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천화 9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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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99회 작성일소설 읽기 : 귀환천화 96화
96화
혁무천의 싸늘한 눈빛이 그에게로 향했다.
“믿든 말든 그건 네 맘대로 해. 나는 사실을 말한 것뿐이니까.”
신도평은 차마 화를 내지는 못하고 시선을 은설에게로 돌렸다.
“은 소저, 저자의 말이 사실이오?”
“안에 있어서 모든 말을 다 듣지는 못했어요. 하지만 몇 마디 말은 확실히 들었죠. 오빠의 말은 사실이에요.”
은설이 또박또박 말하자, 신도평도 더는 우기지 못했다.
“어찌 되었든 은 소저를 구해주었다니 고맙소.”
“그대가 고마워할 이유는 없어. 그만 가자, 설아.”
“오빠…….”
은설이 어정쩡한 표정을 짓자, 혁무천은 이마를 찌푸렸다.
“왜 그러냐? 너도 알 텐데? 저들이 너를 지켜줄 수 없다는 걸.”
“저도 알아요.”
은설이 조금의 의문도 갖지 않고 혁무천의 말에 동의하자 신도평이 이마를 찌푸렸다.
“은 소저, 이번에는 적에게 속아서 이런 일이 벌어졌소만, 앞으로는 속지 않을 거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어쨌든 그런 일이 벌어진 건 사실이잖아요.”
“그래도 저 사람보다는…….”
“저도 복수만 아니면 오빠의 말에 망설이지도 않았을 거예요. 아버지의 복수만 아니면…….”
은설이 말끝을 흐리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저들과 함께 갈 생각이냐?”
혁무천이 묻자, 은설이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섬에서 납치되었다가 살아난 후 저 자신과 약속한 것이 있어요, 오빠. 오빠가 섬에서 바로 나올 수 있다는 걸 몰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요.”
“약속?”
“섬에서 얻은 무공을 마도와 싸우는데 쓰기로 했어요. 돌아가신 아버지의 복수도 하고요.”
아버지의 복수를 하겠다는데 뭐라고 하랴.
자신 역시 가족들의 복수를 위해서 천하 대지에 만인혈을 뿌렸지 않은가.
“정말 복수할 생각이냐?”
“예, 오빠. 아버지를 고문해서 죽음으로 몰아넣은 백마궁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아버지가 가족을 떠날 수밖에 없게끔 만든 마도와도 싸울 거예요.”
혁무천은 이마를 찌푸리고 생각에 잠겼다.
자경산과의 약속이야 문제될 것 없었다. 은설이 가지 않겠다는데 억지로 끌고 갈 수도 없는 일 아닌가 말이다.
정작 기분이 안 좋은 것은 은설이 천기회와 함께 움직이려고 한다는 것이다.
‘설마 저 얼굴만 미끈한 놈 때문에?’
심지어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신도평이란 자는 얼굴도 준수했지만, 귀공자 같은 기품이 있었다.
은설 같은 여자 아이는 자신처럼 거친 사람보다 신도평처럼 귀공자 같은 자를 더 좋아할지도 모른다.
“복수를 하기 위해서라면 꼭 천기회 사람들과 함께 있을 필요는 없다.”
“현재 강호에서 마도와 싸울 수 있는 곳은 정은맹과 천기회밖에 없어요. 그런데 정은맹과 함께할 수 없는 이유는 오빠도 잘 아시잖아요.”
사실이 그랬다.
자신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혼자 백마궁과 정면대결을 벌일 수는 없었다.
더구나 자신은 공력을 지나치게 쓸 경우 생명선이 줄어들지 않던가.
혁무천은 은설의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은설을 혼자 보내는 것 역시 마음에 걸렸다.
“좋다. 그럼 내가 따라가마.”
“정말요?”
은설의 표정이 환하게 펴졌다.
자신의 결정이 혁무천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는 걸 그녀가 왜 모를까. 하지만 아버지의 복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천기회를 따라가려 했었다.
그런데 혁무천이 함께 가겠다고 하자 대번에 마음이 편해졌다.
“대신 너도 약속해라. 일단 복수만 끝나면 나와 함께 여행을 떠나자. 마도와 싸우는 것은 나중에 하고.”
“알았어요. 고마워요, 오빠.”
혁무천은 은설이 웃는 모습을 보고 표정을 풀었다.
그때 신도평이 말했다.
“이해해줘서 고맙소.”
혁무천의 표정이 다시 싸늘해졌다.
“당신들을 이해한 것이 아니야. 앞으로 또 설아가 위험해지면 그땐 정말로 설아와 함께 떠날 거다.”
신도평의 눈매가 미미하게 떨렸다.
그는 분노가 치밀었지만 은설을 보고 참았다.
‘건방진 자, 지금은 은 소저 때문에 참지만 언젠가는 대가를 치르게 될 거다.’
***
혁무천과 은설이 신도평, 조광유와 함께 오향현으로 돌아가자 상은곡 등이 먼저 와 있었다.
그들은 은설이 무사하다는 걸 알고 반색했다.
그러나 은설 옆에 있는 혁무천을 보고 표정이 다시 굳어졌다.
특히 여충민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 별 일은 없었나 보구려.”
상은곡이 그리 말하자, 조광유가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납치한 놈도 해를 끼칠 생각은 없었나 보네.”
그러고는 그간의 사정을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상은곡은 설명을 듣고 헛웃음을 지었다.
“허, 웃기는 놈이군. 그렇게 돌려줄 놈이 왜 사람을 납치해?”
“그 이야기는 차차 하고…… 아무래도 남경으로 가는 것은 보류해야 할 것 같네.”
“왜 그런가? 은 소저가 납치된 것 때문에?”
“음, 그것도 있고…… 철혈귀령이 나타났네.”
“뭐?”
“납치범이 저 친구와 싸운 자들을 보고 ‘철혈귀령’이라고 했다더군. 그들도 부정하지 않았고.”
“그들을 피하려면 더더욱 남경으로 건너가는 게 낫지 않겠나?”
“당장이야 낫겠지. 그런데 남경에 가서 하루 이틀 머물게 되면 철혈마련이 우리의 진로를 차단할지 모르네.”
“으음, 그건 그렇군.”
“차라리 육로를 통해서 하루라도 빨리 신양으로 가는 게 낫지 싶네.”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신도평도 조광유의 의견에 찬성했다.
상은곡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알았네, 어쩔 수 없지. 그럼 경 형에게는 사람을 보내서 사정을 설명하고 다음에 찾아간다고 전하세. 아무런 소식도 전하지 않고 안 가면 오해할지도 모르니까.”
“그게 좋겠군. 그럼 출발 준비를 서두르지.”
“알았네.”
상은곡은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서려다가 혁무천을 바라보았다.
“자네는 어떻게 할 건가?”
혁무천은 남경으로 가지 않는 것이 아쉬웠지만 마음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구요라면 지금쯤 자신과 천기회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일단은 함께 움직이면서 일행들에게 소식을 전하는 게 나을 듯했다.
“함께 갈 거요. 은설을 지켜야 하니까.”
상은곡이 조광유를 슬쩍 쳐다보았다. 조광유가 전음을 보냈다.
<함께 떠나자는 걸 은설이 붙잡았네. 잠깐 봤지만 상당한 실력인 것 같더군. 공자의 기분은 안 좋겠지만 우리에게 손해될 것은 없을 것 같네.>
<상당한 실력 정도가 아니네. 어쩌면…… 우리보다 강할지도 모르네.>
<뭐? 설마……?>
<여충민이 일수에 패했네. 정확한 실력을 알지는 못하지만 어쨌든 조심해야 할 자네. 해가 된다 싶으면…… 제거해야 할지도 모르고.>
결국 천기회와 혁무천 일행은 남경으로 건너가지 않고 육로를 통해 서쪽으로 향했다.
혁무천은 은설과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전처럼 즐겁지가 않았다.
신도평 때문이었다.
자식이 은설로부터 두세 걸음 떨어진 곳에서 걸으며 시시때때로 말을 걸었다.
은설도 간간이 미소를 지으며 그의 말을 받아주었다.
혁무천은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질투든 아니든, 기분이 좋지 않은 것만큼은 분명했다.
‘근데 설아는 뭐가 그렇게 좋아서 웃어?’
이제는 설아마저 얄미워 보였다.
아마 과거에 그런 생각을 하는 남자를 봤다면 한껏 비웃어줬을 것이다.
‘남자가 질투나 하다니. 바보 같은 놈.’ 하면서.
그런데 지금은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은가.
혁무천은 자신의 그러한 마음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나도 남자니까’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마음을 합리화했다.
‘언제 저놈의 주둥이를 한 대 때려주든가 해야지 원…….’
다행히 은설은 몇 마디 받아주기만 하고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환한 미소를 지으며.
“오빠, 마룡선발대회 이야기 좀 해줘요. 절강일화 우문소소가 그렇게 미인이라면서요?”
“응? 우문소소? 미인은 무슨…… 웃기는 여자지.”
순식간에 마음이 풀어진 혁무천은 철혈마련에 들어간 이후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옆에서 신도평이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본 척도 하지 않았다.
다음 날 오후, 천기회와 혁무천 일행은 합비에 들어섰다.
합비는 한때 팔대세가 중 하북의 팽가, 호북의 제갈세가와 함께 가장 강한 힘을 지니고 있던 남궁세가가 있는 곳이었다.
남궁세가는 과거에 비해 힘이 형편없이 약해진 상태였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오랜 세월 축적해온 부가 있었다.
황금은 귀신도 부릴 수 있다고 하지 않던가.
비록 천하를 뒤에서 쥐고 흔드는 구룡상단이나 천화상단만큼은 아니어도 합비성 제일로 불리기에는 부족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은 수백 년 동안 군의 장수들을 꾸준히 배출했다.
그 덕분에 안휘성 무림을 좌지우지하는 철혈마련이나 귀천교도 그들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었다. 그저 강호의 활동에 제약을 가할 뿐.
남궁세가도 마도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세력을 키우지 않았다. 그리고 합비 외에서는 활동을 자제했다.
천기회와 혁무천 일행은 바로 그 남궁세가를 찾아갔다.
남궁세가의 커다란 정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몇 번 문을 두드리자 하인이 나와서 문을 열어주었다.
“뉘슈?”
“조광유라 하네. 무이산에서 왔지. 가주님께 그리 말씀드려주시게.”
“잠시만 기다리십쇼.”
안으로 들어간 하인이 곧 두 사람과 함께 나왔다.
한 사람은 사십 대 나이로 보였고, 한 사람은 이십 대 청년이었다.
그들은 눈인사만 한 후 천기회와 혁무천 일행을 안으로 안내했다.
남궁세가의 장원 안은 오가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무림에서 힘을 잃었다는 걸 보여주듯 무사들은 더더욱 보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혁무천은 걸음을 옮기면서 차가운 눈빛을 빛냈다.
분명 사람은 많지 않았다. 무사들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럼에도 곳곳에서 삼엄한 기운이 느껴졌다.
특히 일행을 안내하고 있는 중년인과 청년은 둘 다 절정 경지에 오른 고수였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이건가?’
남궁세가에 대한 그의 감정은 결코 좋다고 할 수 없었다.
경덕진에 몰려왔던 정파의 고수 중 남궁세가의 사람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 일을 따지고 싶지는 않았다. 그로 인해서 만인혈사 때 남궁세가의 무사도 수백 명은 죽었으니까.
아마 그 사실을 안다면 남궁세가가 자신을 죽이겠다고 달려들 것이다.
안내해준 두 사람을 따라서 대전 안으로 들어가자, 세 사람이 그들을 반겼다.
“오랜만입니다, 조 형.”
먼저 오십 대로 보이는 중노인이 포권을 취했다.
남궁헌. 그는 현 남궁세가 가주인 남궁선의 동생이었다.
조광유도 마주 포권을 취해서 인사를 받았다.
“남궁 형과 만난 지도 벌써 칠 년이 흘렀군요.”
“세월이 정말 빠릅니다.”
“그러게요. 한데 가주님은……?”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들어가시지요. 운아, 너는 손님들을 객당으로 안내해 드려라.”
“예, 숙부.”
조광유와 상은곡, 신도평만이 남궁헌을 따라 내실로 들어갔다.
혁무천과 나머지 일행은 청년, 남궁운을 따라 객당으로 갔다.
남궁세가의 객당은 과거의 영화를 보여주듯 규모가 무척 컸다.
이삼백 명을 한 번에 수용해도 될 정도였다.
객당에 도착한 남궁운이 그제야 인사를 건넸다.
“저는 남궁운이라 합니다.”
천기회 사람들과 은설이 그와 인사를 나누었다.
남궁운은 남궁세가 가주의 둘째 아들이었다. 약간 둥근 얼굴에 미소를 띤 표정이 사람을 편안하게 했다.
특히 은설과 인사를 나눌 때는 환하게 웃기도 했다.
그는 혁무천만 아무런 말이 없자 먼저 말을 붙였다.
“노형, 혹시 마음에 안 드시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나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혁무천이 딱딱하게 말하자, 은설이 입을 삐죽이며 흘겨보고는 대신 나섰다.
“제 오빠예요. 이름은 무천이고요. 본래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으니 이해하세요.”
“아, 그러시군요.”
미소를 지으며 말하던 남궁운이 고개를 살짝 틀었다.
“그런데 성함이 무천이라면…… 설마 마룡선발대회의 그 무천은……?”
한쪽에 서 있던 여충민이 기회를 잡았다는 듯 큰소리로 말했다.
“바로 그 무천이란 사람이오, 공자. 마룡선발대회에 나가서 몇 번 승리를 했다고 하더구려.”
“아…….”
남궁운의 미소 띤 얼굴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근처에 있던 남궁세가 무사들도 들은 듯 굳은 표정으로 혁무천을 노려보았다.
마룡선발대회에 나갔다는 것은 마도의 인물이라는 말과도 같았다.
정파인 남궁세가로서는 반갑지 않은 자.
하지만 남궁운은 다시 미소를 짓고 물었다.
“혹시 마룡선발대회에 나간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오빠는 나를 찾으려고 나갔던 거예요.”
은설이 나서서 말했다.
“소저를 찾으려고요?”
“헤어진 후 제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계셨거든요. 그래서 마룡선발대회에 나가 유명해지면 제가 찾아올 거라 생각하신 거죠.”
“흐음. 그랬군요.”
“제가 오빠 소식을 알게 된 것이 그 때문이니 오빠의 계획은 성공한 셈이죠.”
“유명해지기 위한 것이라면 꼭 마룡선발대회에 나가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아쉽군요.”
혁무천은 남궁운의 말이 오지랖처럼 들렸다.
“그대가 아쉬워할 것 없어. 그때는 그 방법이 나을 거라 생각해서 한 일이니까.”
“이미 많은 사람들이 무 형을 마도의 사람으로 알고 있을 겁니다. 저는 그게 안타까운 것이지요.”
“이미 지나간 일이야. 신경 쓰지 않아. 누가 뭐라 하든.”
“무 형은 괜찮을지 몰라도 다른 사람들이 그로 인해서 힘들어질 수도 있습니다.”
혁무천이 남궁운을 빤히 쳐다보았다.
“원래 그렇게 오지랖이 넓나?”
“뭐, 오지랖이라기보다 이런저런 일에 관심이 많을 뿐입니다.”
“그럼 앞으로는 관심을 줄여. 오래 살고 싶지 않다면 마음대로 하고.”
혁무천은 할 말만 하고 은설을 바라보았다.
“들어가서 쉬자.”
“예, 오빠.”
은설은 남궁운을 향해 슬쩍 고개를 숙이고, 먼저 객방으로 가는 혁무천을 따라갔다.
남궁운은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입술 끝을 살짝 비틀어서 미소를 지었다.
느낌이 기이한 자였다.
오늘 온 신도평도, 은설이란 여자도 미소를 절로 짓게 만들 만큼 느낌을 주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 둘을 합친 것보다 더 자신의 신경을 건드리는 사람이 바로 무천이란 자였다.
내심 결정을 하나 내린 그는 몸을 돌렸다.
‘오랜만에 바람 좀 쐬러 나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