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천화 17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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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화
피식, 웃은 혁무천이 몸을 돌려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내일 비룡장으로 돌아간다. 준비하라고 해.”
“예…… 대형.”
“천룡방 처리는 구룡대총회를 무사히 끝내고 난 후에 생각해보자.”
어정쩡하니 일어나던 목량이 혁무천의 옆모습을 보며 물었다.
“저… 대형, 언제 그렇게 상계에 대한 공부를 하셨습니까?”
“몰랐나? 백리양과 밤샌 적이 많았는데.”
“어쩐지… 백리 공자의 눈이 퀭하니 들어가 있을 때가 많다 했더니…….”
“해보니까 재미있더군. 세상 돌아가는 이치도 조금은 이해가 되고.”
목량은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손가락, 발가락 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전율이 잘게 일었다.
천하제일의 고수일지도 모를 사람이 세상 경영에 대해 알기 시작했다.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까?
***
마운산장(魔雲山莊)은 섬서성 안강현에서 삼십여 리 떨어진 산자락 아래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안강의 상회에서 일하는 이언삼이 마차에 물건을 싣고 산장 앞에 도착한 것은 진시 초였다.
“씨바, 미리미리 좀 사놓지. 꼭 꼭두새벽부터 달려오게 한다니까.”
투덜거리며 마차에서 내린 이언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뭐여?”
마운산장은 섬서성 남부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마도세력으로 항상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경비무사들이 정문 앞을 지켰다.
그런데 그가 물건을 가져올 때마다 턱을 쳐들고 위세를 부리던 경비무사도 보이지 않고 장원 안이 쥐 죽은 듯 고요했다.
게다가 문마저 살짝 열려 있었다.
이언삼은 빗장이 닫히지 않은 걸 알고 문을 슬쩍 밀어보았다.
커다란 문이 힘없이 열렸다.
‘이상하네…….’
끼이이이익.
이언삼은 천천히 열리는 정문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저기…….”
혹시 몰라서 자신이 왔다는 걸 알리려 했던 그는 문 안쪽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몸이 굳어버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의 몸이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했다.
정문 안쪽의 넓은 마당이 온통 시신으로 뒤덮여 있었다.
바닥은 시뻘건 피로 물들어 있었고, 비릿한 피비린내는 역겨울 정도로 코를 찔렀다.
시신도 팔다리가 잘리고 목이 잘린 시신이 반은 될 듯싶었다. 심지어 배가 갈라져서 내장이 다 드러난 시신도 제법 많았다.
그는 가끔 고기를 받기 위해서 백정촌의 도살장을 가곤 했는데, 그곳도 이 정도의 살풍경은 아니었다.
“으아아아아!”
비명을 내지른 이언삼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지탱하며 뒤로 물러섰다.
하필 그때 바람이 제법 세차게 불더니 정문을 밀어냈다.
끼이이이이.
경첩 끌리는 소리가 소름끼치게 나면서 정문이 열렸다.
이언삼의 눈에 산장 안의 지옥 같은 살풍경이 그대로 들어왔다.
그는 더 버티지 못하고 털썩 주저앉았다.
하지만 곧 뒤로 돌아서 기듯이 그곳을 벗어나 마차에 올라탔다.
“씨바, 다 죽었어……. 수백 명이…….”
이언삼의 입을 통해서 마운산장의 살겁에 대한 소식이 알려지자, 안강 일대의 마도문파들이 득달같이 달려왔다.
개중에는 마운산장과 각별하게 친했던 마도세력도 있었고, 챙길 것이 없나 하고 달려온 낭인들도 있었다.
특히 마운산장과 혈연으로 맺어진 현사문(玄邪門)은 백 명에 가까운 무사들이 몰려왔다.
사람을 개잡듯이 죽이는 마도인들조차 마운산장 안의 광경을 보고 살이 떨렸다.
시신은 삼백여 구에 이르렀다.
뒷담 밖에도 시신이 이십여 구나 있었는데, 탈출하려다가 죽임을 당한 것 같았다.
사람들은 장원의 내실로 들어간 후에야 단서 하나를 찾아냈다.
아니, 굳이 찾아낼 것도 없었다.
붉은 피로 쓴 글이 벽에 적혀 있었으니까.
[마도가 무너진 강호에 새로운 세상이 열리리라!]
그때만 해도 사람들은 마운산장의 혈겁이 혈해천하(血海天下)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
혁무천 일행은 아침이 되자 정주를 출발했다.
천하가 거대한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휘돌고 있었다. 혁무천 일행은 그 중심을 그대로 관통해서 빠르게 남하했다.
사흘 후, 신양에 도착한 그들은 늦은 점심 식사를 하고 곧장 대별산맥으로 진입했다.
이제 비룡장까지는 이틀 거리. 그들의 앞을 막을 만한 세력도 없었다.
한여름에 산길을 걷는 수고로움만 아니라면 유람이라도 나온 기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늘은 그들을 편히 쉬게 놔두지 않았다.
석양이 지기 전 대별산맥을 빠져나가기 위해 열심히 경공을 펼친 그들은 시원한 계곡물이 보이자 잠시 휴식을 취했다.
차가운 계곡물에 얼굴과 손발을 씻으니 한결 나았다.
일각 정도 휴식을 취한 그들은 마저 산중을 빠져나가기 위해 일어났다.
그때 갑자기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동작 그만!”
혁무천 일행은 소리가 난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누구 하나 긴장한 사람이 없었다.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다만 그 사람들도 산을 넘어가는 사람인가 보다 했을 뿐.
그런데 무기를 빼들고 다가오는 걸 보니… 아무래도 산적들인 듯했다.
혁무천은 그들을 보고 입꼬리를 씰룩였다.
‘평범한 산적은 절대 아니군.’
산적답지 않게 제법 강한 기운이 느껴지는 고수들이 몇 명 섞여 있었다.
개중에는 목량이나 강탁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자들도 서너 명은 될 듯했다.
심지어 뒷짐을 지고 다가오는 자는 동대안과 비교할 만한 진짜 고수였다.
그들이 일반적인 산적이라면 아마 표국은 모두 망하든, 아니면 산적을 만날 때마다 무조건 통행세를 내야만 할 것이다.
“어디서 온 친구들인가?”
뒷짐을 지고 다가오던 자가 말했다.
삼십 대 후반 정도? 많아야 마흔 전후로 보였다.
상당히 덩치가 컸는데, 균형이 잡힌 데다 얼굴까지 각이 져서 강인한 인상이었다.
“그러는 넌?”
동대안이 먼저 입을 열고 되물었다.
대별산의 미친 호랑이, 대별광호(大別狂虎). 이름조차 호광인 중년인은 동대안을 빤히 바라보았다.
“거, 재미있게 생긴 놈이군.”
동대안도 지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는 놈은.”
“놈?”
“듣기 싫어? 그럼 너도 혀 좀 늘려.”
계속된 동대안의 도발에 호광이 눈을 부라렸다. 호안(虎眼) 같은 커다란 눈에서 정광이 번뜩였다.
하지만 곧바로 분노를 터트리지는 않았다.
그도 느낀 것이다. 앞에 있는, 눈이나 아니나 쥐똥만 한 놈이 자신에 비해 하수가 아니라는 걸.
“거 참. 그 자식, 생긴 것만큼이나 성격도 이상하군.”
“내 성격이 어때서? 몸에 살 좀 붙었다고 목에 힘들어간 놈보다는 낫지.”
동대안이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맞받아치자 호광이 피식, 웃었다.
“덩치나 아니나 한 대 때리면 날아가게 생긴 놈이 겁도 없군.”
“덩치? 하! 대산아!”
동대안이 헛웃음을 내뱉고 장대산을 불렀다.
뒤쪽에 앉아서 쳐다보기만 하던 장대산이 일어났다.
“어, 형.”
호광은 일어선 장대산을 보고 입이 반쯤 벌어졌다.
“쓰벌, 대별산의 왕대호도 저 자식보단 작겠네.”
“대산이에 비하면 너도 산골짜기 들쥐나 다름없어. 아마 대산이의 주먹 한방 맞으면 저 산 너머로 넘어갈걸?”
동대안이 의기양양하게 말하며 씩 웃었다.
호광은 장대산의 덩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동대안의 말은 수긍할 수 없었다.
“덩치 크다고 주먹까지 세라는 법은 없지.”
그러고는 장대산을 향해 손을 뻗었다.
“너, 이리 와봐. 나하고 누가 주먹이 센가 한번 해보자.”
장대산은 먼저 혁무천을 바라보았다.
“대형, 해도 돼?”
동대안과 호광의 웃기지도 않는 말다툼을 지켜보던 혁무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 봐. 안 되겠다 싶으면 봉을 써라.”
봉을 사용해야 할 만큼 강적이라는 뜻.
장대산은 황소눈을 크게 뜨고 호광을 노려보았다.
대형이 그렇다면 그런 거다.
그는 조금의 의심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알았어.”
그러고는 동대안을 지나쳐서 앞으로 나섰다.
순간, 그의 몸에서 강렬한 투기가 불길처럼 퍼져 나왔다.
그제야 호광의 표정도 신중해졌다.
‘뭐, 뭐야, 이 자식들?’
동대안의 강함을 느꼈을 때만 해도 놀라긴 했지만 ‘그럴 수도 있지, 뭐. 세상은 넓으니까.’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장대산이라는 거대한 곰도 자신에 비해서 크게 뒤지지 않는 듯했다.
그뿐이면 ‘제법인데? 하고 말았을 것이다.
문제는 그 거대한 곰이 쥐똥만 한 놈의 명령을 따르는 게 아니라, 자신이 봐도 질투가 날 정도로 잘생긴 애송이의 허락을 받고 나선다는 것이다.
“호 두령! 뭔 말을 그리 길게 하쇼? 말 안 들으면 그냥 때려눕히고 텁시다!”
뒤에서 속도 모르고 소리친다.
‘이거, 느낌이 쒜… 한데?’
그때 장대산이 이 장 앞에 멈춰서더니 장봉을 바닥에 내리쳤다.
푹!
거대한 장봉이 두부에 박히듯 바위를 한 뼘이나 파고들었다.
뒤에서 소리치던 자들이 그걸 보고 조용해졌다.
봉으로 바위를 가볍게 뚫는다는 건 공력이 절정경지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어림도 없는 일. 결국 덩치만 큰 곰 같은 놈의 공력이 절정경지에 도달했다는 뜻 아닌가 말이다.
호광도 장대산을 가볍게 보지 못하고 공력을 팔성이나 끌어올렸다.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바람도 없는데 펄럭거렸다.
“좋아, 아주 좋아! 오랜만에 제대로 한판 할 수 있겠군. 자, 와봐라, 곰아!”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장대산이 땅을 박차고 몸을 날리며 우권을 뻗었다.
후우웅!
주먹질에 바람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호광이 앞으로 한발 내딛으며 허리를 틀어서 장대산의 공격을 피하고 주먹을 내질렀다.
장대산은 좌수를 활짝 펴서 호광의 주먹을 향해 뻗었다.
호박잎만큼이나 큰 손바닥이 호광의 주먹을 감쌌다.
쾅!
두 사람의 기운이 충돌하면서 굉음이 터져 나왔다.
호광의 주먹은 장대산의 손바닥을 때리고 재빨리 빠져나갔다.
그 이후로 두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공방을 펼쳤다.
두 사람의 움직임은 덩치와 달리 부드럽고도 빨랐다.
지켜보던 사람 중 몇은 그 광경을 보고 탄성을 내질렀다.
“우와! 곰이 뭐 저리 빨라?”
“이봐, 곰이 느린 줄 알아? 아직 곰을 못 만나봤군.”
“쓰벌, 저 주먹이 한 방 맞으면 골로 가겠네.”
그때,
떠더덩, 쾅!
연속된 기운의 충돌 직후 장대산이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얼굴이 살짝 찡그려진 걸 보니 정통으로 한 대 맞은 듯했다.
그런데 맞은 장대산보다 때린 호광이 더 놀란 표정이었다.
‘분명 정통으로 가슴을 때렸는데…….’
스치듯 때린 것이 두어 대, 그러다 정통으로 한방 먹였다.
진짜 곰이라 해도 그 한방이면 꼬꾸라질 것이다. 그런데 저 젊은 곰은 얼굴을 찡그리는 정도가 전부다.
오히려 철벽을 두드린 것처럼 자신의 주먹이 얼얼했다.
장대산은 안 되겠다 싶었는지 손을 뻗어서 바위에 박혀 있는 장봉을 뽑았다.
봉을 잡고 선 장대산을 보며 호광은 공력을 구성까지 끌어올렸다.
‘제길, 아무래도 똥 밟은 것 같군.’
맨주먹일 때와는 또 다른 압박감이 느껴졌다.
상대는 공력의 차이를 메꿀 수 있는 만큼 천부적인 거력의 소유자다. 몸조차 금강처럼 단단하고.
이기려면 고생 깨나 해야 할 듯했다.
한편, 혁무천은 두 사람의 대결을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며 목량에게 물었다.
“목량, 저 사람이 누군지 알아?”
“대별산의 산왕(山王), 대별광호 호광이란 사람 같습니다, 대형.”
“산왕이라면, 녹림삼왕 중의 산왕?”
“예, 대형.”
강호에는 녹림을 삼분하고 있는 세 사람이 있다.
그 중 한 사람은 사천 촉산의 촉산왕(蜀山王) 유태. 자칭 한왕의 후예.
한 사람은 하남성 서북부 웅이산의 웅왕(熊王) 조곽.
나머지 한 사람이 바로 대별산의 산왕 호광이다.
셋 모두 초절정고수로 알려져 있는데, 그 중에서도 호광은 성격이 호탕하기로 유명했다.
‘녹림삼왕이라…….’
혁무천은 무심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호광과 장대산의 대결을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