좋다 해도 나만큼은 아니지.”
“혹시 정파의 비전무공을 본 적 있나?”
“나는 못 봤어. 무천은 아마…….”
동대안이 말끝을 흐렸다.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뭐랄까, 속고 있다는 느낌?
반면 천화광은 동대안의 말에서 확실한 결론을 하나 내렸다.
‘정파의 비전무공을 본 사람이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무천이거나, 무천과 관련된 사람일 것이다.’
가슴이 뜨거워졌다. 몇 시진 동안 따라온 보람이 있었다.
그런데 동대안이 말을 살짝 비틀었다.
“……아마 무천은 봤을지도 모르지.”
혁무천은 귀찮은 일이 발생할까 봐 동대안의 입을 막으려 했다. 그런데 한 발 늦게 동대안이 말해버렸다. 살짝 틀긴 했지만.
“무천이 봤다고? 정말인가?”
“내가 언제 봤다고 했어? 봤을지도 모른다고 했지.”
동대안이 눈을 부릅뜨고 받아쳤다. 그래봐야 작은 눈이 조금 커졌을 뿐이지만.
일차 목적을 달성한 천화광은 혁무천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때 마침 요리가 나왔다.
혁무천이 말했다.
“일단 먹고 나서 이야기 하지.”
동대안도 그 말에 동조했다.
“그게 좋겠군. 먹을 때 건드리는 인간은 개만도 못하다는데, 설마 귀찮게 하지는 않겠지.”
막 젓가락을 집던 천화광의 눈이 약간 위로 올라갔다.
마음 같아서는 잡은 젓가락으로 저 콩처럼 작은 눈을 확 쑤시고 싶었다. 그러나 얻어야 할 것이 있는 만큼 자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엽기천과 목량, 강탁, 장대산, 영추문은 끼어들지 않고 구경만 했다.
구경하는 재미도 나름대로 쏠쏠했다.
긴장감으로 인해 온몸의 신경세포가 바짝 당겨져서 짜릿함마저 느껴졌다.
어떤 식으로든 한번 터질 것 같긴 한데…….
둘이 붙으면 누가 이길까?
한번 붙여 봐?
객잔의 요리는 그런 대로 먹을 만했다.
고급요리를 즐겨먹던 천화광은 입맛이 조금 안 맞았지만 참고 먹었다.
그러다 혁무천을 향해 은근슬쩍 말을 건넸다.
“이봐, 무천. 우리 만마성에 들어와라. 철혈마련보다 훨씬 나은 대우를 해줄 테니까.”
요리를 먹던 혁무천 일행이 일제히 천화광을 바라보았다.
천화광은 속으로 ‘흐흐흐, 솔깃한가 보군. 하긴 너희 같은 촌놈들이 언제 이런 제안을 받아보겠어?’하며 몇 마디 덧붙였다.
“다른 사람도 모두 받아주지. 원하면 꽃처럼 아름다운 미녀도 제공하겠어.”
그러고는 혁무천 일행을 둘러보았다.
그는 자신의 제안에 혁무천 일행이 감지덕지는 못할망정 고마워하는 표정 정도는 지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머리카락을 귀신처럼 늘어뜨린 놈이 말했다.
“만마성을 다 준다고 해도 싫어.”
눈알이 콩알 같은 놈도……
“그 말을 어떻게 믿어?”
그렇게 말하면서 째려보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덩치가 태산만 한 놈은 복화술을 익힌 것처럼 입도 열지 않고 말했는데, 나이도 어려보이는 놈이 반말을 찍찍 해댔다.
“나도 싫어. 할아버지가 만마성과는 어울리지 말라고 했어.”
천화광은 너무 어이가 없어서 화를 내는 것조차 잠시 잊었다.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다.
자신의 명령 한마디면 만인이 복종했다.
천하의 대문파들조차도 눈치를 봤다.
하물며 그런 제안을 하면 대부분 감격에 겨워서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혁무천 일행은 누구도 자신의 제안에 고마워하지 않았다.
조금 건방지긴 해도 실력은 확실해 보여서 큰 맘 먹고 제안했거늘!
‘죽일 놈들. 어디 두고 보자!’
그는 속으로 이를 갈며 다짐했다.
언제고 오늘의 일을 후회하게 해주리라!
그때 손님들이 객잔 안으로 들어왔다.
모두 네 명. 각양각색의 무복을 입은 무사들이었다.
나이가 많은 자는 사십 대였고, 적은 자는 이십 대 중반쯤 되었다.
그들은 혁무천 일행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혁무천은 신경 쓰지 않고 젓가락질에 열중했다. 동대안 등도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요리 이 인분을 젓가락질 몇 번 만에 입안으로 털어 넣은 장대산은 눈치를 보며 주문을 추가했고,
오직 천화광만이 턱을 쳐들고 오만한 표정으로 그들을 훑어보았다.
무사들은 서로 눈짓을 하더니 마침 자리가 빈 탁자 쪽으로 갔다.
“저자들, 정파 놈들 같은데?”
천화광이 툭, 한마디 내뱉었다.
자리에 앉던 무사들이 그 말을 듣고 엉거주춤하더니 천천히 일어났다. 긴장한 그들의 몸에서 살기가 스멀스멀 피어났다.
혁무천이 핀잔을 주듯 말했다.
“그럼 뭐 어때서? 식사하려고 온 것뿐인데. 그게 잘못인가?”
“잘못이라기보다…….”
“귀찮은 일이나 만들 거면 그만 가봐.”
천화광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따라온 목적만 아니라면, 자신의 마음에 드는 낯짝만 아니었으면 저놈의 입을 주먹으로 쳐버리고 싶었다.
‘아니지, 입을 뭉개면 보기가 안 좋아.’
엉뚱한 생각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힌 그는 엄한 생선요리만 젓가락으로 푹푹 찔렀다. 그게 마치 혁무천의 입이라도 되는 듯.
일어서던 무사들도 다시 의자에 앉았다.
싸움이 벌어지는 것은 그들 역시 원치 않았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나가면 자신들의 정체만 밝히는 꼴이니 나가기도 어정쩡했다.
일 각 후.
동대안 등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꿋꿋이 식사를 마쳤다.
“다 먹었으면 가지.”
혁무천이 차로 입안을 헹구고 천화광을 바라보았다.
천화광은 접시가 아직 반도 비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젓가락을 푹 소리가 나도록 원목탁자에 깊숙이 꽂아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두 사람이 더 객잔으로 들어왔다. 사오십 대로 보이는 중년 무사들이었다.
그들은 먼저 들어온 자들과 일행인지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그런데 인사를 나누다 말고 혁무천 쪽을 쳐다보았다.
차가운 표정, 정광이 번뜩이는 눈빛.
객잔 안의 분위기가 다시 싸늘하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