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천화 8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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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19회 작성일소설 읽기 : 귀환천화 80화
80화
육칠백 명이 뒤엉켜서 서로를 죽이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
계곡 안 곳곳에서 피가 튀고 비명이 터져 나왔다.
서산으로 떨어진 태양조차도 핏빛으로 물들었다.
“어떻게 할 건가? 뛰어들 건가?”
동대안이 눈치를 보며 물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혁무천은 그를 지그시 바라보기만 했다.
그의 눈빛이 마치, 내가 미쳤소? 라고 말하는 듯했다.
“하여간 눈치 없기는…….”
영추문이 중얼거렸다. 누구를 향해 말한 것인지는 굳이 물어볼 것도 없었다.
동대안이야 모른 척했지만.
그때 혁무천이 말했다.
“상황 봐서 들어갈 거요. 동 형만 나를 따라오시오. 대산과 추문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살펴보고.”
“…….”
동대안은 작은 눈알을 굴리며 입술을 오물거렸다.
‘지미, 괜히 말해서…….’
세상이 어둑해지는 시각.
격전은 한 치 앞도 짐작할 수 없는 난전으로 치달았다.
그런데 혼돈의 난전 속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자들이 있었다.
우문척과 천화광.
철혈마련과 만마성의 소주인들.
놀랍게도 남궁무룡과 팽조환이 두 사람을 상대하고 있는데 승기를 잡지 못했다.
심심곡에서 우문척의 무위를 경험한 사람들은 그러려니 했다.
그러나 총단에서 지원을 나온 정은맹 고수들은 그 광경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제 이십 대인 자들이 창천신검과 벽력신도를 비등하게 상대하다니.
새삼 팔대마세의 가공할 무력에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렇게 싸움이 벌어진 지 이 각쯤 지났을 때였다. 하늘이 검게 물들며 밤이 찾아왔다.
절정고수들에게 그 정도 어둠은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았다. 일류고수들도 어느 정도 어둠을 이겨낼 수 있었다.
문제는 혼전 중이라는 것이다.
언제 어느 때 눈 먼 칼과 검이 날아들지 모르는 상황.
그 점이 무사들의 움직임을 둔화시켰다.
기회만 엿보던 황보수가 청년기재들을 향해 소리쳤다.
“내가 앞을 뚫겠다! 이곳을 빠져나간다!”
죽음 직전에 놓여 있던 청년기재들은 더 이상 그의 명령에 토를 달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우문척은 청년기재들이 빠져나가는데도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오절 중 검절로 불리는 창천신검이 앞에 있었다.
다른 곳을 신경 쓰기에는 너무 강적이었다.
그 사이 황보수와 청년기재들은 철혈마령대를 따돌리고 혼돈의 전장에서 빠져나왔다.
지원무사들이 그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가까스로 포위망을 빠져나온 황보수는 이를 악물고 전장으로부터 멀어졌다.
일단은 계곡을 빠져나가는 게 우선이었다. 살아 있는 청년기재들만이라도 지켜야 했다.
“놈들을 쫓아!”
“놓치지 마라!”
장로 둘과 철혈마령대 무사들이 그들의 뒤를 쫓았다.
청년기재들은 지칠 대로 지치고 부상마저 심한 상태였다. 속도가 늦다 보니 계곡 입구에서 따라잡혔다.
호위에 나선 지원무사 십여 명이 철혈마련의 장로와 철혈마령대의 공격에 쓰러졌다.
청년기재 중에서도 두세 명이 또 목숨을 잃었다.
그때 황보수 옆에 누군가가 내려섰다.
황보수는 반사적으로 몸을 틀며 주먹을 뻗었다.
후웅!
권격이 어둠을 휘몰아치며 밀려갔다.
그런데 뻗은 주먹이 중간에 막혔다. 아니, 막힌 것이 아니라 잡혀버렸다.
바위도 부술 수 있는 권격이거늘.
팔을 비틀어서 손을 빼내려던 황보수는 뒤늦게 상대의 얼굴을 보고 눈을 치켜떴다.
“무…천……!”
“지금은 먼저 처리할 일이 있으니 이야기는 나중에 하지.”
주먹을 놓아준 혁무천은 황보수를 앞에 두고 몸을 돌렸다.
공격하려면 해봐라, 그런 태도.
황보수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결국… 살아서 나왔군.’
씁쓸한 표정을 지은 그는 돌아선 혁무천의 등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 사이, 혁무천과 함께 나선 동대안은 백마궁 무사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올빼미도 울고 갈 정도로 밤눈이 좋은 그는 적아를 확실하게 구분하며 꼬챙이검을 내질렀다.
그의 검은 백마궁 무사들에게 공포였다.
가늘어서 보이지도 않았다. 빠르기는 눈으로 쫓아가기 힘들 정도였다.
게다가 지금은 밤.
감각만으로 피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뿐인가. 신법까지 유령을 방불케 할 정도로 신묘했다.
“크억!”
“조심…… 헉!”
동대안은 격류를 헤집는 물고기처럼 백마궁 무사들 사이를 누볐다.
순식간에 서너 명이 동대안의 검에 당해서 쓰러졌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으헉!”
“컥!”
“뭐, 뭐야? 크억!”
혁무천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곳마다 비명이 터져 나왔다.
황보수를 마주한 순간 분노가 들끓었다.
단숨에 죽여서 죄를 묻고 싶었다.
그만 아니었어도 은설과 그렇게 헤어지지 않았을 것 아닌가 말이다.
그는 그 분노를 철혈마련 무사들을 향해 내뿜었다.
천망검이 지나간 자리에는 버티고 서 있는 자가 없었다.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시간조차 없이, 단 두 명에 의해 상황이 뒤집어졌다.
철혈마련의 장로 중 하나, 한상귀가 혁무천을 알아본 것은 그때였다.
‘저, 저놈은……!’
때마침 전음이 고막을 울렸다.
<날 따라오시오.>
혁무천은 전음을 보내고 훌쩍 몸을 날렸다. 동대안에게 철수명령을 내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동 형, 그만하고 갑시다.”
한참 실력을 뽐내던 동대안은 아쉬움을 안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멍하니 서 있던 황보수의 귀에 아련한 전음이 들렸다.
<나중에 내가 찾아가지. 그날의 일에 대해서 나를 납득시킬 수 있는 변명을 준비해둬야 할 거야. 그러지 않으면 당신만이 아니라 그 일에 관련된 모두가 지옥을 마주하게 될 거다.>
***
계곡 입구에서 이백여 장 떨어진 곳.
혁무천은 걸음을 멈추고 어둠을 응시했다.
계곡 안에서는 여전히 격전의 굉음과 비명, 악다구니에 가까운 고함소리가 뒤섞여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로서는 어느 쪽이 이기든 상관없었다.
곧 한상귀가 그에게 다가왔다.
이 장 앞에 멈춰 선 그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원해서 온 것이 아니네.”
“나도 알고 있소. 장로와 내가 만난다는 걸 우문척이 알고 있었소.”
한상귀가 눈을 홉떴다.
“그게…… 정말인가?”
“지금까지 상황으로 봐서는, 확실하오.”
한상귀의 눈빛이 흔들렸다.
“으으음, 곤란하게 됐군.”
우문척이 그 문제를 따지고 든다면 골치 아파질 수밖에 없다.
“너무 걱정할 것 없소. 그도 그 이상 알지 못하는 한 장로를 어떻게 하지는 못할 테니까.”
혁무천이 몇 마디 더 하고 나서야 한상귀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두 사람의 관계를 아는 것은 중요치 않았다. 자신이 무천에게 정파의 무공을 얻었다는 사실만 모르면 되었다.
‘그래, 자세한 사정을 모른다면 우문척도 나를 몰아붙일 수 없어.’
나름대로 계산을 따져본 한상귀가 본래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알겠네. 자네만 입을 다문다면 대공자도 우리의 일을 알 수 없을 거네.”
-나도 말하지 않을 테니, 너도 말하지 마라.
그 말이었다.
“장로도 알다시피 나는 그에게 그 말을 할 이유가 없소. 이제 그날 장로가 받은 정보에 대해서 말해 보시오.”
한상귀도 오늘만큼은 돌려서 말하지 않았다.
“주산도에서 정파의 무사로 보이는 자들이 몇 육지로 나왔는데, 그 중에 설이라는 이름을 가진 스무 살 정도의 아름다운 여자가 있었다고 하네.”
나이와 이름이 같다. 아름다운 여자라는 것도.
“그런데 주산도에 들어갈 때는 없었던 여자라고 하더군.”
들어갈 때 없었다면 주산도에서 나온 여자라는 말.
“내 생각하기에…… 십중팔구는 자네 동생이 맞는 것 같네.”
참으로 다행이다.
정파무사들과 함께 움직이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쨌든 그 당시 주산도를 나왔다면 지금쯤은 절강성을 벗어났을 터. 지금은 어디에 있을까.
“그들에게 추적을 붙였소?”
“물론이네.”
아마 은설 때문이라기보다 정파 무사들을 쫓기 위해서 붙인 추적일 것이다.
“혹시 그들이 어느 쪽으로 향했는지는 아시오?”
“전서에 적힌 대로라면, 그들은 항주를 거쳐 서북 방향으로 향하고 있을 것이네. 내 생각으로는, 중원으로 가는 것 같더군.”
혁무천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은설과 함께 있는 자들이 천기회 사람들이라면, 생각보다 빨리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그때 눈치를 보던 한상귀가 말했다.
“이제 자네가 약속을 지킬 차례인 것 같네만.”
혁무천은 품속에서 얇은 책자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건곤붕산도와 혼천장의 구결이 적혀 있소. 두 가지 무공을 모두 주는 대신, 장로도 동생에 대한 소식이 들어오면 알려주셔야 하오.”
한상귀는 혁무천의 손에 들린 책자를 보고 침을 삼켰다.
솔직히 오늘 두 가지 무공을 모두 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건곤붕산도의 나머지 구결만 줘도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다른 것도 아니고, 건곤도제가 자랑하던 건곤쌍무 중 하나인 혼천장까지 주다니.
결국 건곤도제의 비전 무공 두 가지가 모두 자신의 손에 들어왔다는 말 아닌가 말이다.
책을 향해 내미는 그의 손이 잘게 떨렸다.
“어떻게 알려주면 되는가?”
“내가 주기적으로 사람을 보낼 거요.”
“좋아, 그럼 그렇게 하지.”
한상귀는 혁무천의 조건을 흔쾌히 들어주고 책을 넘겨받았다. 손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지만 밤이어서 표는 나지 않았다.
“하나만 더 알아두시오.”
“말해보게.”
“어쩌면 우문척이 장로를 통해서 나에게 말을 전할지도 모르오.”
“…….”
한상귀의 표정이 다시 굳어졌다.
“그가 나를 죽이기 전에는 장로 역시 건들지 않을 것이니 걱정할 것은 없소. 장로는 그저 그가 한 말을 나에게 전해주기만 하면 되오.”
그제야 한상귀가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가 본 무천은 쉽게 죽을 놈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자신의 목숨 역시 그만큼 오래 갈 것 아닌가 말이다.
“흠, 그렇군. 알겠네. 더 할 말 없으면 가보겠네.”
책을 품속에 넣은 그는 행여나 혁무천이 붙잡을세라 그 즉시 그곳을 떠나갔다.
혁무천은 사라지는 한상귀의 등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우측으로 돌려 어둠 속을 바라보았다.
어둠 깊은 곳에 내려앉아 앉아 있던 그림자 하나도 곧 그곳에서 사라졌다.
***
계곡 안에서 들리던 싸움 소리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지원 대상이었던 황보수와 정의단 청년기재들이 계곡을 빠져나가자, 남궁무룡이 명령을 내렸다.
“정은맹 무사들은 계곡을 빠져나가라!”
어둠을 뒤흔드는 일갈에 정은맹의 지원무사들이 후퇴하기 시작했다.
철혈마련은 그들의 뒤를 추적하지 않았다.
우문척으로서는 이제 추적을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정은맹의 비밀 수련장을 제거하고 비급도 상당수 챙겼다.
게다가 두 번째 목적도 이루었다.
쥐새끼 굴에 숨어 있는 정은맹을 끌어냈지 않은가. 이제부터 그들은 철혈마련의 눈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진짜 사냥은 이제부터라고 할 수 있지.’
반면 천화광은 불만이 많았다.
보아하니 우문척은 뭔가를 얻은 듯했다. 하지만 만마성은 얻은 것도 없이 피해만 본 셈 아닌가 말이다.
“척 형님, 저들을 그냥 보낼 겁니까?”
“쫓아가고 싶으면 좋을 대로 하게. 우린 하루 종일 추적하며 싸웠기 때문에 좀 쉬어야 할 것 같아.”
사실이 그러했다.
장로들도 지친 터라 우문척의 말에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천화광은 속이 끓었다.
하지만 당장 추격 명령을 내리지는 못했다.
정은맹 무사들을 검절 창천신검과 도절 벽력신도가 이끌고 있었다. 자신들만으로 추적하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우문척, 소문보다 더 교활하구나.’
끓는 속을 가라앉힌 천화광은 철혈마련과 따로 움직이기로 했다.
지금은 함께 있어봐야 이익 될 것이 없었다.
“그럼 우리 먼저 가보겠습니다.”
뒤를 쫓다 보면 언젠가는 기회가 오지 않겠는가.
우문척은 말이라도 미안한 척했다.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하군. 어느 정도 몸이 추슬러지면 뒤쫓아 가겠네.”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말이었지만, 천화광은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먼저 출발하지요.”
성의 없이 한마디 툭 내던진 그는 앞장서서 계곡 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우문척은 그 모습을 보면서 비릿한 조소를 지었다.
‘천화광, 이제 곧 사람들이 천하제일마세를 논할 때 철혈마련이 가장 높은 자리에 서게 될 거다.’
세인들은 만마성과 철혈마련, 마천문을 삼천마세로 부르며 팔대마세 중 최강으로 쳐주었다.
그러나 알게 모르게 그들 사이에도 서열이 존재했다.
만마성이 최강이고, 철혈마련과 마천문이 비등한 힘으로 바로 아래 자리를 차지했다.
수십 년 동안이나.
‘이제는 바뀔 때도 되었어.’
그때 혈영이 그에게 다가왔다.
“대공, 한상귀가 무천을 만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