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천화 167화
무료소설 귀환천하: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81회 작성일소설 읽기 : 귀환천화 167화
167화
한편, 신도평은 부친의 감시 눈길을 피하기 위해서 한 시진 정도 지난 다음 은설을 찾아갔다.
그런데 은설의 거처 어디에서도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딜 갔지? 마음이 상해서 구석진 곳에 가 울고 있는 거 아냐?’
그는 은설을 찾아 나서려다 멈칫했다.
‘우선은 그냥 놔두는 게 좋겠어. 은 소저도 자신의 처지를 알아야 해…….’
그래야 후처 자리도 그녀에게는 과분하다는 걸 알지.
그녀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도 그녀를 좋아한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에게도 야망이 있었다.
그 야망을 위해서는 이리 재고 저리 재 봐도 은설보다는 천상화가 나았다.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어.’
자신의 거처를 향해 몸을 돌린 그의 얼굴이 살짝 상기되었다.
***
정주에서 서쪽으로 오십 리 정도 떨어진 백악진에 제법 큰 장원이 하나 있었다.
하남성 북부에서 나름대로 세를 형성한 해가장이었다.
부슬비가 내리던 날. 그곳에 손님들이 몰려왔다.
처마 밑에 서 있던 정문위사는 죽립과 피풍의를 걸친 수백 명이 다가오자 즉시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해가장 주인인 해도광은 방문객들의 정체를 알고 기겁해서 직접 정문까지 달려 나가 정중히 맞이했다.
손님들은 철혈마련, 사도맹, 귀천교의 소주인과 장로 등 최고위 간부만 해도 이십여 명이나 되었다.
무사들까지 합하면 삼백여 명이나 되었는데, 알고보니 그들조차 총 인원의 절반에 불과했다.
나머지 인원들은 백악진의 객잔 두 개를 통째로 빌려서 머물 거라고 했다.
해도광은 상대의 기분에 따라서 해가장의 존망이 결정된다는 걸 잘 알기에 최선을 다해 접대했다.
우문척은 하루를 푹 쉰 다음에야 회의를 소집했다.
그는 소림에서의 결과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막판에 들이닥친 천기회 놈들만 아니었다면 소림사의 땡중들을 괴멸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화가 나는 것은 천기회의 존재를 알면서도 그냥 놔둔 바람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계획을 미룰 생각은 없었다.
비록 화룡점정의 결과를 보진 못했지만, 강호를 뒤흔들어 놓으려는 목적은 달성했지 않은가 말이다.
차를 한 모금 하며 아쉬움을 달랜 그는 좌중을 둘러보았다.
사공곽과 악사등, 그리고 세 세력의 장로와 간부 열한 명이 앉아 있었다.
소림사를 치기 전에 비해 다섯 명이 적었다. 그 중 셋은 죽고 둘은 부상이 심한 상태였다.
만족스럽진 않지만 그래도 나쁜 결과는 아니었다.
“아쉽지만 소림을 다시 치는 것은 어려울 것 같으니 다음 목표물을 처리하지요.”
사공곽은 그의 말을 들으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사도맹 무사 사백여 명 중 백여 명이나 되는 사상자가 났다. 그래도 소림을 괴멸 직전까지 몰아붙였으니 별 불만은 없었다.
정작 그를 고민케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우문척이었다.
소림에서의 우문척은 자신이 지금까지 봤던 그가 아니었다.
한번은 승려의 가슴에 일수를 쑤시고 희열에 찬 섬뜩한 웃음을 짓기도 했다.
그때의 살기 띤 웃음을 목격한 사공곽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분명 우문척은 사람을 죽이면서 웃었어.’
단순히 마도 세력에 몸담은 무사와 마인(魔人)은 분명히 다른 면이 있다.
어떤 이들은 그 차이를 ‘진마(眞魔)’와 ‘마도인’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진마는 정신 자체가 마에 물들어서 피를 즐기고 악을 숭앙하는 자들을 말한다.
반면 마도인은 마도문파에 적을 둔 무사를 총칭한다.
사공곽도 진마에 속한 자들을 많이 보았다. 사도맹에만 해도 그러한 자들이 수백 명은 될 것이다.
그들은 무공을 강하게 하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 인간이라면 해서는 안 되는 악한 짓도 거리끼지 않았다.
순혈을 얻겠다며 어린아이를 죽이고 피를 마신다든가, 순음을 얻기 위해 어린 계집아이를 간살하는 등…….
그들의 공통점은 사람을 죽이는 걸 즐긴다는 것이다. 목적을 떠나 살인 자체를 하나의 놀이처럼 여겼다.
심지어는 죽음을 보고 절정의 흥분을 느끼는 자들마저 있었다.
사공곽이 본 우문척의 얼굴이 바로 그러한 흥분으로 물들어 있었다.
혹시 우문척의 무공이 강해진 것도 사악한 대법과 관련 있는 것 아닐까?
‘어쨌든 우문척이 정말 진마라면…… 단순히 정파를 괴멸시키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문득 그런 생각마저 들자 사공곽의 눈빛이 깊어졌다.
‘우문척의 야망이 어디까지일까?’
어쩌면 자신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클지도 모른다.
‘설마… 정말 하늘이 되겠다는 건……?’
순간, 자신도 모르게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그때 우문척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사공 아우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공곽은 우문척에 대한 상념을 억지로 떨쳐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너무 앞서 나간 듯했다.
“황보세가를 치실 생각이십니까?”
“계획대로 해야지. 소림에 이어 황보세가마저 피로 물들면 하남의 정파들은 바짝 얼어붙을 거네.”
“황보세가는 정주성 내에 있어서 자칫하면 황군과 충돌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할 겁니다.”
“나도 아네. 하지만 너무 걱정 말게. 그들이 두려웠다면 나서지도 않았을 거네.”
자신만만한 우문척의 말에, 사공곽은 미루어두려던 말을 결국 꺼내고 말았다.
“하나 더 말씀드리자면, 너무 많은 사람을 죽이지 않았으면 합니다. 성내에서 너무 많은 사람이 죽으면 황궁도 백성의 눈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우문척이 기이한 빛이 번뜩이는 눈으로 사공곽을 바라보았다.
“걱정 말게. 설마 사공 아우는 이 우형을 살인귀로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게 아니라…….”
“혹시라도 소림에서의 일 때문에 그런다면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그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니까.”
사공곽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우문척이 마치 자신의 마음속에 들어왔다 나간 것처럼 콕 짚어서 이야기하는 것 아닌가.
아무래도 그동안 나름대로 조사했던 우문척에 대한 평가를 모두 바꿔야 할 것 같다.
우문척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몇 배는 더 무서운 자였다.
“악 소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문척이 이번에는 악사등을 바라보며 물었다.
악사등은 고개만 한번 끄덕였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우문척은 천천히 좌중을 둘러보았다. 방 안에는 그들 셋 외에도 세 세력의 장로 다섯 명이 더 앉아 있었다.
“장로들께서도 좋은 의견이 있으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턱에 깊게 파인 상흔이 있는 오십대 중노인이 우문척의 의견에 힘을 실어주었다.
“옳은 생각이네. 우리가 소림사만 상대하려고 나선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는 철혈마련의 장로인 여덕상이었다.
그런데 사도맹의 장로인 추혼신마 영고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그놈들, 천기회라고 했던가? 정말 그놈들의 존재를 알지 못했나?”
“천기회에 대해서는 들어봤습니다만, 놈들이 소림에 나타날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철혈마련의 정보망도 별 것 없군.”
영고의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우문척은 알고도 아무런 표를 내지 않았다. 이번 소림사 공격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곳이 사도맹이었다.
장로도 한 명 죽었고, 사상자 중에는 간부도 많았다.
괜히 감정을 건드릴 필요는 없었다.
“총단에 알렸으니 곧 어떤 조치가 있을 겁니다.”
영고도 그 이상 따지지는 않았다. 우문척이 가만히 쳐다보는데 이상할 정도로 가슴이 답답했다.
자신도 모르게 기세가 움츠러든 그는 일단 말을 돌렸다.
“그리고 황보세가를 공격하자고 했는데…… 그들 정도라면 우리가 모두 나설 필요가 있겠나?”
“소림사만 해도 그동안 우리 눈을 속이며 힘을 길러왔습니다. 황보세가라고 해서 다르겠습니까?”
우문척이 담담하게 반문하자, 꺼칠한 수염이 얼굴을 반이나 차지하고 있는 귀천교의 장로 응산평이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나는 우문 공자의 의견에 찬성하네. 놈들도 분명 음흉하게 힘을 키웠을 거야. 그리고 치려고 작정했으면 개새끼 한 마리 남기지 말고 확실하게 쓸어버려야 하네. 그래야 정파 놈들이 고개를 쳐들지 못해.”
우문척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결정을 내렸다.
“알겠습니다. 그럼 계획대로 황보세가를 강호에서 지우지요.”
***
등봉을 떠나온 다음 날.
혁무천 일행은 정주에서 남쪽으로 십여 리 떨어진 관도를 이용해 동쪽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정주성 쪽에서 관도를 따라 남쪽으로 오는 사람들의 표정이 두려움으로 물들어 있었다.
몇몇 사람은 혁무천 일행을 보며 수군거리기도 했다.
그들의 목소리를 들은 목량이 분위기의 정체를 눈치 채고 말했다.
“대형, 아무래도 그들이 벌써 황보세가를 공격한 것 같습니다.”
혁무천도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에서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이러는지…… 황군은 대체 뭐하는 거야? 그런 무도한 놈들이 성 안에까지 들어와서 사람을 죽이는데.”
“빌어먹을. 어쩌겠나? 마도가 득세한 후로는 황군도 눈치를 보는 마당인데.”
“소림사도 박살나고 황보세가까지 놈들 손에 넘어가면 마도 놈들만 더 기세등등해지겠군.”
“아무래도 황보세가의 힘으로는 놈들을 이길 수 없겠지?”
“그걸 말이라고 하나? 젠장. 결국 힘없는 우리들만 더 힘들어지겠어.”
예상했던 대로 마도 연합세력이 황보세가를 공격한 듯했다.
그 결과는 굳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황보세가가 아무리 힘을 키웠다 해도 팔대마세의 세 곳이 연합한 무력을 막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혁무천은 동쪽을 향해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마음이 씁쓸했다.
강호에서 정파와 마도사파가 싸우면 결국 힘들어지는 것은 양민들이다.
정파나 마도사파야 자신들의 신념과 이익 때문에 싸우는 것이니 피해를 본다 해도 결국 그들 책임이다.
하지만 그 사이에 낀 양민들은 무슨 죄란 말인가.
힘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자신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설아도 마도의 득세를 싫어했던 거겠지.’
정파인 중에도 뒷구멍으로 나쁜 짓을 하는 위선자가 많다.
그래도 양민들에게는 마도사파보다 정파가 득세하는 게 나을 것이다.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복수로 인해 강호가 이렇게 된 것 역시.
그렇게 혁무천 일행이 정주를 스쳐 지나갈 때, 황보세가는 이미 마도연합에 의해 장악된 상태였다.
시신에서 흘러나온 피가 드넓은 황보세가 곳곳에 핏구덩이를 만들었다.
마도 연합세력의 무사들도 상당수 시신으로 변했지만 황보세가에 비하면 피해가 큰 것도 아니었다.
마도 연합 쪽의 완벽에 가까운 승리였다.
그런데 우문척의 표정은 밝지가 않았다.
“가주인 황보경과 소가주 황보정을 잡지 못했다고?”
“예, 대공자. 심한 내상을 입은 상태였는데,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멍청한……!”
황보세가에서는 무사 오백여 명이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개중에는 절정경지의 고수만 해도 십여 명은 되었고, 초절정경지에 이른 고수도 셋이나 있었다.
상단으로 바뀌었다는 것치고는 무사들의 숫자가 지나칠 정도로 많았다. 숨겨 놓았던 무력까지 모조리 동원된 듯했다.
그래서 전력으로 맞서는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주요 인물들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외곽을 감시하고 있는 자들은 뭘 하고 있단 말이냐?”
황보세가에서 탈출하는 자들이 있으면 신호를 보내게 되어 있었다.
신호가 없다는 것은 그들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비밀통로를 통해서 빠져나간 것일지도 모른다. 정주를 모조리 뒤져서라도 놈들을 찾아내라!”
***
정주를 그냥 지나친 혁무천 일행은 곧장 개봉으로 향했다.
정주에서 개봉까지 이어진 관도는 마차 네 대가 나란히 지나가도 될 만큼 넓었다.
게다가 일직선으로 뻗어 있어서 길 끝이 지평선과 만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덕분에 혁무천 일행도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
그런데 정주에서 이십 리쯤 멀어졌을 때였다.
두두두두두.
뒤쪽에서 마차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