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천화 103화
무료소설 귀환천하: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60회 작성일소설 읽기 : 귀환천화 103화
103화
눈을 든 그는 다시 장강에 시선을 두었다.
차갑게 가라앉았던 그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처음 만났을 때 설아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불쑥 비집고 나왔다.
설아는 자신으로 인해 세상이 어지러워졌다고 했다. 수많은 선량한 사람이 죽임을 당하고 악이 활개를 치게 되었다고 했다.
정말 자신 때문이든 아니든, 힘이 우선인 마도의 세상이 된 것만은 분명했다.
“원한 때문에 무작정 사람을 죽인다면 이 대륙에 살아남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아무리 원한이 깊어도 복수를 하려 했으면 당사자들에게만 했어야죠.”
설아는 그런 말도 했었다.
자신이 설아의 말대로 복수 대상을 당사자들로만 정했다면 정파가 지금처럼 몰락하지는 않았을 텐데.
“옛날부터 그런 말이 있잖아요. 복수의 윤회는 끝이 없다고. 결국은 누가 먼저 검을 내려놓고 용서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거죠. 쉽지는 않은 일이겠지만.”
솔직히 그렇게 할 자신은 없었다.
자신의 두 눈으로 죽어가는 부모님과 형제들을 똑똑히 봤지 않은가.
어쨌든 복수를 하기 위해 만인을 죽음으로 이끈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로 인해 강호가 혼란스러워지고, 죄 없는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다면…….
‘그럼 정리도 내가 하는 것이 맞겠지.’
다시 가늘어진 혁무천의 눈빛이 또 한 번 반짝였다.
‘그럼…….’
이번에는 약간 열기가 느껴지는 온화한 눈빛이었다.
‘설아의 위험도 그만큼 줄어들지 않을까?’
그럼 설아도 굳이 천기회나 정은맹에 매달릴 이유가 없을 테고…….
잘하면… 나이 차이를 떠나서 자신의 마음을 받아줄지도 모르는데.
‘솔직히 잠을 백 년 넘게 잤을 뿐, 그걸 제외하면 내 나이도 이제 스물아홉이잖아?’
그 정도면 아주 많이 차이 나는 것도 아니다.
뭐, 겉모습도 몇 살 더 어려보이고.
자신이 백 년 전 사람이라는 걸 말하지만 않는다면, 마천제라는 걸 밝히지만 않는다면, 아무도 모를 것이다.
양심이 약간 찔리긴 하지만, 설아를 얻기 위해서라면야…….
혁무천의 입술 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번졌다.
“뭐, 좋은 일이라도 있나?”
옆에서 가재미눈으로 훔쳐보던 동대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혁무천이 조금 더 짙어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앞으로 동 형이 해줘야 할 일이 많을 것 같소.”
“…….”
동대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미, 모른 척할 걸…….’
옆에서 영추문이 혀를 차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장대산과 강탁은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했고.
‘드디어… 마음을 정하셨군.’
얼굴이 살짝 상기된 목량은 지그시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 와중에도 배는 풍운을 싣고 장강을 건너갔다.
***
강호무림은 기이할 정도로 고요했다.
남경에서 마도십문 중 말석인 금천방의 주인이 바뀐 걸 제외하면 지난 수십 년 동안 이렇게 조용했던 적이 있나 싶었다.
심지어 복우산에서 정파의 비전무공을 뺏기 위한 암투가 벌어지기도 했거늘.
하지만 강호의 속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은 검과 칼을 연마하며 곧 불어 닥칠 혈풍을 대비했다.
천하를 장악하다시피 한 팔대마세가 웅크리고 있던 본거지에서 기지개를 켜고 있는 것이다.
이미 철혈마련과 만마성은 대대적으로 고수들을 파견해서 정은맹과 충돌했다.
귀천교 역시 소리 없이 자신들의 권역을 단속했고, 산서의 사도맹도 남하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렸다.
사천의 마천문과 섬서의 마황궁, 촉산의 혈왕동, 하북의 패왕문은 언제든 움직일 준비를 마친 상태에서 강호를 예의주시했다.
마도십문 중 가장 세력이 강한 구마맹과 백마궁, 검마보 역시 숨을 죽인 채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았다.
찐득찐득한 고요가 피를 머금은 채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정파의 비전무공에 대한 소문이 돌기 시작하면 피의 폭풍이 몰아칠 것이다.
그렇게 강호가 숨을 죽이고 있던 초여름 날 오시 초.
일단의 무리가 무창성의 성문을 통과해서 안으로 들어갔다.
모두 여섯 명.
남경을 출발한 지 나흘 만에 무창성에 들어선 혁무천 일행이었다.
그들은 성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옥신각신했다.
“대산, 정말 만마성에 네가 찾는 물건이 있단 말이지?”
“어, 할아버지가 그랬어.”
“그게 뭔지는 알아?”
“몰라.”
“모르는데 어떻게 찾아?”
동대안이 계속 질문을 퍼붓자, 장대산이 그게 무슨 문제냐는 듯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형은 찾을 수 있다고 했어.”
그 말에 오히려 동대안이 슬쩍슬쩍 혁무천의 눈치를 봤다.
“그게 뭔지 몰라도, 중요한 것이면 만마성이 내주지 않으려고 할 텐데.”
혁무천이 앞만 보고 걸으며 무심한 어조로 답했다.
“그래도 찾아야 하오.”
“무엇인지 말해주면 더 찾기가 쉽지 않을까?”
“그건 말할 수 없소. 낮말은 새가 듣고…….”
“그래, 그래. 밤 말은 쥐새끼가 듣는다고 하지.”
“삼뇌자가 얻었던 것과 같은 것이라 생각하면 되오.”
“……쓰바, 그 말을 들으니 어째 으스스한데?”
동대안이 어깨를 움츠리며 구시렁거릴 때, 대로 저쪽에서 말 몇 마리가 달려왔다.
두두두두.
아주 빠른 속도는 아니었다. 문제는 사람 많은 대로에서 달린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성문을 통과한 혁무천 일행을 향해 곧바로 달려왔다.
다치기 싫으면 비키라는 듯.
쿵! 쿵! 쿵!
장대산이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가더니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안 그래도 거대한 덩치가 두 손까지 들어 올리니 보는 사람들은 절로 짓눌리는 느낌이 들었다.
달려오던 말들도 장대산의 거대한 덩치에 질린 듯 급히 속도를 줄였다.
갑자기 말의 속도가 줄어들자 마상의 인물들이 당황했다.
“이놈의 말이 왜 이래? 저 덩치만 큰 놈을 밟아버리지 않고.”
“저 곰 같은 놈의 기에 밀렸나?”
말은 모두 네 필. 타고 있는 자들도 넷이었다.
삼남 일녀.
모두 이십 대 중후반 정도로 보였다.
남색 무복을 입은 청년, 백색 무복을 입은 청년, 갈색 무복을 입은 청년, 그리고 녹색 경장을 입은 아름다운 여인.
그들 중 짙은 갈색 무복을 입은 청년이 눈을 치켜뜨며 소리쳤다.
“비켜라, 곰 같은 놈아!”
하지만 장대산은 눈썹 한 올 꿈쩍하지 않았다.
결국 붉은 기가 도는 말을 타고 있던 남색 무복의 청년이 훌쩍 몸을 날렸다.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돌며 삼 장을 이동한 그는 떨어지면서 장대산의 가슴을 향해 발을 내질렀다.
그의 발이 정확하게 장대산의 가슴에 적중했다.
쾅!
누가 봐도 강력한 일퇴였다는 알 수 있을 만큼 소리가 크게 났다.
그러나 장대산은 뒤로 반 보 정도 물러난 뒤 자세를 유지하고 웅웅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한 번 더하면, 다친다.”
반면 장대산의 가슴에 일퇴를 날린 청년은 다시 뒤로 튕겨나가며 공중제비를 돌고 땅에 내려섰다.
그런데 표정이 좋지 않았다.
장대산의 가슴에 일퇴를 성공시켰는데 발목이 시큰거렸다.
마치 철벽을 후려 찬 듯했다.
그제야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이남 일녀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남색 무복의 청년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
“너희들은 누구냐?”
“묻기 전에 자신들의 신분부터 밝히는 게 예의 아니오?”
목량이 나서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대답은 백색 무복을 입은 청년이 포권을 취하며 했다.
“비룡장의 백리양이라 하오.”
훤칠한 키, 준수한 얼굴. 살아오며 어려운 일은 해보지 않은 듯 여자처럼 고운 피부를 가진 자였다.
목량이 이채를 발하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역시 그였군.’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세상을 움직이는 가장 강한 힘은 무력이 아니다.
돈이다.
황금.
돈이 많으면 강력한 무력도 얻을 수 있다.
강호의 대세력을 좌지우지 할 수 있을 정도의 무력을 얻는 것도 어렵지 않다.
그러한 무력과 금력이 합쳐지면 황궁조차도 함부로 할 수 없게 된다.
단, 금액을 환산하기 어려울 정도, 말 한마디로 한 나라를 휘청거리게 할 정도로 많아야 한다.
당금 천하에 그러한 상단이 둘 있다.
구룡상단과 천화상단이 바로 그들이다.
천화상단이 황궁과 밀접한 관계라면, 구룡상단은 무림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휘하에 마도십문 중 하나인 마룡성을 거느리고 있을 정도니까.
그런데 마룡성은 구룡상단의 아홉 개 기둥인 구주(九柱)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리고 백색 무복을 입은 청년, 백리양이란 자가 말한 비룡장 역시 구룡상단의 일원이다. 비록 구주 중 맨 말석을 차지하고 있지만.
“비룡장의 소장주이신 백룡공자께서 무슨 급한 일이 있어 그리도 거칠게 말을 모시는 겁니까?”
“사정이 있어 그런 것이니 이해해 주시오.”
지나치게 거만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비굴하지도 않은 적당한 말투였다.
그때,
“그것 참 편리한 사고방식이군. 사정만 있으면 누가 다쳐도 상관없다는 건가?”
동대안이 삐딱하게 비꼬았다.
그러자 갈색 무복을 입은 청년이 코웃음 치며 냉랭히 말했다.
“흥! 소장주께서 양해를 구하지 않았소? 다친 사람도 없는데 말이 심하군!”
“당장 다친 사람은 없지만, 다칠 수도 있으니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천천히 몰아야지 말이야.”
말다툼이 길어지자, 아름다운 여인이 다급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체할 시간이 없어요. 오라버니. 자칫하면 선 오라버니가 다칠지도 몰라요.”
백리양이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말했다.
“들으셨다시피 지금 바쁜 일이 있으니 길을 비켜주시오.”
갈색 무복을 입은 청년은 그 말이 마음에 안 들었다.
보아하니 대문파에 속한 자들도 아닌 듯했다. 그딴 자들에게 비룡장의 소장주가 부탁조로 말하다니.
“소장주, 그냥 치우고 가지요!”
동대안이 입을 삐죽였다.
“어디에나 꼭 저렇게 주제도 모르고 설쳐대는 것들이 있다니까.”
“뭐야?”
갈색 무복의 청년이 버럭 소리치자, 결국 혁무천이 입을 열었다.
“그만하시오, 동형.”
나직한 목소리였건만 아무도 그 말에 대꾸하지 못했다.
오만하게 소리치던 갈색 무복 청년도 입을 꾹 닫고 혁무천을 쳐다보기만 했다.
심장이 옥죄는 느낌. 뭔가가 목을 콱 틀어막은 듯했다.
‘뭐야, 저놈은?’
하지만 혁무천은 그가 아닌 백리양을 바라보았다.
대로에서 말을 모는 걸 보면 제멋대로 행동하는 한량들 같았다. 남색 무복을 입은 청년이나 갈색 무복을 입은 청년만 보면 그런 생각이 옳은 듯했다.
그런데 백리양이라는 자는 달랐다.
혁무천도 그의 이름을 소하민에게 얼핏 들은 적이 있었다.
백룡공자 백리양.
호북십삼호 중 수좌를 다투는 인물.
그는 무공보다 뛰어난 두뇌로 유명했다. 그런 자가 서두른다는 것은 그만큼 다급한 일이라는 뜻.
지금은 다투는 것보다 양보하는 게 나았다. 언젠가는 필요할지 모르니까.
“급하다 하지 않았나?”
“물론…….”
“그럼 가봐.”
백리양은 그 말에도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오라버니, 가요.”
여인이 재촉하는데도 백리양은 머뭇거렸다.
“할 말이라도 있나?”
혁무천이 물은 후에야 그가 입을 열었다.
“바쁘시오?”
혁무천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미간을 좁혔다.
과연 자신은 바쁜 건가?
물론 해야 할 일은 많다. 바쁘다면 바쁘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당장 서둘러야 할 정도는 아니다.
그렇게 바삐 해야 할 일이었다면 곧장 만마성으로 달려갔겠지.
“당장은 아니야.”
“그럼 우리를 잠깐만 도와주시오. 대가는 충분히 드리겠소.”
생각지 못한 상황 전환에 모두가 혁무천과 백리양을 바라보았다.
“먼저 무슨 일인지 말해 봐.”
갈색 무복을 입은 청년은 혁무천의 말투가 마음에 안 들었다.
언제 봤다고 반말이야?
그래도 뭔가가 꺼림칙해서 말을 함부로 하지는 않았다.
“비룡장의 소장주시오. 말을 조심해주시오.”
“저 친구가 누구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할 말 없으면 그만 가지.”
그제야 백리양이 말했다.
“무창에서 만나기로 한 친구가 곤란한 상황에 처했소. 본장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지원대가 오려면 시간이 걸리는 터라 일단 우리가 먼저 가던 길이오.”
혁무천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비룡장의 이름이 통하지 않는다면 평범한 상대는 아닐 것이다.
“상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