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천화 12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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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23회 작성일소설 읽기 : 귀환천화 128화
128화
조릉의 기형검에 서린 검기가 동대안의 어깨를 훑고 지나갔다.
싸한 통증과 함께 어깨살이 두 줄기로 갈라졌다.
동대안은 이를 악물고, 옆으로 튕겨진 섬혼을 재차 뻗었다.
“헛!”
기겁한 조릉은 전력을 다해서 몸을 틀며 뒤로 물러섰다.
이 장을 물러선 그는 이마를 찡그렸다.
동대안은 멈춰 서서 그를 노려보기만 했다. 살이 갈라진 어깨에서 주르륵 흘러내린 붉은 핏물이 가슴을 적셨다.
그럼에도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조릉을 바라보았다.
순간 조릉의 가슴 쪽에서 피가 뭉클거리며 뿜어져 나왔다.
“이, 이런 개 같은…….”
입에서는 욕설이 흘러나왔다.
그는 급히 혈도를 눌러서 지혈했다.
몸을 틀어서 심장이 뚫리는 것은 면했지만 결코 가벼운 부상은 아니었다.
동대안은 무척이나 아쉬웠다.
‘지미, 한 치만 더 옆을 뚫었어도…….’
어깨를 내준 대신 심장을 노렸는데 실패한 것이다.
그래도 자신보다는 훨씬 큰 부상을 입었으니 일단은 그것으로 만족했다.
어쨌든 조릉마저 부상을 당하자, 소원계는 지천주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무천이란 놈만 제대로 붙잡고 있었어도 일이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 형, 뭐하는 거요? 저놈은 지 형이 맡기로 하지 않았소?”
“그랬지. 그런데 실력이 안 되는 걸 어떡하나?”
소원계는 어이가 없었다.
혈왕동 내에서 지천주보다 강한 고수는 두 사람밖에 없다. 아니, 그들조차도 내놓고 지천주보다 강함을 자랑하지 못한다.
그런 고수가 스스로 패배를 자인하다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요?”
“사실인 걸 아니라고 할 수도 없지 않은가?”
씁쓸한 표정으로 답하는 주천주의 입술에 피가 번졌다.
그제야 허튼소리가 아니라는 걸 안 소원계는 입안이 바짝 말랐다.
도대체 저 젊은 놈이 얼마나 강해서!
그때 지천주가 말했다.
“피는 볼 만큼 본 것 같은데, 오늘은 이쯤에서 멈추는 게 어떻겠나? 끝장을 보자고 하면 그쪽도 피해가 막심할 텐데.”
소원계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의 시선은 혁무천을 향하고 있었다.
혁무천도 그의 말뜻을 모르지 않았다.
지 형이라는 노인이 전력을 다해서 자신을 막는다면 한동안 다른 사람을 도와줄 수 없다.
아마 동료 중 두세 명은 목숨을 잃을 터.
적을 백 명 죽인들 동료를 잃으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뿐 아니라 오늘 이후 혈왕동은 자신들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될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최선책을 찾아보는 수밖에.
“혈왕동에서 이번 일을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우리도 더 싸울 이유가 없소.”
“어떡하겠나?”
지천주가 이번에는 소원계를 바라보며 말했다.
죽이러 온 놈들과 협상을 하다니.
소원계는 자존심이 상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동주의 결정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 다만 오늘 일은 책임을 묻지 않도록 해보마.”
어차피 혁무천도 혈왕동이 모든 것을 양보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아니, 약속 자체도 믿지 않았다. 마도의 무리에게 약속은 필요했을 때만 지키면 되는 것이었다. 혈왕동주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무 소용도 없었다.
그럼에도 소원계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어차피 더 싸울 것이 아니라면 믿는 척이라도 해주는 게 나았다.
“좋소. 그럼 우린 부상자들을 치료해야 하니 먼저 가보시오.”
“흥! 우리도 부상자가 많아서 치료를 해야 한다.”
결국 표행과 혈왕동은 이십 장의 거리를 두고서 부상자를 치료했다.
혁무천조차 진기를 안정시켜야 할 판이니 다른 사람들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송비는 자신의 상처보다 표사들의 부상을 더 신경 썼다.
목숨을 잃은 표사가 셋이나 되었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부상이 심했다.
그런데 분노조차 일지 않았다.
북현문에 이어 혈왕동을 상대로 싸운 걸 생각하면 목숨이 붙어 있는 게 기적이었다.
‘제길, 표국 일도 못해먹겠군.’
그는 혁무천 쪽을 슬쩍 바라보았다.
오늘 일은 표행 때문이 아니라 저들 때문에 벌어지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책임도 저들이 져야 옳았다.
‘어차피 애들도 이렇게 되었는데, 표국은 당분간 접고 저 애들이나 따라다녀야겠군.’
들끓던 진기를 안정시킨 혁무천은 목을 만져 보았다.
목에 있던 생명선 한 줄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 남은 것은 여덟 줄.
아직 많이 남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오늘 같은 싸움이 여덟 번 이어지면 자신의 목숨도 끝난다.
‘늦출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야겠어.’
그나마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생명선이 사라지는 대신, 백 년간 잠들면서 굳어버렸던 공력 중 일부가 녹아 본신 진기에 합류한 것이다.
운기를 하며 그 사실을 알게 된 혁무천은 쓴웃음을 지었다.
‘병 주고 약 주는 격이군.’
그때 자신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는 지천주가 보였다.
혁무천도 일어나서 그를 향해 걸어갔다.
두 사람은 십 장 정도 떨어진 곳에서 마주쳤다.
“무슨 일이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어서.”
“뭐가 말이오?”
“자네가 앙천의 도에 대해 아는 것 말이야.”
“예전에 들은 말이 있어서 알아본 것뿐이오.”
“앙천마도는 그렇게 남의 말을 들어서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다는 거다. 오랫동안 세상에 나오지 않아서 아는 사람이 거의 없거든.”
지천주는 혁무천을 직시한 채 눈을 떼지 않았다.
혁무천도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럼 내가 어떻게 알았을 거라 생각하시오?”
“글쎄…….”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소. 노인장이 앙천마도를 익혔고, 내가 그걸 안다 해서 변할 것은 없으니까.”
“하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린 지천주가 말했다.
“노부는 지천주라 한다. 어쨌든 말을 뱉은 이상 약속은 지켜야겠지. 내가 혈왕동에 있는 이유는 손녀 때문이다. 혈왕동의 비전인 혈공단(穴空丹)만이 손녀를 살릴 수 있다고 들었거든.”
“…….”
“나는 손녀를 살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누구든, 그를 위해 칼을 들 수 있다.”
지천주는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려서 혈왕동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혁무천은 지천주의 등을 바라보았다.
지천주가 사족처럼 뒷말을 단 이유를 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어떻게든 손녀를 살리고 싶어서 혈왕동에 들어갔는데, 혈왕동의 혈공단만으로는 손녀를 살리기에 부족한 듯했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뒷말을 할 이유가 없다.
결국 그는 자신에게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손녀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달라고.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알려주시면 방법을 찾아보지요.>
혁무천의 전음에, 걸어가던 지천주의 어깨가 살짝 들썩거렸다.
곧 전음이 들렸다.
<구음절맥에 심장까지 약한데, 혈공단으로는 완치가 불가능하다는 걸 최근에야 알았다.>
혁무천은 쓴웃음을 지으며 돌아섰다.
천하에서 적수를 찾기 힘든 고수도, 손녀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여느 할아버지와 다르지 않았다.
혈왕동 쪽 사람들이 먼저 떠났다.
표행도 사망자는 근처에 무덤을 만들어주고 부상자들을 챙긴 후 길을 나섰다.
그리고 그날 해가 질 무렵 마침내 광원에 도착했다.
***
송비는 자신이 단골로 이용하는 용성객잔 이층에 방을 잡았다.
일행들은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부상자를 남겨두고 일층으로 내려왔다.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향했다.
찢어진 데다 피마저 묻어 있는 복장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그런데 객잔의 손님들 외에 또 다른 시선이 그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건너편 다루에서 두 사람이 차를 마시며 객잔 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한 사람은 사십 대 초반쯤의 중년인이었고, 다른 사람은 아직 이십 대로 보이는 청년이었다.
“정말 저자들이 혈왕동 정예무사들과 싸우고 멀쩡하게 여기까지 왔단 말입니까?”
청년의 말에 중년인이 이마를 좁혔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누군가와 대판 싸운 것은 분명한 것 같군.”
“혈왕동이 아니라 산적 무리와 싸운 거겠지요.”
“자넨 본 맹의 정보망을 너무 얕보는군.”
“그게 아니라, 말이 안 되잖습니까? 이름도 없는 삼류 표국의 표행이 혈왕동의 정예무사들을 어떻게 이길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혈왕동을 이끈 자들의 수장이 혼살마 소원계인 것 같았다면서요?”
“그래서 나도 이해할 수 없는 거네. 멀리서 보긴 했지만, 분명히 소원계 같다고 했는데…….”
중년인이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정은맹 정보원들이 그 광경을 보게 된 것은 우연이라고만 할 수는 없었다.
촉도를 오가며 마도의 움직임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던 중 혈왕동의 무사로 보이는 자들 수십 명이 어디론가 달려가는 게 보였다.
수상하다고 생각한 정보원은 그들의 뒤를 쫓아갔고, 그곳에서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삼류 표국의 표행과 혈왕동의 정예들이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경천동지의 혈전이었다.
그는 즉시 서신을 써서 촉도를 관장하는 광원의 비밀거점에 전했다.
비밀거점의 책임자인 곽우생은 그 내용을 믿을 수 없었지만, 확인해보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마침 광원에 와 있던 당가기와 함께 문제의 인물들을 살펴보았다.
제법 한가락 있는 자들처럼 보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혈왕동과 대등하게 싸울 정도의 고수들은 아닌 것 같았다.
“일단 성도지부에 알리고 명을 기다리는 게 좋겠네.”
“욕만 먹을지도 모릅니다.”
곽우생은 사사건건 토를 다는 당가기가 못마땅했지만 대놓고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마도에 밀려 성도에서 쫓겨났다 해도 당가는 당가였다. 그리고 당가기는 그 당가 가주의 자식이었다.
“그럼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제가 운학과 함께 알아보겠습니다.”
“자네가?”
“어차피 저희도 성도로 가야 하니, 상황을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본 후 지부장께 전하겠습니다.”
“흐음,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군. 알았네. 그렇게 하지.”
식사를 거의 다 마칠 즈음, 혁무천은 객잔으로 들어오는 사람을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저들은……?’
빙천동에서 나와 성도에 들어갔을 때 봤던 자들이었다.
그들은 위기에 처한 어린아이 남매를 구해주었었다. 나중에서야 뭔가를 훔치기 위해 짜고 한 행동이었다는 걸 알았지만.
‘그런데 저들이 여긴 어쩐 일이지?’
혁무천이 알아본 것도 모르고 당가기와 운학은 표행 쪽으로 다가왔다.
“하하하, 표행 중이신가 보군요.”
당가기가 웃음을 지으며 말을 걸었다.
송비는 찻잔을 내려놓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둘 다 이십 대 중후반쯤으로 보이는 청년들이었다. 준수한 얼굴에 눈빛이 맑은 걸 보니 마도의 무사들은 아닌 듯했다.
“그렇다네.”
“실례가 안 된다면, 어디로 가는 표행인지 알려주실 수 있으신지요?”
“면양에 들렀다가 성도까지 갈 거네.”
당가기의 예의 바른 행동에 송비는 솔직하게 말해주었다. 요즘 들어서 이렇게 예의 바른 젊은 놈들을 보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오호! 어쩐지 그러실 것 같더라니…….”
반색하며 밝은 표정을 지은 당가기가 사근사근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저희도 성도까지 가는데, 함께 가면 안 되겠습니까?”
“성도까지 동행하자고?”
“그렇습니다. 아직 경험은 미숙하지만 한 사람 역할은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송비는 왠지 못미더운 느낌이 들어서 거부하려고 했다. 예의 바른 것과 신용은 또 다른 문제였다.
본래 사기꾼들이 사람 앞에서 더 말을 그럴 듯하게 하지 않는가 말이다.
그런데 전음이 들렸다. 혁무천의 목소리였다.
<함께 가시지요.>
이유가 있을 터.
송비는 곧바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허허허. 뭐, 그렇다면 같이 못갈 것도 없지. 함께 가세.”
당가기와 운학도 밝게 웃었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