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천화 10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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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36회 작성일소설 읽기 : 귀환천화 105화
105화
“그녀가 비명을 지르던가? 보통 겁탈을 당할 상황이 되면 비명을 지르는 법인데.”
“비명은 아니었지만…….”
“아마 진 소저가 그 방에 들어가는 걸 봤겠지. 안 그런가?”
“그, 그렇소.”
“진 소저가 상황을 봐서 문을 열어보라고 하지 않았나?”
“…….”
단순히 질문만 하는 게 아니었다. 심혼을 압박하는 기세가 양소를 짓눌렀다.
양소는 땀을 흘리며 주위의 눈치를 봤다.
진규청이 이마를 찌푸리고 한소리 했다.
“억지 부리지 마라!”
“술을 마시던 여자가 먼저 들어갔는데, 남자의 방 침대에 얌전히 누워서 겁탈을 당할 뻔했다? 비명도 지르지 않고 있다가 문을 여니까 그때서야 비명을 지른다? 귀하는 그 말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정말 여자가 겁탈을 당하던 중이었을 것 같소?”
“누가 뭐라 해도 나는 저놈을 용서치 않을 것이다.”
“딸의 치기 때문에 구룡상단과 싸우겠다? 과연 검마보의 보주도 그럴 생각인지 모르겠군.”
진규청은 입을 꾹 다문 채 혁무천을 노려보았다.
그도 이제는 딸이 거짓말을 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로서 딸의 잘못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 혁무천이 말했다.
“이번 일은 검마보의 명예도 걸려있다 할 수 있소. 그러니 검마보에 가서 보주께 판단을 맡기는 건 어떻소?”
진규청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미 마음이 흔들린 그로서는 무작정 고집을 피울 수도 없었다. 더구나 이제는 검마보의 명예까지 거론된 터였다.
“좋다. 그럼 검마보로 가자.”
혁무천은 백리양을 돌아다보았다.
“어떻게 하겠나?”
백리양은 내심 안도했다.
‘후우우우.’
선위종이 당장 진규청의 칼 아래에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게다가 당사자와 직접적인 관계가 아닌 검마보의 보주라면 보다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할 것이다.
“그렇게 하리다.”
***
미시 초에 영마장을 출발한 사람들은 해가 질 무렵 검마보에 도착했다.
막부산의 산기슭에 자리한 검마보는 오랜 역사를 말해주듯 고풍스런 건물들이 즐비했다.
혁무천은 묘한 마음이었다.
자신이 전에 왔을 때와 달라진 곳이 몇 곳 있었다.
몇 년 사이에 달라진 것이 아니었다. 아마도 수십 년은 되었을 성 싶었다.
그 광경을 보니 새삼 세월이 백 년 넘게 지났다는 게 실감났다.
자신이 그만큼 더 살았다는 것도. 물론 시신이나 다름없이 정신을 잃은 상태로 있었지만.
현 검마보의 보주는 단천검마 율이명.
그는 나이가 삼십 대 후반밖에 되지 않았다.
오 년 전, 전대 보주가 회갑도 되기 전에 지병으로 급사하여 검마보를 갑자기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검마보의 누구도 그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았다. 검마보 보주 중 최연소에 초절정 경지를 이룬 사람이 그였으니까.
그는 마도의 인물 치고 살심이 약하다고 알려져 있으나, 대신 작정을 하고 검을 빼들면 산천초목이 바들바들 떨 정도로 냉혹하다고 했다.
그런 그가 대검마전 안에서 호위 둘, 장로 셋을 거느린 채 기다리고 있었다.
백리양이 앞장서서 대검마전 안으로 들어갔다.
혁무천은 한발 처져서 뒤를 따라갔다.
감회가 깊었다.
처음 검마보를 방문한 그날, 그는 검마보 무사 이십여 명을 쓰러뜨린 후에야 율항과 마주할 수 있었다.
율항은 수하들이 당했는데도 분노하지 않고 차갑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자신을 맞이했다.
무사는 입이 아니라 검으로 말하는 거라면서.
무사가 된 이상 검 아래 죽는 것은 운명이라면서.
그러니 정당한 대결이었다면 누가 죽든 원망할 것 없다면서.
그러고는 자신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당시 그의 모습이 영락없이 저 앞에 있는 자 같았다.
‘정말 많이 닮았군.’
걸음을 멈춘 백리양이 먼저 포권을 취하며 공손히 인사를 건넸다.
“비룡장의 백리양이 보주님을 뵙습니다.”
“어서 오게. 인사나 나누려고 온 것은 아닐 터, 어디 어떻게 된 이야기인지 말해보게.”
율이명은 가볍게 포권을 하며 예를 받고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백리양은 그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진규청이 코웃음 치며 간간이 끼어들어서 자신의 생각을 말했지만, 혁무천이 영소라는 자를 추궁했던 이야기까지 끝마쳤다.
이야기를 다 들은 율이명은 눈살을 찌푸렸다.
진이향의 성격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얼마나 거짓말을 잘 하는지도, 욕심이 많은지도.
더구나 이야기를 들어보니 확실히 앞뒤가 안 맞는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바로 결론을 내리지는 않았다. 검마보와 진규청의 자존심을 생각해서라도.
“우리 검마보는 비룡장과 다투고 싶은 마음이 없네. 그렇다 해서 벌어진 일을 없는 것으로 하지는 않을 거네. 또한 없었던 일을 거짓으로 포장하지도 않을 것이고. 이번 일은 좀 더 따져보고, 판단은 내일 내리지.”
무뚝뚝하게 말을 내뱉은 그는 백리양 옆에 서 있는 백리혜에게 시선을 한번 준 후 혁무천을 바라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한참 동안 시선을 고정했다.
심장이 이상할 정도로 빠르게 뛰었다. 초절정 경지에 오른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뭐랄까, 감당하기 어려운 적을 마주했을 때의 긴장감?
아니,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정말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묘한 느낌이다.
더구나 저자의 얼굴에는 긴장이나 초조, 적대감도 아니고… 나른한 호기심 같은 것이 떠올라 있지 않은가 말이다.
왜?
결국 그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대도 비룡장 사람인가?”
“비룡장 사람은 아니나, 의뢰를 받았으니 완수할 동안은 비룡장과 하나로 생각해도 되오.”
“이름이 어떻게 되나?”
“무천이오.”
“무천? 가만, 무천이라면…… 혹시 마룡선발대회에 나갔던 무천?”
혁무천의 입가에서 쓴웃음이 피어났다.
유명해지긴 유명해졌나 보다. 이 사람 저 사람 다 묻고, 심지어 검마보의 보주마저 알 정도라니.
나름대로 목적은 달성한 셈인데…… 정작 그 목적의 대상인 은설은 자신의 옆에 없었다.
“보주께서 알고 계실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소.”
“아들놈이 마룡선발대회를 구경하러 갔었지. 그놈이 그러더군. 진짜 멋진 사람을 봤다고. 그 사람의 이름이 바로 무천이었다네.”
“얼굴에 금칠을 한 기분이군요.”
조금 이상한 이유로 인해 분위기가 갑자기 훈훈해졌다.
그런데 율이명이 혁무천에게 다시 질문을 던지면서 훈훈한 분위기가 식었다.
“철혈마련과 문제가 있었다고 들었네만. 다투었나?”
“강호에서 살다보면 생기는 흔한 일일 뿐이오.”
“철혈마련과 다툰 게 흔한 일이라……. 아마 이 안의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네.”
백리양과 백리혜 역시 가볍게 듣고 넘길 수 없었다. 결국 자신들이 철혈마련과 다툰 사람을 고용한 셈 아닌가 말이다.
반면 율이명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호기심을 보였을 뿐.
“자네가 비무를 포기한 것도 철혈마련이 압박해서 그랬다고 하던데. 승아가 그 일을 말하면서 무척 분개하더군.”
“꼭 그 일 때문만은 아니었소.”
“어떤가? 마땅히 의지할 곳이 없으면 우리 검마보에 머물게나. 최상의 대우를 해주겠네.”
마도십문 중에서도 강력한 힘을 자랑하는 검마보의 보주가 직접 영입 제안을 했다는 것만 해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혁무천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바로 고개를 저었다.
“말씀은 고맙소만, 당장은 어느 한 곳에 머물 생각이 없소.”
특히 마도문파에 몸담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천화광과 약속한 것도 있고, 아마 은설이 알면 자신을 영원히 보지 않겠다고 할지도 모른다.
“어허! 보주께서 어렵게 말을 건넸는데, 고맙게 받아들일 것이지!”
한쪽에 서 있던 검마보 장로 원평문이 눈을 부라리며 못마땅한 어조로 다그쳤다.
혁무천이야 눈썹 한 올도 끄떡하지 않았지만.
“철혈마제 우문강천도 보주와 비슷한 말을 했소. 그런데 내가 뭐라고 한 줄 아시오?”
“뭐? 철혈마제가?”
“싫다고 했소. 그에 비하면 오늘은 나름대로 부드럽게 말한 거요.”
“그게… 정말이냐?”
“그랬더니 자신이 못 먹는 감 남도 주기 싫었는지 나를 제거하려고 사람을 보냈소. 귀하는 나를 죽이겠다고 온 자들을 내가 어떻게 대했을 거라 생각하시오?”
“…….”
원평문이 아무 말도 못하자, 혁무천이 손을 들어서 천천히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몇은 살려서 보냈소. 내 대답을 전해야 하니까.”
“하하하하!”
율이명이 대소를 터트렸다.
평소 그가 크게 웃는 걸 보기 힘들었던 검마보의 간부들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철혈마련이 왜 마룡선발대회 기간에 부산하게 움직였는가 했더니 자네 때문이었군.”
“꼭 나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조금은 관련되었다 할 수 있소.”
순간적으로 율이명의 눈빛이 번뜩였다.
혁무천의 답변 속에 숨겨져 있는 뭔가를 깨달은 것이다.
“자네도… 복우산의 일을 알고 있나?”
“왜 그렇게 생각하신 거요?”
“자네 때문만이 아니라고 했잖은가? 그럼 그들이 다른 이유 때문에 움직인 것을 자네가 알고 있다는 뜻이고, 철혈마련이 대대적으로 움직인 이유 중 하나가 복우산의 일 때문이니, 나로선 그리 생각할 수밖에.”
혁무천은 율이명에 대한 판단을 한 단계 격상시켰다.
단순히 검만 강한 자가 아니었다. 머리도 비상한 자였다. 하긴 그러니 저 나이에 검마보를 무리 없이 이끌고 있는 것이겠지만.
“눈치가 빠른 분이군요.”
혁무천은 그쯤하고 은근슬쩍 넘어가려 했다.
그런데 율이명이 가만 놔두지 않았다.
“솔직히 우리는 복우산의 일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 게 없네. 그저 철혈마련과 만마성이 정은맹의 비밀지부를 공격했다는 것 정도만 알 뿐이지. 그런데… 자네는 우리보다 좀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것 같군.”
율이명은 말하는 내내 혁무천을 차갑게 번뜩이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혁무천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모른다고 하면 될 일이었다.
철혈마련과 만마성이 철저히 함구해서 아직은 정확한 사실이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세상에 알려졌다면, 팔대마세와 마도십문 모두 무공비급을 얻기 위해 달려가서 이미 피의 폭풍이 불어대고 있겠지.’
정은맹이 정파의 비전을 얻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라도 아는 사람은 사공곽과 금가휘, 공손두 등 몇 사람 정도.
그들이 떠벌리고 다닐 리는 없으니 아는 사람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문제는 율이명의 성격이었다.
그가 율항과 비슷한 성격이라면 곱게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진 이상, 아마 날을 새더라도 끝까지 캐물을 것이다.
사실 그 일은 자신이 그렇게 시달리면서까지 지킬 비밀도 아니었다. 아무리 늦어도 한두 달 후면 강호에 알려질 테니까.
“정말 알고 싶소?”
율이명의 두 눈이 반짝반짝 빛을 발했다.
“말해주면 고맙지.”
혁무천이 이번에는 백리양에게 물었다.
“그대는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것 같은데.”
갑자기 질문을 받고 백리양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게…… 조금 들은 이야기는 있소. 하지만 남들이 아는 것 이상은 모르오.”
혁무천은 그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호북의 상계를 쥐락펴락 하는 비룡장이 그토록 큰 싸움의 내용도 파악해보지 않았다?”
나직한 그의 목소리에 백리양의 얼굴이 벌게졌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보던 백리혜가 한마디 나섰다.
“남들은 우리 비룡장을 대단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철혈마련과 만마성의 일에 끼어들 만큼 간이 크지는 않아요.”
“간은 작아도 뛰어난 머리로 그 이상의 결과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상인이지.”
백리혜가 지지 않고 말했다.
“아무리 머리가 뛰어나도 한계는 있는 법이에요.”
혁무천은 그제야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고는 다시 눈을 들어서 율이명과 백리양을 천천히 번갈아보았다.
“잘 모른다면… 정보에 대한 대가를 많이 받아야겠군.”
“…….”
“흐음…….”
혁무천의 말에 백리양은 눈만 껌벅였다. 왠지 당한 느낌이었다.
반면 율이명은 눈을 가늘게 좁히며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대가를 많이 받겠다는 건 그만큼 중요한 비밀을 알고 있다는 뜻이겠지?”
“사람에 따라서 조금은 중요도가 다르겠지요. 그래도 어쨌든 가치가 있는 것만은 분명하오.”
“얼마를 받을 생각인가?”
일한 만큼 받는다. 가치만큼 받는다.
혁무천은 은설에게 배운 바를 아낌없이 써먹었다.
“은자 만 냥.”
“…….”
배포가 큰 율이명도 그 말에는 바로 답을 못했다.
은자 만 냥이면 검마보의 석 달 예산인 것이다.
“돈으로 주기 어렵다면 다른 것으로도 대체해도 되오.”
“이놈! 지금 누구 앞에서 감히 말장난을 하자는 거냐!”
원평문과 나란히 서 있던 오십 대 중반의 중노인이 더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쳤다.
그가 바로 검마보의 팔대장로 중 한 사람인 뇌혼비살검 나증이었다.
“싫으면 그만 두시오. 그럼 그 이야기는 없던 일로 합시다.”
“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