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천화 15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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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78회 작성일소설 읽기 : 귀환천화 158화
158화
사공곽은 그 모습을 보고도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악사등이 그 정도의 반응을 보인 것조차 처음이었다. 전에는 뒷짐을 진 채 고개만 끄덕였었다.
‘그래도 전보다는 나아진 것 같군.’
이후로도 철혈마련, 귀천교, 사도맹의 간부들 사이에 인사가 이어졌다.
각파에서 나온 장로급 고수들만 해도 십여 명이나 되다 보니 인사를 건네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그들은 헤어졌던 형제라도 만난 것처럼 정겨운 한담을 나누었다.
하지만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 속에는 잘 벼린 칼날이 숨겨져 있었다.
약점만 보이면 언제라도 상대의 목을 쳐버리겠다는 듯.
“들어갑시다.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은데.”
우문척이 담담한 어조로 말하고 몸을 돌렸다.
악사등과 사공곽은 자신들을 아랫사람 취급하는 우문척의 오만한 행동에 대해서 불만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뒤따라갔다.
그들이 아는 철혈마련의 후계자는 우문양이었다. 우문강천의 첫째 아들인 우문척은 서열에서 앞설 뿐 그다지 인정을 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 상황이 달라졌다.
갑자기 우문척이 전면에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사공곽은 우문척이 정은맹을 공격한 이유를 알기에 모든 판단을 새롭게 정립하고 있었다.
‘철혈마련에 잠룡이 웅크리고 있다는 걸 아무도 몰랐다니, 그만큼 철저한 사람이라는 거겠지.’
전각 안에는 유등이 이십여 개나 켜져 있어서 대낮처럼 밝았다.
은연 중 상석에 자리한 우문척이 사도맹과 귀천교의 간부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무엇 때문에 이곳에 왔는지는 모두 잘 알 겁니다.”
사도맹 장로인 추혼신마 영고가 미간을 좁히고 물었다.
“정말 정파 놈들을 칠 생각인가?”
우문척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물론입니다. 놈들의 힘이 더 커지기 전에 삭초제근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전에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네만.”
“말씀하시지요.”
“철혈마련에서, 더 정확히는 우문 공자가 정은맹의 비밀수련장을 쳐서 정파의 비전무공을 상당수 얻었다는 말을 들었네.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우문척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시인했다.
그리 쉽게 시인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듯 영고도 바로 다음 질문을 하지 못했다.
오히려 우문척이 그게 뭐 어떠냐는 식으로 말했다.
“어차피 강호의 보물은 먼저 취한 자가 임자 아닙니까?”
“그건 그렇네만…….”
“하하하, 너무 아까워하지 마십시오. 그 무공이 비록 정파의 비전무공이라 하나 이미 마도에 무너진 자들의 무공 아닙니까?”
이어진 우문척의 너스레에 다른 사람들은 반박하기도 애매했다.
그런데 우문척이 뜻밖의 말을 했다.
“원하신다면, 우리의 연수를 기념하여 한두 가지쯤은 양보할 의향이 있습니다.”
영고는 물론 다른 사람들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말인가?”
“뭐 어떻습니까? 비록 피를 나눈 형제는 아니지만, 앞으로 함께할 동료 아닙니까? 그 정도는 양보하지요.”
우문척이 그렇게 나오니 더 이상 그 이야기를 꺼내 철혈마련을 압박할 수도 없었다.
“험, 우문 공자가 그리 생각한다면 우리도 마도의 형제로서 철혈마련과 함께 정파를 치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네.”
“감사합니다, 장로. 그럼 이제 정파 놈들을 어떻게 공격할 것인지 의논해 보도록 하지요.”
단 몇 마디 나누는 사이 주도권이 우문척에게로 넘어갔다.
사공곽은 그 모습을 보면서 간담이 서늘해졌다.
‘정말 무서운 사람이군.’
그때 우문척이 말했다.
“정은맹은 만마성이 마천문, 혈왕곡과 함께 상대할 것이니 우리는 소림과 하남성의 정파 무리들을 치도록 하지요.”
사도맹과 귀천교 장로들의 눈이 커졌다.
“소림을?”
“뱀을 잡을 때는 머리부터 잡아야 힘이 덜 드는 법이지요.”
“그들은 황궁에서 보호하고 있네. 자칫하면 황궁과 적이 될지도 모르는데, 그건 너무 위험하지 않은가?”
우문척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최근 들어 그들이 몰래 힘을 키우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습니다. 어차피 그들을 놔두고는 정파의 뿌리를 뽑을 수 없다는 걸 다들 잘 아실 겁니다.”
음산일귀 남적후가 그의 의견에 동조했다.
“그건 그렇지. 그럼 언제 칠 건가?”
그는 소림과 개인적으로 원한이 있었다. 우문척이 소림을 친다고 하자 내심 쾌재마저 불렀다.
그런데 우문척도 남적후와 소림의 관계를 알기에 그런 의견을 내놓은 것이었다.
“정리되는 대로 출발할 생각입니다.”
담담히 말한 우문척이 새하얀 미소를 지었다.
팔대마세를 재편하려면 천하가 한번쯤은 뒤집어져야 한다. 그리고 당금 천하를 뒤집어 놓으려면 상징적인 사건이 필요하다.
한때 태산북두라 불렸던 소림이라면 그 몫을 하기에 충분하리라.
‘놀라기는? 이제 시작일 뿐인데. 후후후후.’
***
비룡장을 출발한 지 이틀째 되던 날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무더운 날씨 때문인지 안개가 자욱하게 피어났다.
혁무천 일행은 만마성과의 조우를 피하기 위해 수주에서 식사만 하고 곧바로 출발했다.
비는 조금 약해졌지만 안개가 더욱 짙어졌다.
조양을 얼마 남겨 놓지 않았을 무렵, 고개를 넘어갈 때는 이십여 장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고개를 넘어가서 내리막길에 접어들었을 때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제법 치열한 싸움이 벌어진 듯 간간이 비명과 악다구니도 들렸다.
내리막길을 따라 점점 아래로 내려갈수록 소리가 커졌다.
싸우고 있는 자들은 모두 스물대여섯 명쯤 되었다.
갈의와 청의를 입은 무사 이십여 명이 대여섯 명을 공격하는 상황이었다.
공격을 받는 쪽에는 젊은 여자도 있었는데 한눈에 봐도 매우 위태로워 보였다.
문제는 그들이 내려가는 길목을 막고 싸운다는 것이었다.
혁무천은 속도를 늦추지 않고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뒤늦게 혁무천 일행을 발견한 자들 중 칠팔 명이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서 경계태세를 갖추었다.
포위된 채 공격을 당하던 자들도 혁무천 일행을 보고 눈빛이 달라졌다.
적의 표정을 보아하니 적과 한패는 아닌 듯했다. 적이 아니라면 언제든 친구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공격을 받던 자들 중 하나가 큰소리로 외쳤다.
“도와주시오! 우릴 도와주면 충분한 대가를 치르겠소이다!”
간절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그런데 공격하던 자들이 먼저 반응을 보였다.
“끼어들면 모두 죽을 줄 알아라!”
그 바람에 혁무천도 결정을 내리기가 쉬웠다.
“대산, 철호. 치워라.”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바짝 붙어서 걷던 장대산과 철호가 앞으로 튀어나갔다.
동대안은 시키지 않았는데도 먼저 나섰고.
혁무천 일행이 겁을 먹기는커녕 대뜸 공격하려는 뜻을 비추자, 조금 전 겁박하듯 소리쳤던 자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네놈들이 감히 혈마곡의 행사에 끼어들겠다는 거냐!”
그가 다시 한 번 혈마곡의 이름을 내세우며 소리쳤다.
그들 중에 절정 경지에 오른 고수가 둘이나 있었으니 오만한 말을 할 만했다.
그러나 혁무천 일행 중 혈마곡을 두려워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 잠깐 사이 장대산과 철호가 먼저 갈의인과 청의인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장대산의 장봉은 그야말로 공포가 아닐 수 없었다.
부우우웅!
장봉이 휘둘러질 때마다 터져 나오는 대기의 파열음이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거기다 철호가 좌충우돌하며 도끼를 휘두를 때마다 여지없이 뼈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콰직!
“크어억!”
“물러서!”
“네놈들이 감히…… 컥!”
눈을 부릅뜨고 소리치던 자가 동대안의 섬혼에 목이 뚫려서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안 그래도 비가 와서 짜증이 나는데, 왜 소리를 질러?”
동대안은 짜증이 난다는 이유로 세 사람의 목과 가슴에 구멍을 냈다.
순식간에 갈의인과 청의인 십여 명이 쓰러졌다.
처음에만 해도 분노하여 소리쳤던 자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동료들을 보고 안색이 새파랗게 변색되었다.
반면 공격을 받아서 곧 쓰러질 것 같던 자들은 힘을 내서 악착같이 버텼다.
그 사이 혁무천 일행이 전장의 중앙까지 전진했다.
갈의인과 청의인들은 화들짝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그때는 이미 스무 명 가까운 인원이 쓰러졌고, 멀쩡히 서 있는 자는 여섯 명에 불과했다.
그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좌우를 둘러보더니 곧바로 몸을 돌려서 도망쳤다.
혁무천은 멈추지 않고 계속 걸어가며, 공격받던 자들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안 갈 건가?”
“……예?”
“갈 거면 따라오고, 계속 싸우고 싶으면 알아서 해.”
그 와중에도 혁무천은 대여섯 걸음 더 걸어갔다. 그 바람에 거리가 점점 벌어지자, 공격받던 자들 속에 있던 여자가 다급히 소리쳤다.
“갈게요! 함께 가겠어요! 그런데……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부상이 심한 분이 있어서 상처를 싸매야 해요.”
그녀의 일행 중 쓰러져서 움직임이 없는 자가 넷이었고, 둘은 많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래도 부상만 손보면 목숨에 지장은 없을 듯했다.
“반각. 그 이상은 못 기다려준다. 그대들 때문에 계속 비를 맞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아, 알았어요.”
그나마 성한 자들이 부상자들의 상처를 손봐주었다.
부상자들도 이제 살 수 있다는 희망에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았다.
그 사이 여자가 혁무천 옆으로 다가와서 인사를 건넸다.
“공자,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얌전하면서도 조용한 목소리에서 기품이 느껴졌다.
나이는 스물두어 살쯤으로 보였는데, 큰 눈망울에 볼살이 통통해서 귀여운 인상이었다.
“충분한 대가를 치르겠다고 했는데, 어떤 대가를 내놓을 건가?”
갑작스런 혁무천의 말에 여인이 당황한 표정으로 옆을 바라보았다.
처음에 도움을 요청했던 삼십 대 중반의 사내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우린 조양 예가장 사람들이오. 여기 소저께선 장주님의 따님이시고, 나는 구영화라는 사람으로 소저의 호위를 책임지고 있소. 덕분에 화를 면했으니 말씀드린 대로 대가를 치를 거외다. 다만 목숨을 구해주신 은인께 몇 푼 건네줄 수도 없는 일이니 예가장으로 가십시다.”
조양의 예가장이란 말에 백리양의 눈빛이 반짝였다.
예가장은 조양 일대 수백 리 안에서 가장 큰 곡물상이었다. 호북성을 통틀어도 다섯 손가락에 드는 규모로, 특히 콩과 밀의 거래 규모는 호북성에서 가장 컸다.
그는 조금 전 인사를 건넨 여인의 정체를 짐작하고 예를 취했다.
“저는 비룡장의 백리양이라 합니다. 예가장의 예경설 소저를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은 몰랐군요.”
예경설도 깜짝 놀라서 눈이 커졌다.
“어머? 공자께서 비룡장의 백리 공자셨군요.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이후로 분위기가 많이 누그러졌다.
특히 백리양과 예경설은 전부터 아는 사이였던 것처럼 그곳을 출발해서 조양에 들어갈 때까지 대화를 멈추지 않았다.
오죽하면 그 모습을 보고 입에서 꿀 떨어진다며 동대안이 구시렁거렸을까.
***
두 시진 후.
혁무천 일행과 예경설 일행은 더 이상의 공격을 받지 않고 조양에 도착했다.
예가장은 조양성의 북문 근처에 있었다.
장원의 전체 면적이 무척 넓었는데, 곡물을 거래하는 곳답게 커다란 창고가 수십 채나 되었다.
예경설의 호위무사들이 부상을 입은 채 안으로 들어서자, 그들을 본 사람들이 놀라서 소리쳤다.
“아가씨! 어찌된 일입니까?”
“이보게, 구 위장,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예경설은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에게 고개를 슬쩍슬쩍 끄덕이고 안으로 들어갔다.
예가장 장주 예추문은 딸이 혈마곡의 공격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대경해서 뛰어나왔다.
“설아야! 괜찮으냐?”
“저는 괜찮아요, 아버지.”
“도대체 혈마곡 놈들이 왜 너를……?”
불같이 화를 내던 예추문이 문득 뭔가를 떠올리고 눈을 치켜떴다.
“혹시 그놈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