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천화 9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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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423회 작성일소설 읽기 : 귀환천화 93화
93화
“다음 약속 장소로 가자.”
상은곡이 침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예, 장로님. 곧장 오향현으로 간다!”
여충민이 일행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들은 이곳에서 기다리던 자를 찾기 위해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자네는 함부로 나서서 귀찮게 하지 말고 뒤만 따라오게.”
여충민이 혁무천을 향해 강압적인 어조로 말했다.
혁무천은 무심한 표정으로 대답도, 반발도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조광유나 신도평과 함께 이동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천기회 사람들이 알고 있을 터, 일단 정확한 상황을 확인하는 게 먼저다.
가슴을 차갑게 가라앉힌 그는 천기회 사람들의 뒤만 따라갔다.
누구도 알지 못했다. 마을 입구에서 백여 장쯤 떨어진 갈대밭에 시체 한 구가 널브러져 있다는 걸.
시체는 지독한 고문을 당한 듯 온몸이 피로 범벅된 채 제멋대로 뒤틀려 있었다.
***
오향현은 바닷가에 인접한 마을이었다.
일천호가 넘는 큰 마을로 남쪽 끝에는 장강과 연결되는 선착장도 있었다.
천기회 사람들은 그곳에서 배를 타고 남경으로 건너갈 계획이었다.
수심이 낮아서 큰 배가 접안할 수는 없지만 작은 상선이나 고깃배가 접안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게다가 오향현은 마도의 힘이 그나마 덜 미치는 곳이었다.
오시(午時)가 되기 전.
조광유와 신도평, 은설 등은 선착장 근처의 객잔에서 차를 마시며 유가장에 남은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은 소저는 남경에 가보신 적 있소?”
신도평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안 가봤어요.”
“남경은 중원에서도 손에 꼽히는 큰 성이오. 구경할 것이 많아서 하루 종일 봐도 다 못 볼 거요.”
“기대되네요.”
“내가 은 소저에게 정말 궁금한 것이 있는데, 대답해 줄 수 있소?”
“말씀해보세요.”
“오빠라는 분을 남자로서 좋아하시오?”
“무슨…… 뜻인가요?”
은설이 어색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조광유는 그녀를 슬쩍 쳐다보기만 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요. 그 오빠라는 분을 친 오빠와 같은 감정으로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남자로 좋아하는 건지 알고 싶소.”
은설의 얼굴이 살짝 상기되었다.
남에게 그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웠다.
하지만 그녀는 대답을 피하지 않았다.
“저에게는…… 오빠가 전부예요.”
신도평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하지만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했다.
“만약 오빠라는 분이 마도의 인물이라면 어떻게 하실 거요?”
“…….”
“아닐 거라 생각하지만, 만약 마도와 관련된 사람이라면……?”
은설이 신도평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전부라는 게 무슨 뜻인지 아세요?”
“그거야…….”
“저는 그것으로 대답이 되었다고 생각하는데요.”
허리를 세운 은설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하고는 일어났다.
“피곤해서 좀 쉬어야겠어요.”
그러고는 가볍게 포권을 취한 후 돌아섰다.
단호한 그녀의 태도에 신도평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내 말에 기분 상했다면 미안하오.”
은설은 대답 없이 이층의 객방으로 향했다.
‘오빠가 마도인이라 해도 상관없어. 오빠는 나에게 전부야. 그것만이 진실이야.’
그녀는 속으로 자신의 마음을 다잡았다.
솔직히 신도평의 말을 듣고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그럼 어떡하지? 그런 마음.
비록 순간이었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것만으로도 슬펐다.
오빠를 믿지 못하다니.
나쁜 년!
‘미안해, 오빠.’
그 시각.
건너편 다루에서 객잔을 쳐다보던 청년의 시선이 천천히 이동했다.
객잔 안에서 차를 마시던 사람들 중 젊은 여자가 일어나서 이층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쳐다보던 청년, 자경산은 여자가 객방 쪽으로 가는 걸 보고 눈빛을 번뜩였다.
남녀 간에 말다툼을 한 것처럼 여자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그렇다면…….’
사소한 소리는 감정의 골에 묻힐 수도 있다.
“호위들을 끌어내시오.”
자경산이 나직하게 말하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자가 말없이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밖에서 소란스런 소리가 들렸다.
“너희들 어디서 온 놈들이냐? 가만, 혹시 정파 놈들 아니야?”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이 새끼들, 수상한데?”
처음에는 단순한 말다툼이었다. 그러다 곧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싸우는 소리가 났다.
자경산은 남은 차를 마저 입 안에 털어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에 누운 채 얼굴을 이불에 묻고 있던 은설의 귀에도 밖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감정이 상해 있던 그녀는 일어나지 않았다.
밖에 조광유와 신도평이 있으니 싸움은 곧 멈출 것이다. 자신이 나서봐야 거치적거리기만 할 뿐.
그때 문득 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침대에 누워 있던 은설은 고개를 들었다.
눈이 커졌다.
“누구……?”
처음 보는 사람이 방에 들어와 있었다.
무척 잘생긴 청년이었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낀 그녀는 빙글 침상에서 구르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상대는 그녀보다 두어 수 위의 고수였다.
한발 내딛는 순간, 그녀 앞에 도착한 자경산은 허공을 격하고 지풍을 튕겨서 마혈과 아혈을 찍었다.
“아…….”
반쯤 일어섰던 은설의 몸이 힘없이 무너졌다.
자경산은 쓰러지는 그녀를 한 팔로 안아서 어깨에 멨다. 그러고는 방문 쪽을 일견한 후 창문을 통해 방을 나갔다.
신도평은 싸움에서 이기고도 찜찜했다.
자신들에게 시비를 걸었던 자들은 상당한 실력을 갖춘 자들이었다.
호위무사 넷이 감당하지 못해서 결국 자신과 조광유마저 나서야 했다.
짜증이 났지만 죽이면 문제가 커질지 몰라서 살수도 함부로 쓰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싸움이 길어지긴 했지만, 서너 놈이 부상을 당하자 욕을 퍼부으며 물러갔다.
마도 세력이 없는 곳인데 어디서 이런 자들이 나타났단 말인가.
“놈들이 또 몰려올지 모르네. 어떻게 할 건가?”
조광유가 걱정되는지 신도평에게 물었다.
신도평도 그 점이 우려되었다. 그러나 도망치듯 떠나고 싶지는 않았다.
“근처에는 중소문파도 변변한 곳이 없습니다. 아마 지나가던 놈들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흐음, 하긴……”
조광유도 그 말이 옳다는 듯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신도평이 몇 마디 덧붙였다.
“상 장로님께서 아침에 유가장을 출발했다면 곧 도착할 겁니다. 오시면 바로 출발하도록 하지요.”
“알겠네, 그렇게 하지.”
신도평은 고개를 들어서 이층의 방 쪽을 쳐다보았다.
밖에서 싸움이 났는데 은설은 나와 보지도 않았다.
얼마나 화가 났으면…….
‘내가 너무 성급하게 몰아붙였나?’
무천의 이름만 나오면 신이 나서 말하는 게 얄미웠다.
은근히 화도 났다.
바로 옆에 있는 자신은 생각도 안하고 들떠서 조잘조잘…….
그래도 어쨌든 조금만 참았으면 될 것을.
쓴웃음을 지은 신도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를 포기할 것이 아니라면, 나중을 위해서라도 찾아가서 사과를 하는 게 나을 듯했다.
“잘 생각했네.”
조광유가 신도평의 마음을 눈치 채고 한마디 던졌다.
어깨를 으쓱한 신도평은 이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곧 방문을 두드렸다.
“은 소저, 나요. ……은 소저.”
방 안은 고요했다.
이상할 정도로.
심지어 부스럭거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잠을 자지는 않을 텐데?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든 그는 문을 살짝 밀었다.
반뼘 가량 열린 문 사이로 안이 보였다.
침대에 아무도 없었다.
“응?”
신도평은 문을 더 열어보았다.
은설은 방 안 어디에도 없었다. 대신 침대 밑에 신발만 남아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신도평은 멍하니 신발을 보다가 창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살짝 열린 창문 사이로 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홱, 몸을 돌린 그는 분노에 찬 표정으로 방에서 뛰쳐나갔다.
“조 장로님!”
***
형오촌부터 달려온 천기회 사람들은 오향현에 들어서자 일행의 행방을 찾아보았다.
일행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오향현을 관통한 대로를 통과해서 선착장으로 가기 전 한 사람이 뛰듯이 달려왔다.
“장로님!”
이십 대 후반쯤의 청년. 영검령주 신도평의 직속 호위인 자였다.
그런데 표정이 왠지 굳어 있었다.
“호영, 형오촌에 아무도 없던데, 어찌 된 일이냐?”
여충민이 다그치듯 물었다.
청년이 의아한 듯 답했다.
“창위가 남았는데…….”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급한 일이 있었다.
“어떻게 된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뭐? 무슨 일인데……?”
“은 소저가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납치당한 것 같습니다.”
그때 뒤쪽에 서 있던 혁무천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자세히 말해봐.”
청년은 처음 보는 혁무천을 보고 상은곡의 눈치를 봤다.
상은곡이 침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말해봐라.”
“예, 장로. 령주께서 들어갔을 때, 은 소저의 방에 아무도 없이 신발만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조 장로와 공자는 어디 있느냐?”
“흔적을 뒤쫓고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갔지?”
혁무천이 다시 나서서 묻자, 여충민이 냉랭히 다그쳤다.
“너는 나서지 마라. 은 소저는 우리가 구할…….”
“입 닥쳐.”
“뭐?”
“죽고 싶지 않으면 입 닥치라고 했다.”
“이, 이 건방진 놈이……!”
버럭 소리친 여충민이 혁무천을 향해 발을 내딛으며 손을 뻗었다.
혁무천은 여충민의 손을 우수로 잡아 꺾고 좌수로는 목을 덥석 움켜쥐었다.
여충민이 엇! 했을 때는 이미 팔이 꺾이고 목이 잡혀 있었다.
“끄윽.”
여충민은 급히 반발하려 했다. 그러나 목을 잡은 손을 통해 밀려든 가공할 기운에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었다.
“그 손 놓게!”
상은곡이 눈을 치켜뜨고 소리쳤다.
그러나 혁무천은 여충민의 목을 움켜쥔 채 천천히 고개를 돌려 무심한 눈으로 상은곡을 응시했다.
“지금은 설아를 구하는 게 먼저이니 잘잘못은 나중에 따지겠소.”
“…….”
눈이 마주친 순간, 상은곡은 싸늘한 기운이 등골을 훑고 내려가는 것만 같아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당신들은 설아에게 아무 일도 없기만을 바라야 할 거요.”
만약 설아에게 일이 생긴다면…… 천기회는 팔대마세보다 더 지독한 적을 상대해야만 하리라.
혁무천은 여충민을 한쪽에 내던졌다.
여충민은 내동댕이쳐진 뒤에도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아서 바로 일어나지 못했다.
혁무천은 그를 보지도 않고 호영이라는 호위무사에게 다시 물었다.
“흔적이 어느 쪽으로 이어져 있지?”
눈이 마주친 순간, 호위무사는 숨이 턱 막혔다.
여충민이 당하는 것을 보고 분노가 치밀었는데도 지금은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당장 말하지 않으면 당장 죽을 것만 같은 느낌.
“그, 그게… 저쪽으로…….”
혁무천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호위무사가 가리키는 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우리도 가보자.”
상은곡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말하고는 땅을 박찼다.
머릿속에 무거운 돌덩이가 들어찬 듯했다.
‘은설이라는 아이의 말을 너무 가볍게 생각했어.’
-저는 우리 오빠만큼 강한 사람을 보지 못했어요.
들뜬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었다.
그때는 그냥 웃어 넘겼다. 솔직히 비웃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강호에 대해 잘 모르니 그런 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아직 스무 살도 안 된 여자가 무림의 세계를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말이다.
실수였다.
조금만 더 깊게 생각했다면 상황이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것을.
이를 지그시 악문 상은곡은 까마득히 사라지는 혁무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잘못하면 생각지도 못한 적을 만들지도 모른다. 만약 은설이라는 아이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저자를 반드시 제거해야만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