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천화 16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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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91회 작성일소설 읽기 : 귀환천화 166화
166화
혁무천의 표정이 무심하게 굳어졌다.
“저야 사람입니다만. 저는 오히려 노스님이 어떤 분인지 궁금하군요.”
“헐헐헐, 이거 때문인가? 걱정 말게. 다른 시주들이 보면 귀찮아질 것 같아서 장난을 좀 치본 거니까.”
실실 웃던 노승이 서서히 웃음을 지우고 혁무천을 빤히 쳐다보았다.
“오래 살다 보면 남이 보지 못한 것을 볼 수가 있다네. 그래서 물어본 걸세. 정말 궁금하거든.”
“전에 어느 분도 그와 비슷하게 묻더군요. 그래서 말씀드렸지요. 보이는 그대로만 보시라고.”
“흐음…… 보이는 그대로 봐라……. 하긴 겉모습이 뭐 중요할까…….”
노승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혁무천이 그런 노승을 보며 한마디 더했다.
“저도 하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응? 그래? 뭔가?”
“왜 소림의 제자들을 죽어가게 놔두셨습니까?”
이번에는 노승이 고개를 저었다.
“죽어가게 놔둔 것이 아니네.”
“노스님의 능력이면 지금보다 훨씬 많은 소림의 제자들이 살아났을 거라 생각합니다만.”
질책에 가까운 혁무천의 말에 노승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항마동에서 어제 나왔거든.”
항마동 안에서는 밖의 상황을 알 수가 없었다.
노승이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것을 알고 항마동의 문을 열고 나왔을 때는, 이미 마도 연합세력의 무사들이 휩쓸고 간 후였다.
“이 또한 부처님의 뜻이라면 어쩌겠나? 아미타불…….”
반장을 하고 나직이 불호를 왼 노승이 혁무천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어쨌든 부처님께 갈 나이가 다 되었는데도 호기심은 어쩔 수 없구먼.”
순간, 귀엽게(?)만 보이던 노승의 전신에서 후광이 솟구치듯 은은한 금광이 퍼졌다.
혁무천은 그 광경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금강반야대선공?”
노승의 길고 흰 눈썹에 가려진 눈에서 이채가 반짝였다.
소림 칠십이절기 중 가장 깊은 깨달음을 요하는 세 가지 절기를 삼천불공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 중 하나가 바로 금강반야대선공이다.
문제는 금강반야대선공이 세상이 나온 것은 백여 년 전이 마지막이었다는 것이다.
이제는 그 이름조차 아는 사람이 거의 없고, 익혔다고 알려진 사람은 더더구나 없었다.
그런데 이제 이십 대로 보이는 혁무천이 단번에 금강반야대선공을 알아보는 것 아닌가 말이다.
“어디 이것도 알아볼지 모르겠구먼.”
노승이 말하며 우수를 뻗어서 직경 두 자 크기의 원을 그렸다.
노승의 손짓을 따라서 허공에 금빛 원이 그려졌다.
그 직후 노승이 손을 앞으로 내밀자 금빛 원이 혁무천을 향해 밀려갔다.
금빛 원은 순식간에 혁무천과 가까워지면서 직경이 여섯 자 이상으로 커졌다.
혁무천은 노승의 공격을 피하지 않았다.
노승의 공격은 느린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눈 한번 깜박일 시간도 주지 않을 만큼 빨랐다.
부드러운 것 같으면서도 그 안에는 무쇠를 부술 정도의 강맹함이 깃들어 있었다.
한번 피하면 면면부절 끊임없는 공격이 이어지는 소림 최고의 절기 중 하나가 백 년 세월을 넘어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혁무천은 우뚝 서서 우수로 무진일선공을 연속적으로 세 번 내쳤다.
장심에서 확 퍼져 나온 영롱한 광채가 노승의 금빛 장력과 뒤엉켰다.
콰르르릉.
나직한 뇌음이 울리면서 혁무천과 노승 사이에 직경 일곱 자가 넘는 기(氣)의 구(球)가 형성되며 휘돌았다.
그도 잠시 기로 형성된 구가 폭발하듯 터졌다.
쿠르릉.
혁무천과 노승을 둘러싸고 있던 안개가 거세게 출렁거렸다.
주르륵, 두 걸음 물러선 혁무천이 노승을 바라보며 말했다.
“혹 금강천불수가 아닌지요?”
노승은 발이 땅에 박히면서 키가 세 치는 더 작아진 상태였다.
혈색 좋던 얼굴은 창백했는데, 두 눈에서는 경악이 물결치고 있었다.
금강천불수를 알아봐서 놀란 것이 아니었다.
혁무천이 펼친 무진일선공을 접하고 아득한 시절의 기억 한 자락이 떠오른 것이다.
자신이 아는 한 그때 봤던 사람은 칠십 년 전에 행방을 감추어서 그의 무공 역시 맥이 끊긴 상태였다.
“아미타불…….”
“오늘은 이만 가봐야 할 것 같군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뵙지요.”
혁무천은 말을 끝내자마자 그대로 쑥 솟구치더니 능선 쪽으로 날아갔다.
소림사 사찰이 있는 쪽에서 대여섯 명이 빠르게 올라오고 있었다.
일장 대결로 인한 뇌음이 사찰까지 들린 듯했다.
그들과 마주쳐봐야 좋은 말이 오가지는 않을 터, 엉뚱한 일이 벌어지기 전에 피하는 게 낫다 생각한 것이다.
빠르게 올라오던 승려 중 중년으로 보이는 숭려가 노승을 발견하고 놀라서 소리쳤다.
“원공 사조님!”
노승은 혁무천이 사라진 곳을 보며 충격을 받은 경맥을 안정시켰다. 그러고는 자신을 부르며 올라오는 사람들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참으로 아쉬웠다. 저들이 올라오지만 않았어도 그 젊은 시주와 몇 마디 더 이야기를 나누어볼 수 있었을 텐데…….
“제자 효연이 사조님을 뵈옵니다. 언제 폐관에서 나오셨습니까?”
“어제 나왔느니라. 헌데 뭐 먹을 게 있다고 달려왔느냐?”
“위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나서…….”
“빈승이 방귀를 좀 세게 뀌었느니라.”
“……예?”
“뭐가 예야? 너도 삼 년 동안 항마동에 앉아 있어봐라.”
“…….”
“노납은 철우를 만나러 대보암으로 갈 것이니 장문인께는 그리 말하거라.”
“사조님…….”
효연이 다급히 불렀지만, 그 사이 원공대선사는 이미 십여 장이나 멀어져 있었다. 그러고는 눈 깜짝할 순간에 능선을 넘어서 사라졌다.
효연은 따라가지 않았다.
대보암의 철우. 그는 효연이 절대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 중 하나였다.
‘사조님도 참, 그 괴짜 땡초 같은 분이 뭐가 좋다고…….’
***
숭산을 내려가면서도 혁무천의 뇌리에서는 소림의 노승이 떠나지 않았다.
마도에 칠십 년이나 눌려 지낸 소림에 그런 고수가 있었다니.
과연 소림은 소림이었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그동안 잘못 생각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예로부터 깊은 산중에 본산이 있는 문파에는 세상과 단절한 채 살아가는 기인이사가 많았다.
마도가 득세한 이후로 그들은 더러운 꼴이 보기 싫어서라도 더더욱 세상으로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전통 있는 정파의 명문, 구문팔가라면 그런 고수가 한두 명씩은 있지 않을까?
이미 무당에서 무곡진인이라는 도인을 만났고, 소림에서는 이름 모를 노승을 만나지 않았는가 말이다.
나이가 워낙 많아서 손발을 직접 쓰는 외공은 약할지 모른다. 하지만 오랜 세월 수련을 통해 다진 내공은 마도의 절대고수에게 뒤지지 않을 듯했다.
그런데 그들이 사문은 나 몰라라 하고 자신만 수련했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또 다른 희망을 키우고 있을지도…….
‘그들이 변수가 될지도 모르겠군.’
오랜 세월 준비된 변수.
정은맹과 천기회에 그들까지 합류한다면 정파가 마도에 쉽게 밀리지는 않을 듯했다.
그 말인 즉 강호의 상황이 마도의 뜻대로 흐르지만은 않을 거라는 걸 뜻했다.
또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이 수월해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한번 자세히 알아봐야겠군.’
숭산에서 내려온 혁무천은 곧장 객잔으로 갔다.
그로부터 한 시진쯤 지났을 때, 마룡성의 정보원인 장한 하나가 객잔으로 찾아왔다.
얼굴이 쥐상에 성격이 얍삽하게 느껴지는 자였다.
방으로 들어온 그는 재빨리 방 안의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 같은 마도의 삼류무사가 가장 겁나는 사람은 장대산처럼 무식해(?) 보이는 거구였다.
그에 반해 혁무천처럼 얼굴이 질투 날 정도로 잘생긴 놈은 항상 밟아주고 싶은 대상이었다.
그리고 동대안은…….
피식, 자신도 모르게 장한의 입술 끝이 올라갔다.
‘웃기게 생긴 놈이네. 눈깔 하고는…….’
하지만 곧, 팔짱을 끼고 노려보는 장대산의 거구를 힐끔거린 후 소림의 현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소림사의 남은 승려는 오백쯤 되는데, 그 중 무승은 이백여 명밖에 안 되오. 그리고 천기회라는 곳의 무사 오백 명 정도가 소림에 머물고 있소이다.”
천기회의 무사가 생각보다 많았다.
소림의 대지에 소림보다 더 강한 세력이 머물고 있는 셈.
“정파에 합류하고자 하는 무사들이 소림으로 모여들고 있다 들었소만.”
목량이 묻자 장한이 바로 대답했다.
“현재까지는 오십여 명 정도에 불과하오만, 시간이 지나면 몇 백 명 정도는 몰려오지 않을까 싶소.”
정파의 무사들이 몰려들면 마도의 시선이 소림에 집중될 것이다.
하지만 마도도 이제는 소림을 공격하지 못한다고 봐야 했다. 낙양에 있는 황군이 숭산 근처로 이동하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현재 중요한 것은 우문척과 마도연합 무사들의 위치였다.
혁무천이 물었다.
“소림사를 공격한 마도의 무사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는가?”
“정주 쪽으로 간 것 같소.”
“정주?”
정주에는 한때 구문팔가 중 하나였던 황보세가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지금은 무가라기보다 상인으로서 세가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황보세가 때문에 간 것 같습니다.”
목량이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동대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상인으로 살아가는 자들을 굳이 공격할 이유가 있을까?”
“황보세가니까요.”
혁무천은 목량의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황보세가라…… 하긴 제갈세가를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팔가의 역사는 최소 이삼백 년이다. 수백 년 동안 다져온 경륜은 누구도 무시할 수 없었다.
“황군이 소림사를 신경 쓰는 사이 황보세가까지 정리할 속셈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남궁세가도 그들의 표적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남궁세가는 조금 다를 거다.”
“예?”
“만약 우문척이 그들을 단숨에 무너뜨리려 한다면, 많은 피해를 각오해야 할 거다.”
혁무천은 천기회 사람들과 함께 남궁세가 내부에 들어가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이 몰래 키워서 축적해 놓은 힘은 마룡성보다도 강할지 몰랐다.
팔대마세에 비하면 어림도 없겠지만, 우문척이 이끄는 마도 연합세력으로 그들을 공격하면 이긴다 해도 많은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는 곧장 수룡방으로 가자.”
혁무천이 결정을 내리자, 동대안이 물었다.
“정주에는 가지 않을 건가?”
“우문척이 황보세가를 노리고 있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소. 끼어들어봐야 득 될 것도 없고. 그리고 우리가 갈 때쯤이면 상황이 끝났을 거요.”
“하긴…….”
혁무천은 황보세가에 도움의 손길을 내밀 마음이 없었다.
황보수만 해도 자신과 은설을 헤어지게 만든 장본인 아닌가 말이다.
소림사에 있는 설아가 마음에 걸리지만, 잘 있는 모습을 봤으니 마음의 부담이 덜했다.
어차피 우문척도 곧바로 소림을 다시 공격하지는 못할 것이다.
‘설아는 수룡방을 정리한 다음 복귀하면서 만나보는 게 좋겠어.’
똑똑한 아이니 잘 버티고 있겠지.
무인도에서 납치 되었을 때도 기지를 발휘해서 철혈마련의 손을 벗어난 아이 아닌가.
혁무천 일행이 수룡방으로 가기 위해 등봉을 나설 때, 죽립을 쓴 무사 하나가 숭산에서 내려왔다.
호리호리한 몸매, 등에 검과 작은 보따리를 맨 그는 말없이 소림을 떠나온 은설이었다.
그녀는 혁무천 일행이 머물렀던 객잔에 들러서 육포와 만두 등 두어 끼 식사거리를 산 후, 곧장 남쪽으로 방향을 잡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내려올 때만 해도 마음이 무거웠는데, 막상 산을 내려오니 오히려 홀가분했다.
‘일단 비룡장으로 가서 오빠를 만나보자.’
무슨 일이 있으면 비룡장으로 오라고 했었다.
지금 가면 부담이 될지 모르지만, 어차피 갈 곳도 마땅치 않은데 뭐.
마음을 다잡은 그녀는 죽립을 슬쩍 쳐들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맑은 하늘 저편으로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영락없이 아무 것도 모르는 강호초출 같았는데…….’
처음 만나서 형주를 거쳐 무창으로 가던 그때가 떠오르자 피식,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답답하고 막막했던 가슴을 시원한 바람이 훑고 지나가는 듯했다.
이렇게 생각만 해도 좋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