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천화 111화
무료소설 귀환천하: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37회 작성일소설 읽기 : 귀환천화 111화
111화
혁무천은 능화가 펼친 핏빛 검화 속으로 검을 밀어넣으며 휘돌렸다.
마치 벼락의 검이 대기를 휘젓는 듯했다.
능화도 이를 악물고 맞섰다.
두 사람 사이에서 두 줄기 검기가 뒤엉키며 회오리쳤다.
쩌저저저정!
가공할 기운이 충돌하며 귀청을 터트리는 굉음이 연속적으로 터져 나왔다.
따당!
결국 힘에 밀린 능화의 검이 튕겨나갔다.
대경한 능화는 혁무천이 재차 공격하기 전에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혁무천은 그를 따라붙지 않았다. 우뚝 선 채 손을 뻗어서 검으로 그를 가리키기만 했다.
일 장 여덟 자의 거리를 둔 상황.
온몸을 휘젓는 충격의 여운에 능화의 전신이 잘게 떨렸다.
하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전면만 응시했다.
눈도 깜박거리지 않았다.
상당히 떨어진 거리인데도 바로 눈앞에 혁무천의 검이 있는 듯했다.
움직이면 혁무천의 검에 이마가 꿰뚫릴 것만 같았다.
단순히 느낌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미간이 시큰거렸다. 마치 살이 갈라지는 듯했다.
“마지막 기회를 주마. 오늘 일을 털어버리고 물러가겠다면 나도 검을 거두겠다. 하지만 끝까지 해보겠다면… 염왕을 만나게 해주지.”
능화는 더 버티지 못하고 겨우 입을 열었다.
“조, 좋다. ……물러가지.”
혁무천은 무심한 눈으로 그를 보며 검을 거두었다.
만마성과의 약속 때문에 멈춘 것만은 아니었다. 아직은 혈왕동과의 관계가 악화되어선 안 되었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위해서라도.
이미 옆에서 벌어지던 싸움은 멈춘 상태였다.
호위무사들은 모두 쓰러져서 바닥을 기었다. 죽은 자는 없었다.
청마괴와 동대안만 서로를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고 있었다.
“언젠가 네놈의 콩알 같은 눈알을 빼서 씹어 먹고 말 것이니라.”
“늙은이 맘대로 안 될걸? 오히려 다음부터는 날 보면 도망 다녀야 할 거요. 내 검에 꼬치구이가 안 되려면.”
청마괴는 당장 동대안을 다져버리고 싶었지만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속만 끓었다.
“내 네놈을 죽여서 포를 떠…….”
“그만 갑시다, 장로.”
능화가 짜증내듯 말했다.
청마괴는 혁무천을 힐끔거린 후 물러섰다.
홍마괴가 당하는 것을 본 그였다. 거기다 자신들보다 약하지 않은 능화마저 맥없이 패했다.
두 번 다시 만나기 싫은 놈이었다.
***
천화광이 객잔에 찾아온 것은 술시가 거의 다 지나갈 때였다.
그도 능화와 청마괴가 객잔에 찾아온 것을 아는 듯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능화의 코가 납작해졌더군.”
“죽일 걸 그랬나?”
“무슨 소리? 그럼 혈왕동의 살귀들이 몰려올 거네.”
천화광이 펄쩍 뛰었다.
그들이 두려워서 싫은 게 아니다. 귀찮게 하는 것이 싫을 뿐이다.
더구나 능화의 동생인 능향이라도 함께 온다면……?
그거야말로 최악이 될 것이다.
“이런, 그럴 줄 알았으면 정말 죽일 걸 그랬어. 그럼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생겼을 텐데.”
“보기보다 성격이 고약하군.”
“내 성격이 고약하다는 말을 만마공자에게 들을 줄은 몰랐군.”
“킁.”
콧소리를 낸 천화광이 코를 씰룩였다.
혁무천은 그쯤에서 화제를 돌렸다.
“만마총은 언제 갈 거지?”
천화광은 곤혹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대체 만마총을 왜 보려고 그러는지 모르겠군. 무덤 안에 귀한 것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이유는 알 것 없어. 너는 약속을 지키기만 하면 돼.”
“알았어, 약속을 했으니 지키지.”
천화광은 손사래를 치고는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우문소소가 철혈마련에서 나온 것은 알고 있나?”
“그 여자가 뭘 하든 내가 왜 신경을 써야 하지?”
“누군가를 찾고 있는 것 같더군. 처음에는 자네를 찾는 것이 아닌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여자를 찾고 있지 뭔가.”
관심을 보이지 않던 혁무천의 눈빛이 달라졌다.
우문소소가 여자를 찾는다고?
“그게 정말인가?”
“오늘 오전에 들어온 소식이네.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데, 자경산이 마부라고 하더군.”
우문소소가 찾고자 하는 여인이 누구겠는가.
물론 은설이 아닌 다른 여인을 찾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도 아닌 우문소소가 몰래 집을 나와서 찾으러 다닐 만한 여인이 그녀 외에 또 누가 있을까.
“지금 어디에 있지?”
“보고가 들어왔을 때는 육안에 있었는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네.”
은설은 천기회 사람들과 함께 있다.
특별한 일만 없다면 지금쯤 천기회의 보호를 받으며 와호산장에 있을 것이다.
‘우문소소와 자경산만으로는 설아를 건들지 못해.’
와호산장에는 기문진이 펼쳐져 있지 않은가.
기문진을 파훼하고 은설을 해치려 한다면 철혈마련도 엄청난 희생을 각오해야만 한다.
우문강천이라면 혈풍이 언제 불어 닥칠지 모르는 폭풍전야에 그런 일로 힘을 소모시키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혁무천은 불안한 마음을 다독이고 천화광을 다그쳤다.
“시간 끌 거 없이 내일 만마총을 방문할 수 있게 준비해 줘.”
“그거야 어렵지 않지. 아침에 바로 갈 건가?”
“좋아, 아침식사를 마치고 바로 출발하기로 하지.”
“그럼 그 이야기는 다 끝난 것 같은데… 술이나 한 잔 하세.”
천화광이 넌지시 말했다.
혁무천은 아직 도움을 받아야 할 것이 많은 터라 받아들이려 했다.
그런데 천화광이 말에 꼬리를 달았다.
“우리 둘이서만 조용한 곳에서 마시고 싶은데.”
땡그랑.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작은 소도로 손톱 사이를 긁고 있고 있던 동대안이 바닥에 소도를 떨어뜨렸다.
천화광은 그를 싸늘한 눈으로 째려보고는, 다시 혁무천의 의향을 물었다,
환한 미소로. 은근하게.
“어때? 내가 오늘 기가 막히게 좋은 곳을 알려주지.”
“됐어. 오늘은 쉬고 싶다. 능화와 한바탕 싸웠더니 피곤하군. 그만 가봐.”
혁무천이 단호하게 거부하자, 천화광이 토라진 여자처럼 투덜거렸다.
“쳇, 피곤하기는. 듣기로는 몇 초식 만에 싸움이 끝났다고 하던데…….”
결국 동대안이 배를 움켜쥐고 방을 나갔다.
“저녁 먹은 것이 잘못 되었나, 속이 느글거리는군. 나 먼저 내 방에 가서 쉬겠네.”
***
천화광은 미적대다가 해시가 다 지나갈 때쯤 되어서야 만마성으로 돌아갔다.
혁무천도 그제야 휴식을 취했다. 그런데 상념이 머릿속에 꽉 차서 운공을 하려 해도 정신이 집중되지 않았다.
우문소소가 은설을 찾고 있는 거라면 자신 때문이라고 봐야 했다.
별 탈은 없을 거라 생각하지만 세상일은 아무도 모른다.
차라리 우문소소를 찾아서 없애버릴까?
오죽하면 그런 생각도 해보았다.
하지만 그럴 경우 철혈마련이 나서서 자신과 은설을 잡으려 할지도 모른다.
일은 일대로 커지고, 은설도 더욱 위험한 상황에 처할 것이다.
답답해진 그는 소리 없이 객잔을 나와서 밤거리를 거닐었다. 조용한 곳에서 술이라도 한잔 마시며 심란한 마음을 다독이고 싶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객잔이 영업을 마치고 문을 닫은 상태였다.
‘술 마시는 것도 쉽지 않군.’
쓴웃음을 지은 그는 좌우를 둘러보았다.
그때 마침, 골목 안쪽에 있는 주루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자연스럽게 발길을 돌려서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주루는 허름하게 느껴질 정도로 작았다.
안쪽도 좁아서 탁자도 네 개가 전부였다.
그가 들어갔을 때는 탁자 네 곳 중 두 곳에 손님이 있었다.
그자는 등을 보이고 있었는데 뒷모습이 눈에 익었다.
탁자 위에 있는, 아무런 장식도 없는 흑갈색의 칼집과 손잡이가 손때로 번들거리는 칼도 전에 본 적이 있었다.
혁무천은 그자의 탁자로 가서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술이 가득 찬 술잔을 바라보고 있던 그자가 고개를 들었다.
텁수룩한 수염 사이로 꽉 다문 입술, 짙은 눈썹 사이의 날카로운 두 눈.
얼굴에 오래 되지 않은 상흔이 하나 길게 나 있었다.
역시 그였다. 사천 면양에서 만났던 장평.
혁무천이 그를 보며 말했다.
“오랜만이군.”
“…….”
“살아서 다시 만나면 내가 술을 산다고 했던 것 같은데. 오늘 마시는 술값은 내가 내지.”
피식.
장평의 입에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세상 좁군.”
그는 술잔을 들어서 목구멍 안으로 단숨에 털어 넣었다.
전이나 지금이나 술 마시는 모습은 변함이 없었다.
탁.
술잔을 내려놓은 그가 혁무천을 빤히 쳐다보았다.
“운이 좋았소. 얼굴에 칼자국 하나 생긴 대신 목숨을 건졌으니까.”
그때 숙수가 다가와서 퉁명스럽게 물었다.
“뭐 드실 거요?”
문 닫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때에 들어와서 마음에 안 드는 듯했다.
“귀하가 제일 자신 있게 만들 수 있는 안주와 여기서 제일 좋은 술을 주시오.”
“은자 한 냥이오.”
허름한 주루치고는 비싼 가격이었지만, 혁무천은 일언반구 없이 은자를 꺼내 주었다.
은자를 낚아챈 숙수는 언제 짜증을 냈냐는 듯 환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멍청한 놈. 비싸다고 하면 반냥으로 깎아주려고 했는데.
“이곳은 어쩐 일인가?”
“놈들의 눈을 피해서 다니다 보니 어느새 이곳까지 왔지 뭐요. 그래서 온 김에 만마성 구경이나 해볼까 생각 중이었소.”
“만마성에 들어갈 생각인가?”
“그게…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소. 내 성격이 좀 지랄 맞아서 말이오. 누구에게 명령을 받아가며 일하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고.”
“그럼 마땅히 할 일도 없겠군.”
“그런 셈이오.”
“그럼 나와 함께 가지.”
“당신과?”
“아마 내 일행들을 보면 그대도 마음에 들 거야. 그대만큼이나 이상하거든.”
“나만큼 이상하다? 흐음, 그건 마음에 드는군.”
사실 그보다는 앞에 있는 무천이란 자가 마음에 들었다. 혼자서 지내는 것도 서서히 지쳐가던 참이었고.
말을 나누는 사이 숙수가 술과 안주를 가져왔다.
술을 따르자 은은한 주향이 퍼졌다.
너무 진하지도 않고 특이하지도 않은, 너무 평범해서 마음이 편해지는 주향이었다.
혁무천은 장평의 빈 술잔에 술을 따랐다. 그러고는 자신의 잔에도 채웠다.
“싫으면 언제든 떠나도 돼.”
“그것도 마음에 드는군.”
둘은 서로 마주보더니 술잔을 들어서 목구멍에 털어 넣었다.
아침이 되자 사람들은 혁무천과 함께 서 있는 장평을 멀뚱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동대안이 물었다.
“그 친구는 누군가?”
“이름은 장평. 오늘부터 우리와 함께 있기로 한 친구요.”
“인상 하나는 마음에 드는군. 난 동대안일세.”
이후 목량과 강탁, 영추문, 장대산이 장평과 인사를 나누었다.
장평은 인사를 나누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동대안과 마주한 순간에는 무사의 피가 끓었고, 영추문을 봤을 때는 이상하게 가슴이 뛰었다.
장대산에 대해서는 그저 경악스러울 뿐이었다.
사람이 저렇게 클 수도 있다니!
그나마 목량과 강탁 정도가 평범하게 보였는데, 그들 역시 자신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고수들이었다.
‘확실히 무 형의 말대로 이상하고 재미있는 사람들이군.’
진시 말, 아침식사를 마쳤을 때 천화광이 객잔으로 찾아왔다.
혁무천은 일행을 객잔에 남겨놓고 혼자 천화광을 따라가기로 했다.
동대안이 걱정스런 표정을 짓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주의를 주었다.
“조심하게. 이상한 곳에 가자고 하면 가지 말고. 특히 물이나 술을 주면 잘 살펴보고 마셔야 하네. 음약이 들어 있을지도 모르니까.”
“…….”
혁무천은 동대안의 작은 눈을 쳐다보고는 몸을 돌렸다.
한마디 해주고 싶었는데, 작은 눈에 진심이 가득했다.
게다가 정말 그런 일이 없을 거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객잔을 나선 혁무천은 천화광과 함께 만마총으로 향했다.
***
만마총은 만마성에서 이십 리 떨어진 협곡 안에 있었다.
밖에서 보면 좁은 협곡인데, 안으로 들어가니 일만 평이 넘는 드넓은 평지가 나왔다.
그곳에 역대 만마성의 성주들이 잠들어 있는 거대한 묘가 늘어서 있었다.
만마총을 지키는 경비무사들은 방문자가 천화광임을 알고 바짝 긴장했다.
“여기서 뭘 보고 싶다는 건지 모르겠군.”
혁무천도 이곳 어디에 혈천여록의 일부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장대산도 단지 하늘에 오를 수 있는 길이 이곳에 있다는 말만 들었다고 했다.
그것이 혈천여록의 일부인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혁무천은 천화광의 투덜거림을 뒤로 하고 눈빛을 빛내며 묘 사이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