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천화 5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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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화
혁무천 대신 동대안이 그를 보고 한마디 했다.
“눈깔 한 번 더럽게 못생겼네.”
‘뭐?’
눈이나 아니나 콩알만 한 자가 지금 뭐라고 한 거지?
사진효는 어이가 없어서 바로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 사이 혁무천은 그를 슬쩍 한번 쳐다보기만 하고 사공곽의 방으로 향했다.
기분이 상한 사진효가 혁무천을 불렀다.
“이봐, 무천.”
걸음을 멈춘 혁무천이 고개만 돌려서 그를 바라보았다.
“왜?”
“잠깐 이야기 좀 하세.”
“시간 없어. 중요한 이야기 아니면 다음에 하지.”
혁무천은 냉정하게 사진효의 청을 거절했다.
사진효의 치켜뜬 눈에서 독기가 번뜩였다.
“중요한 이야기야.”
“그래? 그럼 지금 말해봐.”
저 자식이 지금 누굴 놀리나?
사진효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하지만 혁무천의 실력을 잘 알기에 꾹 참고 전음으로 말했다.
<내일 승부에서 이기면 나와 붙는다는 건 알지?>
솔직히 혁무천은 모르고 있었다. 비무 상대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져달라고는 하지 않겠네. 그냥 적당한 때에 승부를 양보한다면 그에 대해서 충분한 대가를 주겠네.>
“싫다면?”
<싫다면 할 수 없지. 아직 시간이 있으니 생각해보게. 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평생 풍족히 먹고살 수 있을 거네.>
“생각해 보는 거야 어려울 것 없지. 말 다했나? 그럼 가보겠네.”
혁무천은 조금도 미련을 남기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움켜쥔 사진효의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껍질을 벗겨서 죽일 놈의 새끼. 진짜 기분 나쁜 놈이야.’
***
혁무천이 방에 들어갔을 때, 방 안에는 사공곽과 사공미미만 있었다.
사공미미를 돌봐주던 문인여진은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혁무천은 동대안이 주운 침을 사공곽에게 건네주며 그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했다.
“……이런 침이 그곳에 떨어져 있는 게 이상해서 가져온 거야.”
사공곽은 혁무천이 건네준 침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이게 그곳에 떨어져 있었단 말이지?”
“맞아.”
“용케 찾았군.”
“동 형이 찾았지. 눈이 좋거든.”
사공곽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동 형이란 자의 눈은 구불청의 콧구멍보다 작았다.
그자의 눈이 좋다면, 세상에 눈 나쁜 놈 하나도 없을 듯했다.
하지만 숲에서 흔적을 찾은 사람도 그였지 않던가.
세상에 별의별 일이 다 있는데, 눈 작다고 시력까지 좋지 말란 법은 없겠지.
“이 침의 주인을 찾으면 실마리가 풀릴 거라고 보나?”
“그거야 그대가 알아봐야겠지.”
혁무천은 그 일을 떠맡을 생각이 없었다.
“아직 너에 대한 의심이 풀리지 않았다는 걸 모르진 않겠지?”
사공곽의 말에 혁무천이 실소를 지었다.
“마음대로 생각해. 그럼 나는 이만 가보겠다.”
사공곽은 방을 나서려고 몸을 돌린 혁무천의 등을 노려보았다.
그때 뒤에서 신음이 들렸다.
“으으음.”
화들짝 놀란 사공곽이 다급하게 몸을 돌렸다.
“미미야!”
혁무천도 문을 열려다가 고개를 돌려서 침상을 바라보았다.
사공미미가 고통스런 표정을 지으며 몸을 비틀고 있었다.
“미미야, 오빠가 옆에 있으니 안심해라.”
사공곽이 안타까움 가득한 목소리로 사공미미를 달랬다.
사공미미는 몸을 몇 번 들썩이다가 서서히 눈을 떴다.
“오……빠?”
“그래, 오빠다.”
“여긴……?”
“네 방이다. 이제 아무 걱정 말고 푹 쉬어라.”
“어떻게…… 된 거죠?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사공곽은 그 말에 바로 대답을 못했다.
뭐라고 할 것인가.
‘네가 옷이 다 찢어진 채 숲 속에 버려져 있어서 데려왔다.’라고 하면 안 그래도 힘든 그녀의 정신이 무너질지 모를 일이다.
그런데 그녀가 말했다.
“사 공자 방에서…… 정신을 잃었는데……?”
사공곽의 표정이 굳어졌다.
사진효도 자신의 방에서 그녀가 사라졌다고 했다. 마곡청도, 호위무사도 그녀가 나간 것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하필이면 왜 그런 자식 방에 들어가서…….
사공곽은 속이 끓었지만 누워 있는 여동생을 더 힘들게 할까 봐 참았다.
“누가 너에게 그런 짓을 했는지 생각나는 게 없느냐?”
“몰라…… 아!”
대답하던 사공미미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기억나는 게 있어?”
사공곽이 재촉하듯 물었다.
사공미미가 기억을 더듬었다.
“바람이 뒤에서…… 다가오는 거 같았어요.”
처음에는 그저 창문이 열린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느낌이 이상했다. 마치 누군가가 다가오는 그런 느낌.
“그래서 고개를 돌리려는데…… 목이 뜨끔하더니 눈앞이 하얗게 되고…… 정신을 잃은 거 같아요.”
괴이한 일이었다.
사공미미의 말이 사실이라면, 누군가가 사진효의 방에 몰래 들어가서 사공미미를 실신시켰고, 그 후 그녀를 숲 속으로 데려가서 옷을 찢고 유린한 후 그대로 놔둔 채 사라졌다는 말이 되었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더구나 납치해 놓고 겁탈도 안 했지 않은가 말이다. 사공곽이나 사공미미 입장에서야 천만다행인 일이지만.
장난이라면 너무 심하고, 장난이 아니라면 뭔가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런 짓을 저질렀을 것이다.
‘누가 그랬는지 몰라도, 반드시 찾아내서 열 배, 백 배 더한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
사공곽은 이를 갈며 다짐하고는, 사공미미를 향해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제 그만 쉬어라.”
“저는 괜찮…… 어? 무 공자께서도 계셨네요.”
사공미미가 방문 앞에 서 있는 혁무천을 발견하고는 언제 힘든 모습이었냐는 듯 밝은 미소를 지었다.
“사라졌다고 해서 와봤지. 그런데 이제 보니 멀쩡하군.”
무천의 말투는 여전히 투박했지만, 그래도 목소리가 전보다는 훨씬 부드러웠다.
사공미미도 그 차이를 느끼고 싱글싱글 웃었다.
“아직은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저를 걱정해서 오셨다니 기분이 좋네요.”
“시간도 없는데 괜히 왔군. 난 그만 가볼 테니, 잠이나 자.”
그 순간, 사공미미가 갑자기 신음을 흘리며 몸을 뒤틀었다.
“아…… 으으음, 몸이 좀 안 좋은 거 같아요.”
사공곽이 깜짝 놀라서 급히 그녀에게 말했다.
“어디 아프냐? 말해봐라. 바로 의원을 불러올 테니까.”
“의원은 필요 없어요. 무 공자가 조금만 돌봐주면…….”
그제야 사공미미가 거짓으로 아픈 척했다는 걸 안 사공곽은 한숨이 나오는 걸 억지로 참았다.
‘후우우, 이게 진짜…….’
혁무천은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다시 몸을 돌렸고.
“다음에 보지.”
“어? 이봐…….”
사공곽이 붙잡으려 했지만, 혁무천은 듣지 못한 척 문을 열고 방에서 나갔다.
객당으로 돌아가는 혁무천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갔다.
사도맹의 여식이 누군가에게 당했다.
목량 말대로 겁탈을 당하지는 않은 듯했다.
그렇다 해도 경악할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누가, 왜 사공미미를 그렇게 만들어서 숲 속에 버려놓은 걸까.’
분명 목적이 있을 것이다.
그녀를 그렇게 만듦으로써 이익을 볼 사람은?
문득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설마……?’
***
사공미미 사건은 철혈마련을 뒤흔들었다.
다른 곳도 아닌 철혈마련 내에서 여인 납치사건이 일어나다니.
더구나 그 당사자가 사도맹의 여식이었다.
보고를 받은 우문강천은 그 어느 때보다 격분해서 명을 내렸다.
“찾아내! 어느 놈이든 본 련 안에서 그런 짓을 저지른 놈은 용서치 않을 것이다!”
범인의 행위가 사악해서 잡으려는 게 아니었다. 자칫하면 사도맹으로부터 강력한 항의가 들어올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철혈마련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우문강천은 자시가 다 된 늦은 밤인데도 자신이 직접 철혈마전을 나섰다.
사대호위를 거느린 그가 갑작스럽게 나타나자, 영빈각 일대를 지키던 경비무사들도 비상이 걸렸다.
‘응?’
영빈각이 저만치 보일 때쯤 우문강천의 눈빛이 이채를 발했다.
세 사람이 영빈각 쪽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화톳불에 비친 세 사람 중 하나에 시선을 두고 걸었다.
비무대회에서 인사말을 할 때 멀찍이 혼자 서 있던 청년.
그 후 청년은 비무대회가 아닌 비무대 밖에서 폭풍을 일으켰다.
그리고 비무대 위에서도 오차전까지 통과했다.
‘무천이라 했지?’
우문강천도 그의 정체가 궁금해서 알아보았다. 그러나 이름 외에는 모든 것이 안개에 가려져 있었다.
심지어 그와 함께 있는 일행들조차 각양각색이어서 판단에 혼란만 가중되었다.
‘잘됐군.’
잠깐 사이 거리가 가까워졌다.
혁무천도 우문강천을 보고 표정이 무심하게 가라앉았다.
“련주께서 행차하셨소. 한쪽으로 비켜서시오.”
경비무사가 다급히 나서서 혁무천을 향해 손짓했다.
혁무천은 경비무사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이보시오.”
경비무사가 당황해서 다시 나서자, 우문강천이 입을 열었다.
“놔두어라. 그와 잠깐 할 이야기가 있다.”
그제야 경비무사는 황급히 한쪽으로 비켜서서 허리를 숙였다.
우문강천은 혁무천과 일 장 거리를 둔 채 멈춰 섰다. 사대호위가 좌우로 둘씩 나누어져서 만약의 상황에 대비했다.
“멀리서나마 자네가 비무하는 걸 한번 봤지. 그런데 요즘 자네 이름이 자주 들리더군.”
우문강천이 먼저 말을 걸었다. 그의 시선은 혁무천의 두 눈에 꽂혀서 미동조차 없었다.
혁무천 역시 한 점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우문강천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제 이름이 련주의 귀에까지 들어갔다면, 제가 이곳에 온 목적을 절반쯤은 달성한 것 같군요.”
“호오, 무슨 뜻인가?”
“누군가가 제 이름을 듣고 찾아와주길 바라고 있으니까요.”
“호오, 그래? 혹시…… 그 대상이 여인인가?”
“그렇습니다.”
“하하하하. 누군지 몰라도 행복하겠군. 사랑하는 여인의 마음을 얻는 것에 비하면 자존심은 아무 것도 아니라네.”
우문강천이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혁무천은 아직 그렇게 웃을 수가 없었다. 행복에 대해 판단하려면 일단 은설부터 만나야 했다.
“저도 그러길 바랍니다만, 행복하려면 일단 살아 있어야 하겠지요.”
“그 여인이 살아 있지 않을 수도 있단 말인가?”
“그걸 알아보려고 이곳에 왔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 살아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알았지요.”
우문강천이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턱의 수염을 쓸어내렸다.
“흠, 그럼 그 여인을 찾아갈 것인가, 아니면 여기서 기다릴 것인가?”
“기다릴 생각입니다.”
간단명료한 혁무천의 대답을 듣고 우문강천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잘 생각했네. 광활한 강호에서 길이 엇갈리면 찾기가 더 힘들어지지.”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아! 아예 본 련의 사람이 되면 어떻겠나? 그럼 본 련의 모든 정보망을 동원해서 그 여인을 찾아보겠네.”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사양하겠습니다.”
“이 우문강천이 부탁해도 말인가?”
나직한 우문강천의 목소리에는 묵직한 힘이 실려 있었다. 아마 공력이 약한 자였다면 식은땀이 나고 몸이 절로 위축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혁무천의 대답은 차갑게 느껴질 정도로 단호했다.
“따를 수 없으니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곁에서 지켜보던 사대호위 중 하나가 싸늘한 눈빛을 번뜩이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동서남북 사방위 중 남방을 맡고 있는 오경이란 자였다.
“련주께서 호의를 베푸시는데, 그대가 감히 거절하겠다는 건가?”
혁무천의 눈이 그에게로 향했다.
“거절하겠다면?”
차갑게 흘러나온 그의 목소리에 오히려 오경이 당황했다.
“뭐라? 어디 련주님 앞에서…….”
“내가 왜 련주의 말에 무조건 따라야 하지?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더도 말고 한 가지만 대봐.”
“…….”
오경의 얼굴이 붉어졌다. 화톳불 때문인지 붉게 타오르는 듯했다.
“물러서라.”
우문강천이 묵직한 목소리로 오경을 밀어냈다.
고개를 슬쩍 숙인 오경이 혁무천을 노려보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충성이 과하다 보면 말이 앞설 수가 있다네. 이해하게나.”
“련주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도 그만하겠습니다.”
“잘 생각했네. 그건 그렇고, 정말 철혈마련에 들어올 생각이 없나? 자네가 들어온다면 최고의 대우를 해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