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천화 11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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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화
“쌍…마괴?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마라! 쌍마괴가 어떤 사람들인데 너희들과 싸우다 도망친단 말이냐?”
다른 사람들도 입을 닫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강탁의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디서 거짓말을 해도…….
-저놈이 죽으려고 환장했나?
그런 표정들.
“이틀 전의 일이니까, 당신도 곧 알게 될 거야. 내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스릉.
강탁은 차갑게 말하며 검을 뽑았다.
기세가 조금 전과 확연히 달라졌다.
그간의 노력으로 절정의 단계에 들어선 그였다.
아직은 동대안의 검을 삼 초도 받아내기 힘들지만, 앞에서 거들먹거리는 자 정도는 어렵지 않게 눕힐 수 있었다.
“그래도 비무를 하고 싶다면 받아주지. 참고로, 내 검에는 눈이 없어. 혹시라도 다치면 나를 원망하지 마.”
화르르르.
강탁의 검에서 검기가 피어나더니 파도처럼 일렁거렸다.
장한은 강탁의 기세에 질려서 바로 꼬리를 말았다.
“내, 내가 말을 심하게 한 것 같소. 지금은 바쁘니 비무는 다음에 합시다.”
얼굴이 벌게진 그는 대충 얼버무리고는 재빨리 식당에서 나갔다.
그 이후로는 누구도 더 이상 시비를 걸지 않았다.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자는 몇 있었지만.
식당에서 벌어진 일은 곧 은안당(隱眼堂) 당주이자 제갈세가의 정보책임자인 제갈진학에게 알려졌다.
제갈진학은 조카인 제갈인의 말을 듣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야? 쌍마괴를 물리친 자들이 있다고?”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물론 거짓말을 한 것이겠지만…….”
“아니, 거짓말이 아닐 수도 있다.”
“예?”
제갈진학은 놀란 제갈인의 말에 바로 대답하지 않고, 눈을 가늘게 좁힌 채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쳤다.
그러다 찻잔을 들어 입술을 축이고는 입을 열었다.
“수주에서 첩보가 하나 들어왔다. 혈왕동의 쌍마괴 제자인 여치가 죽고, 쌍마괴 중 홍마괴가 중상을 입었다고 한다.”
“…….”
“그자가 말한 이틀 전에.”
“그럼……?”
“게다가 청마괴는 물론, 혈마룡 능화까지 부상을 당한 것 같다는 소식이다.”
“맙소사.”
“지금부터 그자들의 움직임을 철저히 살펴봐라. 절대 가까이 접근하지 말고, 멀리서만 살펴봐라.”
“예, 숙부. 그런데… 위종이 그자들을 데려왔다고 합니다.”
“……뭐?”
제갈진학의 안색이 급변했다.
제갈위종이 지금은 술이나 마시며 한량처럼 지내고 있지만, 오륙 년 전만 해도 제갈위명보다 뛰어난 기재로 평가받고 있었다.
만약 그가 고수들을 영입해서 형의 자리를 욕심낸다면?
‘아냐, 그럴 리 없어.’
그러나 세상일이라는 것은 아무도 모른다.
제갈위종이라 해서 욕심이 없겠는가.
더구나 쌍마괴와 혈마룡을 물리친 절정고수들을 말도 없이 데려왔다는 것은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가주께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구나.’
혁무천은 겨우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갔다.
뾰족하게 깎은 나뭇가지로 이를 쑤시던 동대안이 넌지시 물었다.
“무천, 언제 떠날 거지? 여기 더 있다가는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은데, 정말로 혼인식까지 보고 갈 생각인가?”
“혼인식은 관심 없소.”
“그럼……?”
“그래도 식을 올릴 때까지는 있을 생각이오.”
동대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혼인식에 관심이 없다면서 왜 식을 올릴 때까지 있겠다는 건가?”
“혼인식 때가 되면 제갈세가에 와 있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습을 드러낼 거요.”
목량은 혁무천의 말속에 숨은 뜻을 짐작했다.
“아무리 힘이 약해졌다 해도 정파의 주축 중 하나인 제갈세가입니다. 마도세력에서도 축하한다는 명분으로 사람을 보내 정파의 분위기를 파악하려고 할 겁니다. 그들의 행동을 지켜보면 앞으로 벌어질 일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혁무천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마 눈치 싸움이 심할 거다. 구경하다 보면 누가 우리에게 이익이 되는지 알 수 있겠지.”
***
제갈위종은 오시가 되기도 전에 제갈세가의 가주인 부친에게 불려갔다.
제갈진현은 이미 은안당주 제갈진학에게 사정을 다 들은 터였다.
“정말 그자가 누군지도 모르고 데려왔단 말이냐?”
“예, 아버님.”
“본가에 온 정확한 목적도 모르고?”
“그렇습니다.”
제갈진현은 아들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흔들림이 없었다. 거짓이 아닌 듯했다.
그렇다면 정말 모르고 데려왔다는 건데….
“허어…….”
제갈진현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무천이란 자와 그의 일행에 의해 쌍마괴와 혈마룡이 밀렸다고 했다.
팔대마세 중 하나인 혈왕동의 주력고수가 이름도 없는 자들에게 당한 셈이었다.
평소였다면 박수를 쳐줄 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자들로 인해서 무슨 일이 발생할지 아무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딸이 혼인식을 치르는 날이거늘.
“그들은 네가 맡아라. 절대 엉뚱한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되느니라.”
“예, 아버님.”
그때 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가주께 아룁니다. 객당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합니다.”
객당이라면?
제갈진현과 제갈위종의 눈이 마주쳤다.
“빨리 가봐라.”
“예.”
제갈위종이 부리나케 나간 후, 제갈진현은 허공을 보며 이마를 찌푸렸다.
‘다행히 별다른 의미 없이 데려온 것 같아 다행이긴 한데…….’
제갈진학의 우려와 달리 별일은 아닌 듯했다.
그래도 어쨌든 생각지 못한 인물의 방문은 목에 가시가 박힌 것처럼 껄끄러웠다.
무천이란 자의 일행뿐만이 아니었다.
마도의 고수들이 다수 들어와 있었다. 지나가다 축하해주기 위해 왔다는데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놈들의 눈을 철저히 속여야 돼.’
제갈진현은 차갑게 식은 눈빛으로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칠십여 년이다.
마도에 눌려 지낸 세월이.
이제 뒤집어야 할 때도 되지 않았는가 말이다.
***
“무천이란 자가 이곳에 있다고 들었다! 나와라!”
밖에서 고함소리가 들렸다.
혁무천은 미간을 찌푸렸지만 곧 일행과 함께 방을 나섰다.
객당의 마당에 네 사람이 서 있었다.
청의와 갈의를 입은 사십 대의 중년인 셋, 붉은 색이 반쯤 빠진 장포를 걸친 육순의 노인 하나.
그들에게서 흘러나온 강렬한 기세에 객당의 사람들은 슬금슬금 거리를 벌렸다.
그들 중 누군가가 네 사람의 정체에 대해 속삭이듯 말했다.
“누구지?”
“마천문의 적산삼마와 장로인 혈혼검(血魂劍) 노명 같은데?”
“마도에서 고수들이 왔다더니 정말이군.”
덕분에 네 사람의 정체를 알게 된 혁무천이 그들을 보며 물었다.
“내가 무천이오. 무슨 일로 나를 찾은 거요?”
중년인 중 하나가 나서더니 눈에 힘을 주고 다그쳤다.
“너희들이 쌍마괴를 물리쳤다는 말을 했다고 들었다. 어디서 헛소리를 하고 다니는 거냐?”
“자랑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헛소리를 한 것도 아니오.”
“흥!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럼 정말로 쌍마괴가 너희 같은 애송이들에게 패하기라도 했단 말이냐?”
“믿기 싫으면 믿지 마시오.”
“얼렁뚱땅 넘어갈 생각이라면 사람 잘못 만났다! 뚫린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해도 되는 줄 아느냐?”
뚱하니 쳐다보던 동대안이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거, 사람 말을 왜 못 믿는 거요? 나이를 똥구멍으로 드셨나?”
“뭐야? 순순히 잘못을 시인했으면 팔 하나 자르는 걸로 용서해주려 했거늘, 참으로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팔을 잘라? 누구 팔을? 이 양반이 미쳤나?”
“이놈!”
“주둥이에 똥칠을 했나, 왜 말끝마다 욕이야? 생긴 것도 꼭 으깨진 호박처럼 생긴 사람이.”
챙!
중년인이 검을 뽑더니 땅을 박차고 동대안을 공격했다.
적산삼마 중 둘째인 고중의 얼굴은 어릴 때 병을 앓아서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거기다 숱한 싸움을 겪으면서 상처까지 더해진 바람에 동대안의 말처럼 보기 좋은 얼굴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든 자신의 약점을 공격하면 분노가 폭발하는 법이다.
“눈깔이나 아니나 쥐똥만 한 놈이 어디서!”
“그래, 내 눈깔 작다! 그래서 어쩌라고!”
동대안도 섬혼을 빼들었다.
슈아악!
마치 검집에서 번갯불이 튀어나오 듯했다.
고중은 섬뜩한 느낌이 들자 반사적으로 몸을 틀면서 정신없이 검을 휘둘렀다.
“차아앗!”
분명 뭔가가 날아오는 것 같은데 그림자도 보이지도 않았다.
휘두르는 검에 아무 것도 걸리지 않았다.
‘뭐, 뭐야?’
그는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두르며 뒤로 물러났다.
그런데……
“흥! 시끄러워질 것 같아서 봐준 줄 알아.”
눈깔이나 아니나 쥐똥만 한 놈이 이상한 소리를 했다.
봐주긴 뭘 봐줘?
그때 가슴과 옆구리에서 시원한 바람이 느껴졌다.
슬쩍 눈을 내려 몸을 살펴보니, 구멍이 몇 개 뚫려 있었다.
조금 전만 해도 없던 구멍이.
제갈세가에 오면서 새 옷을 사 입었기에 자신이 잘못 안 것은 아니었다.
‘설마… 조금 전의 공격 때문에……?’
안색이 해쓱해진 그가 형제들을 바라보았다.
형인 고증과 셋째인 고삼이 창백해진 얼굴로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겪은 일이 사실인 듯했다.
그때 혈혼검 노명이 침중한 표정으로 나섰다.
“물러서라. 네가 상대할 수 없는 자다.”
동대안이 히죽 웃었다.
“노인네가 뭘 아는군.”
노명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평상시였다면 감을 따듯 머리를 돌려서 목을 똑 따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놈의 검은 소름끼치도록 빨랐다.
정말 쌍마괴를 이겼다면, 놈의 목을 따기도 전에 자신의 가슴에 구멍이 날 수도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쾌검이군. 거기다 변화까지 무쌍하니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섬뜩할 정도야.”
“청마괴 늙은이도 오줌을 찔끔 쌌지.”
“…….”
노명은 대꾸 대신 노려보기만 했다.
한참 만에 미간을 씰룩인 그가 말했다.
“그 검을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군.”
이번에는 동대안이 입을 닫았다.
강호가 넓긴 하나, 섬혼처럼 꼬챙이 같은 검으로 펼치는 검법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 말하는 투를 보아하니 자신의 검법, 광혼검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은 처음 보는 자. 그럼 혹시 사부를 만났던 것 아닐까?
아니나 다를까 노명이 말했다.
“이십 년쯤 되었나? 도씨 성을 썼던 것 같은데…… 이름이 가물거리는군.”
도위당. 사부의 이름이다.
“그의 제자인가?”
“사부 영감은 강호에 거의 나가지 않았는데, 용케 만났군.”
“정말 그의 제자라면, 광천곡의 후예겠군.”
동대안은 움찔거리며 슬쩍 혁무천의 눈치를 살폈다.
광혼검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처럼 아무런 표정변화도 없었다. 어떻게 보면 입술 끝이 살짝 올라간 것 같기도 하고…….
‘지미, 진짜 알고 있었나 보네. 그러면서도 모른 척하다니. 괜히 나만 숨기느라고 고민했잖아? 하여간 능구렁이가 따로 없다니까.’
어쨌든 알고 있다면 돌려서 말해봐야 속만 보일 뿐이다.
차라리 이 기회에 속에 있는 말을 꺼내서 무천의 반응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부인하진 않겠어. 그런데 광천곡을 아는 걸 보니 당신도 배신자들 중 하나 같은데, 아니면 목숨을 구하기 위해 형제들을 내팽개치고 도망쳤던 자들 중 하나든가.”
노명이 천천히 검을 뽑았다.
“어느 쪽이면 뭐하나? 어차피 등을 돌린 건 마찬가지인데.”
“하긴…….”
노명이 빼든 검을 사선으로 내리고 동대안을 노려보았다.
“전력을 다할 거다. 죽지 않으려면 젖 먹던 힘까지 다 꺼내라.”
“걱정 마, 늙은이 하나 정도는 감당할 수 있으니까.”
순간, 노명이 먼저 땅을 박차고 쇄도했다.
동대안도 거의 동시에 몸을 날리며 섬혼을 뻗었다.
처음부터 칠혼살이 펼쳐지며 허공에 일곱 개의 구멍을 뚫었다.
따라라랑!
동시다발적으로 귀청을 찢는 소리가 울렸다.
부서진 검기가 불꽃처럼 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