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천화 1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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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35회 작성일소설 읽기 : 귀환천화 112화
112화
묘의 밑단은 폭이 십 장이나 되었고, 높이 역시 오 장이나 되었다.
각 묘 앞에는 거대한 비석이 두세 개씩 서 있었다.
혁무천은 비문을 빠르게 읽어보았다.
대부분 묘의 주인에 대한 기록이었다.
그의 눈빛이 반짝인 것은 다섯 번째 묘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만마총의 묘 중에서도 그 묘가 가장 컸다.
비문을 보니 대마천 오대마종 중 하나였던 만마대종 천국승의 묘였다.
만감이 교차했다.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지 않은데 그는 무덤 속에 있었다.
어차피 무덤에 묻힐 거면서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자신을 배신했을까.
씁쓸한 마음으로 묘를 바라본 혁무천은 고개를 흔들며 몸을 돌렸다.
그때 한 사람이 묘를 돌아 나왔다.
나이를 짐작하기 힘든 노인이었다.
농부나 다름없는 평범한 복장. 구부정한 허리. 어깨에 망태기를 메고 손에 낫을 든 걸 보니 만마총을 관리하는 사람인 듯했다.
노인은 혁무천과 천화광을 보더니 허리를 숙였다.
혁무천이 노인에게 물었다.
“노인장께서 만마총을 관리하시오?”
“예, 나리. 이제 석 달 되었습죠.”
“다른 사람은 없소?”
“무사님들 빼면 저 혼자입니다요.”
혁무천은 고개를 주억거리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노인의 곁을 스쳐가다 말고 걸음을 멈추었다.
“바뀐 지 석 달 되었다고 하셨소?”
“예, 나리.”
“그럼 전에는 누가 관리했소?”
“안 씨였는데, 석 달 전에 죽었습니다요.”
“병으로 죽은 거요?”
“그게 아니라…….”
노인이 눈치를 보며 머뭇거렸다.
혁무천은 천화광을 돌아다보았다.
“자네도 아는 일인가?”
“얼마 전에 알았네. 자신의 거처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고 하더군. 그 일 때문에 발칵 뒤집혔었지.”
“그는 이곳에서 얼마나 일했지?”
“아마 이십 년쯤 되었을 거네. 내가 어릴 때부터 봤으니까.”
“그도 무공을 모르는 평범한 사람이었나?”
천화광이 그 말에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답했다.
“그건 아니고… 본래 장로였던 분인데, 오래 전에 부상을 입어서 여생을 여기서 보내셨다고 들었네. 그런데 왜 그런가?”
혁무천은 대충 둘러댔다.
“뭔가 좀 이상해서.”
“뭐가?”
“만마총에 가져갈 것도 없다고 했는데, 경비무사가 지키는 이곳에 들어와서 무덤을 관리하는 노인을 죽인다? 왠지 이상하지 않나?”
“그건 그런데… 묘 속에 값비싼 보물이라도 함께 넣은 줄 알고 훔치기 위해 들어온 것일 수도 있지.”
“훗, 만마성의 성주들이 잠든 곳에 도둑질하기 위해 들어온다고? 경비무사들까지 있는 곳에?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하긴…….”
천화광도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그 이상 의문을 품지는 않았다.
그에게 무덤 관리자의 죽음은 관심 밖이었다. 아무리 전대에 장로였다 해도.
그러나 혁무천은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노인장, 혹시 그 사람이 남긴 물건이 아직 남아 있소?”
“한쪽에 모아 놓긴 했습니다만…….”
“혹시 죽음에 대한 단서가 있을지 모르니 한번 봤으면 싶소만.”
천화광이 그 말을 듣고 이마를 찌푸렸다.
“왜 그렇게 관심을 갖는 거야?”
“사람이 죽었다는데 모르는 척 하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오지랖도 넓군.”
혁무천은 천화광이 투덜거리든 말든 노인을 재촉해서 거처로 갔다.
협곡 안의 제각에 붙어 있는 방이 노인의 거처여서 다행히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되었다.
안 씨 노인, 안효문의 유품은 얼기설기 엮은 커다란 망태기 안에 있었다.
대충 봐도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혁무천은 혹시나 혈천여록과 관련된 것이 있는지 찾아보았지만, 종이로 된 것은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안효문의 유품을 둘러보는 동안 천화광은 투덜대면서 밖으로 나갔다.
혁무천도 의심이 가는 물건을 찾지 못하자 아쉬움을 접고 일어섰다.
‘장 노인이 몰래 들어와서 숨겨 놓았을 리는 없다. 그럼 안효문이라는 자에게 맡겨 놓았을 가능성이 큰데…….’
그는 나가기 전에 노인을 보고 물어보았다.
“혹시 안 씨 노인이 따로 맡겨 놓은 건 없소? 아니면 이상한 거라도 봤다든가.”
“저는 그 양반이 돌아가신 후에 와서 보지도 못했습죠.”
“그랬군요.”
하긴 선임이 죽은 이후에 온 사람이 뭘 알까.
혁무천은 아쉬움을 접고 몸을 돌렸다.
“저…….”
노인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자 혁무천이 고개를 돌렸다.
“하고 싶은 말씀이라도 있소?”
“이것도 이상한 거라면 이상한 건데… 안 씨가 죽은 후, 무덤 중 하나가 도굴을 당했습니다요.”
도굴?
“어느 무덤이었소?”
“사대 성주셨던 천국승 성주님의 무덤이었습죠.”
대마천 오대 마종 중 하나였던 천국승의 묘가 도굴을 당했다?
왠지 기이한 생각이 들었다.
“무덤 안에서 뭘 잃어버렸는지 아시오?”
“그것까지는 잘 모릅니다요.”
혁무천은 두어 가지를 더 물어본 후 밖으로 나갔다.
천화광이 뒷짐을 진 채 묘를 보고 있었다.
혁무천이 나온 것을 그도 알았는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가끔 무덤을 이렇게 크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죽어 한줌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이 저런 무덤을 만드는 건 욕망 때문이겠지. 아마 저 무거운 돌덩어리를 무덤 속에서 이고 있는 것도 힘들 거다.”
“훗, 말이 그렇게 되나?”
천화광이 피식, 웃고는 고개를 돌렸다.
“찾고자 하는 것은 찾았나?”
“아니. 그래서 말할 게 있다.”
“뭔데?”
“천국승 성주의 묘가 도굴 당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 말에 천화광이 이마를 찌푸렸다.
“늙은이 입이 가볍군.”
“그냥 놔둬. 만약 저 노인이 쫓겨나거나 죽으면 너하고의 친구 사이도 끝낼 거다.”
“쳇. 늙은이 목숨 하나가 뭐 대단해서.”
“아무래도 여기서 끝내는 게 낫겠군.”
“아아, 알았어. 그냥 놔두지 뭐.”
천화광이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그는 하찮은 늙은이 하나 때문에 혁무천과의 관계를 끝내고 싶지 않았다.
“천국승 성주의 묘에서 잃어버린 것이 어떤 건지 아나?”
“나도 정확히는 몰라. 아마 선조님의 저승길 여비로 쓰시라고 넣어놓은 값비싼 물건을 훔쳐갔겠지.”
“들어가 봤으면 좋겠는데.”
천화광의 눈이 커졌다.
“무덤 안에?”
“그래.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거든.”
천화광이 혁무천을 빤히 쳐다보았다.
“도대체 뭘 찾는 거지?”
“너는 몰라도 돼.”
“난데없이 만마총에 와서 별 볼일 없는 것을 찾으려는 것은 아닐 거고… 말해봐, 말해주면 혹시 아나? 들어가게 해줄지.”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흥, 날 바보로 아나? 이곳은 만마성의 정예무사들이 하루 열두 시진 철저하게 경비를 서는 곳이야. 그런데도 몰래 들어와서 훔쳐간 물건이 아무 것도 아닐 거다?”
“완전 돌머리는 아니군.”
“……뭐?”
천화광은 만마성의 미래라고 불릴 정도로 뛰어난 기재다.
그런 기재를 돌머리에 비교하다니.
천화광은 어이가 없음에도, 태연하게 말하는 혁무천의 태도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자넨 정말 알 수 없는 친구군.”
“들여보내줄 거야, 말 거야?”
“안 된다면?”
“그럼 저녁에 몰래 와서 들어가 봐야지.”
“…….”
설마 그렇게 말할 줄이야.
하지만 아직 혁무천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조용히 일을 마치려면 아마 이곳에 있는 경비무사들부터 입을 막아야겠지.”
“뭐?”
“그리고 다른 무덤도 모두 구경해 볼 거다.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마음에 드는 것이 있을지 모르니 포대도 하나 갖고 와야겠군.”
천화광은 너무 어이가 없으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갖고 나오기라도 할 것 같은 말투였다.
“경비를 세 배로 늘려야겠군.”
“그럼 염왕이 바빠지겠지. 그만큼 많은 사람이 지옥에 갈 테니까.”
“끄응.”
“왜, 내가 못할 것 같나?”
“후우, 제길, 괜히 데려온 것 같군.”
“아직 실망한 건 없어. 순순히 들여보내준다면 대신 그만한 대가를 주지.”
“대가?”
천화광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을 발했다.
아마 동대안이 들었다면 미쳤다며 혁무천을 말렸을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천화광에게 그런 조건을 걸다니.
그가 만약 엉뚱한 요구라도 한다면…….
다행히 혁무천이 먼저 조건에 대해 말했다.
“누구든, 내가 죽이려는 사람 중 네가 살려주길 바라는 사람이 있으면 무조건 한 번은 살려주마. 그중에 너를 포함시켜도 돼.”
이번에는 다른 쪽으로 실망한 천화광이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어이가 없군. 자네가 무슨 염라대왕이라도 되는 줄 아나?”
“비록 염라대왕은 아니지만, 그와 담판을 지을 정도는 되지.”
“후우우우, 그런 어처구니없는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지…….”
이제는 어이가 없다 못해 한숨이 절로 나왔다.
만마공자 천화광 앞에서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러든 말든 혁무천은 그를 더 몰아붙였다.
“어떻게 할 거냐? 들여보내 줄 거냐, 말 거냐?”
천화광이 콧등을 씰룩이더니 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일각. 그 이상은 안 되네. 자칫 들키면 나도 곤란해지거든. 그것도 자네가 친구라서 허락하는 거야. 대신 안에 있는 것은 먼지 한 톨도 갖고 나오면 안 되네.”
그로서는 겨우 맺은 관계를 무덤 구경 때문에 해치고 싶지 않았다.
“좋아, 그 정도면 충분해.”
천국승의 묘는 들어가는 입구조차 사람이 서서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거대했다.
밖은 무려 사방 석 자나 되는 돌덩어리로 쌓여있었지만, 안쪽은 벽돌로 이루어져 있었다.
중심부에 있는 석대 위에 커다란 관이 놓여 있고, 전후좌우에는 십이지의 형상을 한 석상들이 호위무사처럼 서 있었다.
횃불을 들고 들어간 혁무천은 커다란 관 옆에 있는 또 다른 석대를 바라보았다.
석대 위에는 값 비싸게 보이는 도자기와 금은으로 만들어진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횃불에 반사되어서인지 휘황찬란한 빛을 발했다.
하지만 혁무천의 시선은 한 곳에 고정되어서 움직이지 않았다.
도자기와 금은보화 한쪽에 옅은 자국이 나 있었다.
사각형의 자국.
언뜻 봐도 책이 놓여 있던 자리라고 생각되었다.
‘만약 이곳에 정말 혈천여록이 있었고, 잃어버린 물건이 그것이라면 앞으로 골치가 아파지겠군.’
혁무천은 미간을 좁히고 무덤 안을 둘러보았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혈천여록이었다. 제아무리 값나가는 보물이라 해도 관심 밖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흔적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먼지가 쌓여 있던 곳에 놓였던 뭔가가 만들어낸 사각의 흔적.
‘책이 놓여 있던 흔적이다.’
그랬다. 사각의 흔적은 책의 크기와 비슷했다.
그것도 처음부터 놓였던 것이 아닌, 먼지가 쌓여 있던 곳에 올려놓은 흔적이었다.
심지어 옆으로 약간 쓸린 자국도 있었다.
누군가가 먼지가 쌓인 그곳에 물건을 올려놓았다는 뜻이다. 그것도 책을.
만마총을 관리하던 전대의 장로.
살해.
다른 사람의 묘도 아닌 천국승의 묘 안에 놓인 책자.
혁무천은 쓴웃음을 지었다.
‘어쩌면 안효문도 장염의 친구일 가능성이 크군.’
사실이 그랬다.
안효문은 장염의 오랜 친구였다.
그는 장염과 논의 끝에 혈천여록의 일부를 천국승의 무덤에 숨겼다.
그런데 그만 친구와 술을 한잔 마시다가 자신이 장염에게 뭔가를 받아서 숨겼다는 사실을 말해버리고 말았다.
당시 안효문은 혈천여록이라는 이름을 말하지 않았고, 그의 친구 역시 그 물건이 혈천여록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문제는 그 친구가 그 이야기를 또 다른 친구에게 했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한 사람이 안효문을 방문했고, 그를 고문한 후 죽였다.
천국승의 묘가 도굴을 당한 것도 그날이었다.
혁무천은 그에 대한 사실을 알지는 못하지만, 대략적인 추측은 할 수 있었다.
‘누군가가 혈천여록이 안효문의 손에 넘어갔다는 걸 알고 이곳에 와서 그를 죽였을 거다. 그렇다면…….’
범인을 찾아낼 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좀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하고, 시간이 걸릴 뿐.
혁무천은 약속한 일각이 되기 전에 묘를 나섰다.
그런데 밖으로 나가자, 분노가 담긴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비수처럼 귀청을 찔렀다.
“네놈은 누구냐? 누군데 감히 묘에 들어간 것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