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천화 16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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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84회 작성일소설 읽기 : 귀환천화 165화
165화
“혼자요?”
“그게 편해. 분위기가 뒤숭숭한데 몰려가면 엉뚱한 일만 생길지도 모른다.”
“하긴…….”
동대안이 작은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동 형은 우문척의 위치부터 알아보시오.”
“소림사를 공격한 것이 이틀 전이네. 그동안 멀리 가지 않았을까?”
동대안이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소림사에서 혈겁을 일으켰으니 황군이 나설지도 몰랐다. 그들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수백 리 밖으로 갔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혁무천은 우문척이 멀리 가지 않았을 거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황군이 무서워서 피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럴 사람이었다면 소림을 치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때 목량이 말했다.
“이 부근에도 마룡성과 관련된 자들이 있을 겁니다. 그들을 찾아서 알아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좋은 생각이군. 그럼 그들부터 찾아봐.”
“예, 대형.”
***
“나쁜 선택은 아니었어.”
신도명산은 차를 마시며 미소를 지었다.
천화상단으로 가던 중 마도의 무사들이 소림사로 향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그는 그 정보를 받자마자 즉시 방향을 틀었다.
적은 힘을 들이고 천기회의 이름을 천하에 알릴 절호의 기회였다.
소림사의 힘이 많이 남아있으면 그것대로 좋고, 멸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해도 나쁠 것 없었다.
소림사를 일으켜 세우는 일도 정파 무사들을 결집하는데 상당한 효과를 발휘할 테니까.
그런데 운이 좋게도, 소림사의 본당은 큰 피해가 없었다. 소림의 무승들이야 많은 이가 죽었지만.
천기회는 싸움의 막바지에 끼어들어서 남은 소림사 제자들을 구해냈다.
소림사에는 은인이 된 셈이었다.
게다가 황궁에도 자신들의 선행을 알릴 수 있게 되었으니 금상첨화였다.
신도명산은 천화상단에 가려는 길을 늦추고 당분간 소림사에 머물기로 결정했다.
이제 곧 황군이 몰려와서 소림을 보호할 터.
안전한 소림사에서 정파의 의협심 넘치는 무사들을 결집시킬 수 있다면 최상이었다.
“아버님, 은 소저를 모셔왔습니다.”
신도명산은 방 밖에서 들리는 신도평의 목소리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들어와라.”
문이 열리고 신도평과 은설이 들어왔다.
은설은 긴장한 표정이었다. 멀리서 얼굴은 몇 번 보았지만, 막상 신도명산과 독대하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회주님을 뵙습니다.”
“그리 앉게.”
은설은 신도명산이 가리키는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신도평이 바로 그 옆에 앉았다.
신도명산은 은설을 정면으로 보며 왜 신도평이 그녀에게 빠져들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청순한 얼굴에 커다란 두 눈이 아침이슬을 머금은 듯 맑았다.
겉멋만 들어서 치장한 여인들과는 차별화가 되는 미모였다.
하지만 미모는 미모일 뿐이었다.
“이름이 은설이라고?”
“예, 그렇습니다.”
“이번에 많은 활약을 펼쳤다고 들었네.”
“과찬이세요. 저보다 잘 싸운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어요.”
“하하하, 그래도 이제 스무 살밖에 안 된 젊은 사람 중에서는 소저보다 잘 싸운 사람이 아무도 없지 않는가.”
그 점은 모두를 놀라게 했다.
그저 무공에 자질이 있는 젊은 여자 정도로 생각했다. 간혹 무공을 펼칠 때 보면 날카로운 면이 있긴 했지만, 그 역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싸움이 벌어지자 그녀의 진가가 드러났다.
예상외의 높은 공력도 공력이지만, 그녀의 초식은 명가에게 사사한 것처럼 정교하고도 부드러웠다.
거기다 손속은 일말의 여지도 남겨 놓지 않을 만큼 냉정했다.
오죽하면 천기회의 젊은 무사들이 그녀에게 설빙화라는 별호를 붙여줄 정도였다.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전장에서 나이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봅니다.”
“그래, 그 말도 맞긴 하지. 어쨌든 수고가 많았네.”
“감사합니다.”
“듣자하니 우리 평아와 친하다고?”
“신도 공자께서 많은 도움을 주셨어요.”
“흐음, 내 돌려서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으니 하나만 묻겠네.”
갑작스런 그의 말에, 뭔가를 눈치 챈 신도평의 눈이 커졌다.
“아버님 아직 그건…….”
“너는 너무 사람이 유해서 탈이다.”
“하지만…….”
신도평이 당황해서 막으려 했지만 산도명산은 자신의 생각을 돌리지 않았다.
“우리 평아를 좋아하는가?”
은설은 큰 눈망울로 신도명산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씀이신지…….”
“말 그대로네. 우리 평아를 좋아하는지 알고 싶은 거네.”
“신도 공자께서 많은 도움을 주셔서 항상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남자로서는 어떤가?”
“예?”
“우리 평아를 남자로서 좋아하느냐고 묻는 거네.”
“그건…….”
은설도 당황해서 바로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귓전으로 신도평의 전음이 들렸다.
<소저, 죄송하지만 일단은 그렇다고 대답해 주시오.>
은설은 갑작스런 상황에 뭐라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이유는 나중에 설명해드리겠소.>
그동안의 도움을 생각하면 그 말을 못 들어줄 것도 없었다.
하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흐음, 말하기가 어려운가? 솔직한 대답을 듣고 싶네만.”
신도명산이 재차 물었다.
<은 소저…….>
신도평도 재촉했다.
‘후우우…….’
속으로 한숨을 쉰 은설은 하는 수없이 입을 열었다.
“예… 그게 저… 저도 신도 공자를… 좋, 좋아…….”
말끝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 말을 억지로 하려니 자신도 모르게 거부감이 들어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신도명산이 말했다.
“흠, 평아를 좋아한단 말이지?”
“…….”
은설은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사정해도 못한다고 했어야 하는데…….’
고개를 젓지 못한 자신에게 화가 나고, 자신을 믿고 남겨 놓은 오빠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신도명산은 그런 은설을 보고 엉뚱하게 생각했다. 은설이 좋아한다는 말을 하는 게 부끄러워서 그런 거라 생각한 것이다.
“뭐 젊은 사람들끼리 좋아하는 걸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그런데 먼저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네.”
“…….”
“우리 평아는 어릴 때부터 정혼처가 있네.”
“예?”
그 말을 왜 자신에게 하는 거지?
은설은 의아했지만, 뭐라 물어야 할지 몰라서 신도명산을 바라보기만 했다.
“곧 알게 되겠지만, 천화상단의 소저라네.”
“아…….”
“알지 모르겠네만, 우리 신도 가는 뿌리 깊은 명문가라네. 해서 아무 여인이나 정부인으로 맞이할 수 없네.”
은설은 왠지 모르게 불쾌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하는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미안하네만, 은 소저가 우리 평아를 좋아한다 해도 정부인으로 들일 수 없다는 말이지.”
은설은 어이가 없었다.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말이란 말인가?
자신이 언제 부인이 되겠다고 했던가?
그런데 신도명산이 마저 말했다.
“마음이 아프겠지만, 정 평아를 좋아한다면 후처로라도…….”
“저기, 회주님.”
“물론 은 소저 마음은 아네.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겠지. 그래도 좋아한다면 후처도 나쁜 선택은 아니…….”
“잠깐만요!”
은설이 빽 소리를 질렀다.
신도명산은 이마를 찌푸리고 은설을 바라보았다.
‘역시 배우지 못한 집안의 자식은 버릇도 없군. 어디서…….’
신도평은 너무나 빠르게 진행되는 상황을 입을 꾹 다문 채 바라보기만 했다.
은설이 받아들이면 그것대로 좋고, 싫어하면 다른 길을 모색하면 되었다.
다행히 자신의 입이 아닌 부친의 입을 통해서 나온 말이니 나중에 변명을 할 수도 있었다.
“아버님, 너무 갑작스런 말이어서 은 소저가 놀란 것 같습니다.”
“흐음, 그래도 이런 일은 일찍 매듭을 짓는 게 나은 법이니라.”
은설이 벌떡 일어났다.
“죄송하지만,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군요. 저는 제 복수를 도와주겠다는 신도 공자에게 고마움을 느낄 뿐 남자로서 좋아하는 게 아닙니다. 제 가슴에는 오직 한 사람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 남자는 신도 공자가 아닙니다. 후처요?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 누가 누구 멋대로 후처로 가고 말고 해요?”
쉴 새 없이 말을 폭포수처럼 쏟아낸 은설이 홱 고개를 돌려서 신도평을 노려보았다.
“여태 그런 마음으로 저를 도와주겠다고 했나요? 무슨 남자가 그리 음흉해요?”
“은 소저…….”
“제 이름 부르지 마요! 그런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오빠를 따라갔을 거예요!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은설은 버럭 소리치고는 곧장 몸을 돌려서 방을 나섰다.
탕!
방문을 세차게 닫고 걸음을 옮기는데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미안해, 오빠. 확실히 내가 어리긴 어린가봐. 저런 사람들의 말을 믿었다니.’
한편, 방 안에서는 신도명산이 따라 나가려는 신도평을 불러 앉혔다.
“세상에 예쁜 계집은 많다. 하지만 자격을 갖춘 계집은 많지가 않느니라. 이 기회에 마음을 확실히 정해라. 저딴 계집에게 마음 빼앗기지 말고.”
신도평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숙였다.
“어떻게 하겠느냐?”
신도명산이 재차 다그치자, 신도평이 고개를 들었다.
“아버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그제야 신도명산의 얼굴이 펴졌다.
“잘 생각했다. 저런 싸구려 계집은 너와 어울리지 않아.”
신도평은 그에 대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천화상단의 사위도 좋지만, 은설도 놓치기가 아까웠다.
“그럼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
소림사는 입구에서부터 사람들의 출입을 막았다.
일반 향화객을 받지 않고, 도움을 주기 위해서 찾아오는 정파의 무사들만 안으로 들였다.
혁무천은 얼굴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길을 우회해서 소림사로 향했다.
길이 험준해서 시간이 지체되긴 했지만 사람을 만나는 것은 피할 수 있었다.
그렇게 능선을 두 개나 가로질러가자, 계곡에 있는 소림의 웅장한 사찰이 눈에 들어왔다.
싸움이 벌어진 지 이틀이 지났는데도 혈향이 아직도 남아 있는 듯 느껴졌다.
혁무천은 나무 위에 올라가서 사찰 안을 살펴보았다.
승복을 입은 승려 외에 일반 무복을 입은 사람도 제법 많이 보였다.
특히 요사채로 보이는 기다란 건물 인근에 일반 무사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능선에서 내려간 혁무천은 나무 사이에 몸을 숨기고 멀리서 오가는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그러다 아는 사람을 발견하고 눈을 빛냈다.
장로인 조광유가 삼사십 대 나이로 보이는 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잠시 후, 한쪽 방에서 누군가가 방에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옆구리에 검을 맨 여인, 은설이었다.
‘무사했구나.’
움직임으로 봐서는 몸에 아무런 이상이 없는 듯했다.
참으로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은설은 슬쩍 자신이 나온 방을 돌아보고는 빠른 걸음으로 그곳에서 멀어졌다.
‘훗, 걸음걸이를 보니 그동안 열심히 수련한 모양이군.’
걸음걸이가 고양이처럼 가벼워 보였다. 의식적으로 그렇게 걷는 것이 아니라 몸에 밴 걸음걸이였다.
절정 경지를 넘어선 고수와 정면으로 맞붙지 않는 한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혁무천은 은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서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데…….
“구경할 것이 많은가?”
갑자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니. 아무리 은설에게 정신이 팔려있다 해도 실수였다.
혁무천은 나무 위에서 몸을 돌렸다.
여차하면 출수할 생각이었는데, 상대를 보고 힘이 절로 풀어졌다.
승복을 입은 한 노인이 바위 위에 앉아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덩치는 작은데 하얀 수염이 배꼽까지 늘어져 있었다.
혁무천은 나무 위에서 몸을 날려 밑으로 내려왔다.
이 장 앞에 노인이 앉아 있었다.
“소림사에 계신 분입니까?”
“뭐, 그렇다고도 할 수 있지. 소림의 밥을 얻어먹은 지 백 년이 거의 다 됐거든.”
대답이 묘했다. 언뜻 들으면 소림의 제자라는 말 같지만,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 섞여 있었다.
“헌데… 뭘 그리 재미있게 보았는가?”
노승은 노인답지 않게 해맑은 표정이었다.
혁무천은 그래서 더 손을 쓰지도 못하고 곤혹스러웠다.
“제가 아는 사람이 있는지 알아보려고 왔습니다.”
“있던가?”
“예, 다행히 찾았습니다.”
“다행이군. 시주는 운이 좋은 사람이야. 며칠 사이 많은 사람들이 이승을 떠나 부처님 곁으로 갔거든.”
노승은 소림 승려들의 죽음을 이야기하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소림의 제자십니까?”
“글쎄,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노승은 선문답처럼 말하고는 바위에서 일어났다. 역시나 키가 작았다.
“빈승도 하나 물어보겠네. 시주는…… 사람인가, 귀신인가?”
노승이 한발 앞으로 내딛은 순간, 주위의 풍경이 바뀌었다.
사방에 빽빽하던 소나무가 사라지고, 흐릿한 안개가 끼었다.
그리고 그 안개 속에 노승과 혁무천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