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천화 9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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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화
자경산이?
순간 혁무천은 또 하나의 이름과 얼굴을 떠올렸다.
‘혹시 우문소소가?’
어떻게 된 일인지 알 것 같다.
‘그럼 은설을 이용해서 나를 불러들이려고?’
혁무천의 두 눈에서 서릿발 같은 한광이 번뜩였다.
“어디로 갔지?”
“저쪽으로 갔네.”
남교명이 가리킨 방향은 마차바퀴가 향한 방향과 약간 달랐다.
“그럼 마차는?”
“자경산과 여자는 여기서 내렸지.”
혁무천은 남교명이 가리킨 곳으로 신형을 날려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후우우, 나도 모르겠다. 그놈이 알아서 하겠지.”
겨우 안도의 숨을 내쉰 남교명은 또 다른 자들이 오기 전에 수하들과 함께 그곳을 떠났다.
***
혁무천은 타인 앞에서 함부로 내보이지 않았던 경공술, 초월영(超月影)을 펼쳐서 화살처럼 날아갔다.
아마 동대안이 있었다면 알아봤을지도 몰랐다. 초월영은 혁무천의 조부이자 광천곡주였던 혁진학의 독문 경공술이었으니까.
그렇게 이십 리쯤 달리자 송림으로 이루어진 야트막한 야산이 보였다.
그 야산의 아래쪽에 산신묘처럼 보이는 제각이 하나 있었다.
혁무천은 그 제각을 보며 눈을 가늘게 좁혔다. 싸늘한 한광이 가늘어진 눈에서 번뜩였다.
제각 앞에 호위로 보이는 무사들이 서 있었다.
그 무사들의 복장을 두어 번 본 적이 있었다. 전에 자경산과 함께 나타났던 자들과 같은 복장이었다.
혁무천은 곧장 제각을 향해 빠르게 다가갔다.
제각 앞에 서 있던 자들이 다가오는 혁무천을 보고 제각 안에 보고를 올렸다.
혁무천이 제각 앞에 내려섰을 때, 제각 안에서 자경산이 나왔다.
그는 놀란 표정으로 혁무천을 바라보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설마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군.”
“우문소소가 시켰나?”
“맞아. 잘 알고 있군.”
“이상하군. 그런데 왜 바로 가지 않고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지?”
“사실 그대를 만날 생각이었어. 그대라면 나를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나를 만나려 했다고?”
“그랬지. 하지만 이렇게 빨리 찾아낼 줄은 몰랐어. 최소한 며칠은 지나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완벽하게 속였다고 생각했거든.”
“왜 나를 만나려고 했지? 내가 용서해줄 것 같아서?”
“아니. 은설이라는 여자를 건네주려고.”
“뭐?”
혁무천조차 그 말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실컷 납치해 와서 자신에게 건네주려고 기다렸다니.
왜, 왜 그런 헛일을 한단 말인가? 위험을 감수해가면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나에게 바라는 것이라도 있나?”
“둘이 멀리 가라. 아주 멀리. 약속하면 여자를 건네주마.”
이상한 거래였다.
하지만 혁무천으로선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약속하기 전에, 이유를 물어도 될까?”
자경산의 표정에서 씁쓸함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잠시 망설이는 것 같던 그가 혼잣말하듯 나직이 말했다.
“나는…… 소공녀가 너에게 집착하는 걸 원치 않는다.”
그제야 혁무천은 자경산이 이상한 거래를 하려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자신에 대한 우문소소의 집착을 어찌 모를까.
자신이 은설과 함께 멀리 사라지면 그녀도 포기할 수밖에 없을 터.
결국 자경산이 바라는 것은 우문소소인 듯하다.
우문소소가 다른 남자에게 마음을 주는 걸 원치 않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사실이라면 또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그가 봤을 때, 자경산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을 만큼 우문소소를 사랑하지 않는 듯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자경산의 마음이 아니었다.
“좋아, 설아만 허락한다면 그렇게 하지. 나는 어차피 은설과 멀리 여행을 갈 생각이니까.”
“다행이군. 정말 다행이야. 나도 아름다운 아가씨를 죽이고 싶지 않았는데…….”
“대신 설아에게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그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할 거다.”
“걱정 마. 마차로 옮기는 동안 멘 것 외에는 손대지 않았으니까.”
혁무천은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데 자경산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아! 지금 마혈과 아혈이 제압되어 있어. 말이 너무 많아서 할 수 없이 제압한 것이니 나를 원망하지는 마.”
꼭 말이 많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의 말을 듣다 보면 자신의 마음이 흔들렸다. 세상의 그 어느 독사보다 더 독해져야 할 마음이.
자경산은 자신의 그러한 흔들림이 두려웠다.
부모와 형제, 일백 가솔의 한을 잊을까 봐.
그의 정확한 마음을 모르는 혁무천은 그저 은설에게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안도했다.
“안에 있는 수하에게 설아를 데리고 나오라고 해라.”
“그러지.”
자경산이 제각 안을 향해 말했다.
“그 여자를 데리고 나와라.”
곧 제각 안에서 장한 하나가 은설의 팔을 붙잡고 나왔다.
이제 막 마혈이 풀린 듯 은설의 걸음걸이가 불안정했다.
그 와중에도 은설은 혁무천을 보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아마 아혈이 풀렸다면 ‘오빠!’라고 소리치며 울음을 터트렸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때, 혁무천이 제각 쪽을 보며 소리쳤다.
“조심해!”
동시에 신형이 날리면서 쌍장을 뻗었다.
강맹한 장력이 허공을 뒤틀며 휘몰아쳐갔다.
자경산은 혁무천이 약속을 어기려는 줄 알고 반격을 가하려다가 뒤늦게 또 다른 불청객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붉은 인영이 제각 옆쪽 숲에서 날아들고 있었다.
은설 쪽을 덮치려던 그자는 숨 막히게 하는 강력한 장력이 밀려들자, 황급히 몸을 틀어서 혁무천의 장력에 대항했다.
쾅!
굉음과 함께 제각 한쪽이 부서졌다.
비틀거리던 은설이 한쪽으로 주르륵 밀려나서 겨우 버티고 섰다.
그 사이 혁무천은 은설의 앞을 막고 서서 부서진 제각 한쪽에 내려서 있는 자를 노려보았다.
사십 대 중반쯤 되는 중년인이었다.
손바닥만 한 검붉은 반점으로 뒤덮인 얼굴, 여자아이처럼 뒤로 땋은 머리카락은 허리까지 길게 늘어져 있었다.
피처럼 붉은 적포를 입은 그는 키가 혁무천의 목에 닿을 만큼 작았다.
그러나 눈빛만큼은 대호도 꼬리를 말고 도망갈 정도로 섬뜩했다.
“새파란 애송이가 제법이구나.”
혁무천은 무심한 눈으로 중년인을 응시했다.
절정 경지에 이른 고수였다. 문제는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적포를 입은 중년인의 뒤에서 한 사람이 더 모습을 드러냈다.
그자는 빼빼 마른 몸매에 얼굴이 회칠을 한 듯 창백했다.
나이는 둘이 비슷해 보였다.
“뭐하는 자들인데 귀신같은 몰골을 하고 다니는 거지?”
혁무천이 차가운 표정으로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적포를 입은 자가 낄낄거렸다.
“낄낄낄, 정파의 벌레들이 꿈틀댄다는 말을 듣고 왔다가 재미있는 놈을 만났군. 하긴 소가 녀석 모습이 귀신처럼 보이긴 하지.”
“뭘 잘못 알았군. 귀신같은 몰골이라고 한 것은 저 사람이 아니라, 당신을 보고 말한 거야.”
적포인의 얼굴이 괴이하게 이지러졌다.
반면 안색이 백짓장 같은 자는 얇은 입술을 비틀고 씰룩였다.
그로서는 그게 웃음에 대한 최선의 표정이었다.
혁무천이 이번에는 하얀 얼굴의 중년인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 사람은 귀신이 아니라 저승사자의 졸개처럼 보이는군.”
“크크크, 하긴 그래서 사람들이 백면사신이라고 부르지.”
“사신은 무슨. 백면사졸이라고 하면 딱 좋을 것 같은데. 당신은 적반귀라고 하면 될 것 같고.”
혁무천은 은근슬쩍 두 사람의 신경을 건들며 도발했다.
그런데 실제 적포인의 별호가 적반귀마였다.
자경산이 약간 놀란 표정으로 그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백면사신과 적반귀마, 철혈귀령이 여긴 왜……?”
철혈귀령. 철혈마제 우문강천이 심혈을 기울여 키운 자들.
실력은 장로들과 한판 겨룰 수 있을 만큼 강했다.
오직 우문강천의 명령만 듣는 저 살귀들이 여기에 왜 나타났단 말인가.
그들은 우문홍의 명을 받고 정파의 움직임을 조사하던 중 우연치 않게 이곳에 나타났으나 자경산으로선 내막을 알 수 없었다.
어쨌든 혁무천은 그들이 누구건 신경 쓰지 않았다.
“썩은 얼굴을 보니 저승에 갈 때가 다 된 것 같군. 원한다면 내가 보내주지.”
계속되는 그의 빈정거림에 적반귀마가 눈을 부라렸다.
“이 찢어죽일 놈이!”
성질이 급한 그는 욕설을 내뱉는가 싶더니, 곧장 낫처럼 꺾어진 기형도를 빼들고 혁무천을 공격했다.
혁무천도 좌수 엄지로 검을 툭 쳐올렸다.
쉬아아악!
적포인의 기형도가 섬뜩한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갈랐다.
혁무천의 천망검이 검집을 빠져나왔다.
그도 상대가 약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상대는 둘.
번쩍!
빛이 폭사하듯 검이 뽑혔다.
‘하나를 먼저 제거한다!’
천룡일기세.
대천룡구검세 중 첫 번째 초식이 펼쳐지며, 연이어서 세 번의 변화를 보였다.
마치 검집을 빠져나온 천룡이 천공을 찢어발기며 솟구치는 듯했다.
적발귀의 치켜뜬 눈이 세차게 떨렸다.
쾅!
혁무천을 당장 두 쪽 낼 것 같던 그의 기형도가 튕겨나갔다.
적발귀의 몸도 옆으로 밀려났다.
일그러진 얼굴로 미끄러지듯 주르륵 밀려난 그를 혁무천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이……!”
눈을 치켜뜬 적발귀가 소리치려다 입을 딱 벌렸다.
시퍼런 청룡이 입을 벌리고 그를 삼킬 듯 날아들고 있었다.
그는 물러서는 와중에도 혼신의 힘을 다해서 미친 듯이 기형도를 휘둘렀다.
적발귀가 위기에 처하자, 뒤에서 지켜만 보던 백면사신이 땅을 박차고 혁무천을 향해 몸을 날렸다.
기다렸다는 듯 자경산도 검을 빼들며 백면사신에게 마주쳐갔다.
계속 공격했다가는 자신이 위기에 처할 터. 백면사신은 할 수 없이 검의 방향을 틀어서 자경산의 공격을 막았다.
결국 적발귀마는 자신만의 힘으로 혁무천의 공격을 막아내야 했다.
떠덩!
일성 굉음과 함께 기형도가 튕겨 나가고,
“크억!”
적발귀마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뒤이어 혁무천이 좌수를 뻗자,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몸뚱이가 날아가서 제각의 부서진 곳에 처박혔다.
그 사이 백면사신과 자경산이 삼초 격전을 벌였다.
쩌저정!
검광을 번뜩이며 벼락 치듯 검을 나누던 두 사람은 고막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갈라섰다.
막상막하.
서너 걸음씩 물러선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며 눈도 깜박이지 않았다.
혁무천은 자경산이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앞에 은설이 있었다.
“설아야…….”
은설도 혁무천을 보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자경산이 아혈을 풀어준 듯 그녀의 입에서 젖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빠…….”
그때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은 소저!”
신도평과 조광유가 경공을 펼쳐서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백면사신이 뒤로 물러서더니, 정신을 잃은 적발귀마를 옆구리에 끼고 몸을 날렸다.
자경산도 한마디만 남기고 그곳을 떠나갔다.
“약속 잊지 마라, 무천.”
혁무천은 그들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은설을 향해 다가갔다.
그 사이 다가온 신도평이 노성을 내지르며 검으로 혁무천을 가리켰다.
“은 소저에게서 물러서라!”
은설이 다급히 말했다.
“제 오빠예요.”
“오빠? 그럼 저자가 무천이라는 사람?”
“맞아요, 공자.”
신도평은 의아함과 묘한 감정이 뒤섞인 눈으로 혁무천을 노려보았다.
“그런데 당신이 여긴 어떻게…….”
“유가장으로 갔더니 먼저 떠났다고 하더군. 그래서 천기회 사람들과 찾으러 나섰지.”
그 말에 조광유가 이마를 찌푸렸다.
“그럼 상 장로를 만났느냐?”
“그들도 당신들을 찾고 있소.”
“흐으음.”
“검을 거두세요, 공자.”
은설이 신도평을 재촉했다.
그녀는 혁무천과 천기회 사람들이 다투는 걸 원치 않았다.
신도평은 검을 거두고 포권을 취했다.
“신도평이라 하오. 어떻게 된 거요? 은 소저를 납치한 자들은……?”
“설아를 넘겨주고 떠났다.”
차가운 목소리의 반말투에 신도평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그냥 갔단 말이오? 은 소서를 당신에게 넘겨주고?”
“맞아.”
신도평은 이해할 수 없었다.
넘겨줄 거면 왜 납치했단 말인가?
조광유 역시 의문을 품었다.
“그들이 왜 자네에게 은 소저를 넘겨주고 그냥 갔단 말인가?”
“나와 설아가 멀리 떠나기를 바란다고 했소.”
“겨우 그것 때문에 은 소저를 납치했단 말인가?”
“다른 사람에게는 별 것 아닌 일일지 모르지만, 그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소.”
신도평이 냉랭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나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