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천화 2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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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75회 작성일소설 읽기 : 귀환천화 212화
212화
“후우우우우.”
숨을 길게 내쉰 혁무천은 눈을 천천히 뜨고 손을 들어 목을 만져봤다.
목에 돌출되어 있던 생명선 하나가 하루 만에 사라졌다.
씁쓸했다.
아직도 일곱 줄이나 남았으니 당장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지만, 언제 어느 때 또 줄어들지 누가 안단 말인가.
더구나 갈수록 고수들과 대적할 일이 많아지고 있으니, 줄어드는 시간도 빨라질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생명선이 사라지는 만큼 공력이 늘어난다는 것이었다.
‘그걸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
솔직히 의문이었다. 목숨과 맞바꾼 공력 아닌가 말이다.
아마 은설이 알면 울면서 말릴지도…….
그때 은설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일어나셨어요?”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괜히 속이 뜨끔한 혁무천은 바로 대답했다.
“그래. 무슨 일이냐?”
“무슨 일은 무슨 일이에요. 벌써 사시에요. 아침식사 안 하실 거예요?”
“…….”
금제가 풀리면서 들끓은 진기를 가라앉히느라 대주천을 행했는데, 그사이 여섯 시진이 흘러나 보다.
“알았다. 바로 나가마.”
가부좌를 풀고 몸을 일으킨 혁무천은 확실히 어제보다 몸이 가벼워진 것처럼 느껴졌다.
이 정도면 아침 한 끼 굶어도 그만한 값어치는 한 듯했다.
아침 식사를 마친 혁무천은 일행과 함께 제남 구경에 나섰다.
어차피 천화상단에서 답이 오지 않으면 할 일도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일 뿐, 혁무천은 구경만 하러 다닌 것이 아니었다.
제남 외곽의 유명사찰인 천불사에 들른 혁무천은 깊숙한 곳에 있는 요사채에서 한 사람을 만났다.
목량만 대동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밖에서 감시의 눈을 번뜩였다.
“반갑소, 무천이라 하오.”
“명고선입니다. 숙부님께 말씀은 전해 들었습니다.”
삼십 대 중반의 서생이 두 손을 맞잡고 공수의 예를 취했다.
그는 정주 포원의 주인, 명승연의 조카였다.
“곤란하게 해드릴 생각은 없소. 다만 몇 가지 알고 싶은 것이 있어서 청한 것이니, 곤란하다 싶은 이야기는 하지 않아도 되오.”
명고선의 굳은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그도 무천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단 하루 만에 천화상단을 뒤집어 놓은 사람 아닌가.
그래서 은밀하게 연락이 왔을 때 고민이 컸다.
자칫하면 지난 십 년 동안 이룬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나가야 하나? 모른 척할까?
많은 갈등 끝에 일단 만나보기로 했다. 부친이나 다름없는 명승연이 신뢰하는 사람 아닌가. 외면하면 숙부를 외면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곤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니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
“그리 생각해주시니 고맙습니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어보시지요.”
혁무천은 사소한 것부터 물어보았다.
대부분 남들도 다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 세세한 부분만 모를 뿐.
명고선은 마음 편하게 아는 바대로 이야기했다.
천화상단이 주로 취급하는 물품, 수량 등등…….
개중에는 비밀이라 할 만한 내용도 있었지만, 일급비밀까지는 아니었다.
백만 냥이나 백십만 냥이나. 그 차이를 세세히 안다고 해서 특별히 달라질 것은 없을 듯했다.
하지만 혁무천은 명고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사소하게 여겨지는 숫자가 때로는 결정적인 단서가 될 수도 있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지명, 특산물도 천화상단과 연계시키면 중요한 정보로 탈바꿈했다.
“물건을 구입하는 거래처에 대해서 알고 싶소만.”
“죄송합니다, 그건 비밀이어서 밖에 알리면 안 됩니다.”
명고선은 마음에 걸리는 건 말하지 않았다.
혁무천도 압박하지 않았다.
“아쉽군요. 꼭 알고 싶긴 하지만 어려우시다면 더 묻지 않겠소.”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듣기로는 총단주께서 일 년에 두어 번 황궁에 가신다고 하던데, 올해도 가시오?”
“아마 사흘이나 나흘 후에 출발할 겁니다.”
“가시면 황궁에 납품할 물건의 물량에 대해서도 논의하겠군요.”
“그것 역시 목적 중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명고선은 별 생각 없이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러나 혁무천은 그 말에서 중요한 정보를 두 가지나 얻었다.
‘그렇다면 시간에 쫓기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천궁환이라고 봐야겠군.’
명고선은 한 시진 정도 이야기를 나눈 다음 떠나갔다.
방에 남은 혁무천은 명고선에게 들은 이야기를 정리했다.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얻었군.”
“아마 그는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를 했는지도 모르고 있을 겁니다.”
목량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는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대신 명고선의 표정만 살펴보았다.
때문에 명고선이 한 말이 진실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목량은 명고선의 입을 여는 혁무천의 말솜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혁무천은 상대를 윽박지르지도 않았다.
오히려 안심시키며 답을 자연스럽게 유도했다.
그것도 심각한 질문은 피하고 가벼운 질문만 했다.
또한 한 번에 여러 가지를 묻지 않았다. 하나의 질문에 하나의 내용만 물었다.
하나하나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물량, 시기, 금액, 지역 등 두 가지, 세 가지 답이 합쳐지면 중요한 정보가 되었다.
특히 천궁환이 황궁에 가는 시기와 목적을 알아낸 것은 쾌재를 부를 만큼 엄청난 가치가 있었다.
“이틀 정도 태산 구경이나 하고 오자.”
목량은 혁무천의 말뜻을 깨닫고 빙그레 웃었다.
“아마 많은 사람이 곤혹스러워 할 겁니다.”
“그만큼 가치도 올라가겠지.”
***
혁무천이 천불사에 있을 때, 우문척은 천신명의 방문을 받고 단 둘이 마주앉았다.
“철혈마련의 대공자께서 제남엔 어쩐 일이시오?”
“재미있는 말을 들어서 확인하려고 왔지요. 그런데 내가 잘못 듣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천화상단이 팔대마세를 우습게 여긴다고 하더군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우리 같은 상인이 무슨 힘이 있어 팔대마세를 우습게 여긴단 말입니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담담한 천신명이다.
우문척은 그런 천신명을 지그시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서로 계면쩍은 말은 그만 하지요.”
천신명도 어깨를 으쓱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알고 온 분한테 숨기는 것도 예의는 아니겠지요.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아셨으면 합니다. 우린 강호의 일에는 관여치 않을 겁니다.”
“그거 듣던 중 반가운 말입니다. 옛말에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탈이 없다고 했지요.”
우문척은 오만함이 느껴지는 천신명을 살짝 비꼬았다.
천신명도 기분이 상한 듯 몇 마디 덧붙였다.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인데, 괜히 들쑤셔서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말투는 담담했다. 하지만 그의 말 속에는 은근한 협박이 담겨 있었다.
우문척도 그걸 알기에 표정이 차가워졌다.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어지는 게 사람이지요. 굳이 싸우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세상사 누가 알겠습니까?”
“저런, 내 말뜻을 잘못 알아들으셨군요.”
“내가 말을 잘못 알아들었다?”
“좀 더 확실하게 말씀드리지요. 들쑤시면 철혈마련이 곤란해질 수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아마 련주께 말씀드리면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설명해 주실 거요.”
보다 확실한 협박이다.
우문척은 생각지 못한 천신명의 말에 대소를 터트렸다.
“와하하하하!”
쾅!
탁자를 손바닥으로 내리친 우문척이 냉랭히 말했다.
“장사꾼 나부랭이가 알량한 힘 좀 생겼다고 눈에 보이는 것이 없나 보구나, 천신명!”
천신명은 우문척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분노를 삭이는 듯 눈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천하의 누가 감히 천화상단을 장사꾼 나부랭이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아직도 이해를 못하나 보군. 우문척, 철혈마련의 힘으로 우리 천화상단을 어떻게 할 수 있을 거라고 보나?”
“흥! 못할 것도 없지.”
“똑똑한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어리석군.”
화아아악!
우문척의 몸에서 가공할 기운이 피어났다.
“누가 어리석은지 알려주마!”
천신명 역시 공력을 끌어올렸다.
본래는 이렇게까지 할 생각이 없었다.
그저 우문척이 온 목적을 알아내고 약간의 경고 정도만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깔보는 듯한 우문척의 눈빛과 태도에 속이 울컥했다.
게다가 우문척과 무천이 친한 사이라고 하지 않던가.
전날 무천에게 자존심이 상한 그는 또 한 번의 상처를 입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팔대마세가 뭐 그리 대단하단 말인가.
부친의 세대는 강호와 다투는 것보다 상계에 집중하기 위해 양보했을지 모르지만, 자신의 세대는 또 다르다.
오만한 무부들에게 천화상단의 무서움을 알려주고 싶었다.
부친에게 혼이 날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천화상단의 무력을 언제까지 숨기고만 있을 수도 없는 일 아닌가 말이다.
쾅!
두 사람의 기운이 충돌하며 탁자가 산산이 부서져 좌우로 터져 나갔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여전히 의자에 앉은 채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런데 조금 전과는 또 다른 감정이 복잡하게 얽힌 눈빛이었다. 뭔가 예상치 못했던 상황을 접한 사람들처럼.
그때 방문이 벌컥 열렸다. 양측의 무사들이 서로를 견제하면서 긴장한 표정으로 안을 바라보았다.
부서진 탁자의 잔재가 널려 있고, 두 사람이 앉아서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대공자, 괜찮으십니까?”
“소련주, 다 죽여 버릴까요?”
금방이라도 도검을 빼들고 상대를 향해 휘두를 것 같은 분위기였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손을 들어서 저었다.
“괜찮소.”
“걱정 말고 술이나 한잔 하고 있으시오. 문 닫고.”
밖에서 바라보던 사람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문을 닫았다.
먼저 우문척이 씩, 차갑게 웃었다.
“이제 보니 믿는 구석이 있었군.”
“그대야말로. 역시 강호의 소문은 믿을 것이 못 돼.”
두 사람은 언제 분노했냐는 듯 편한 표정으로 말했다.
“천화가의 아들이 그 힘을 얻었을 줄은 몰랐군.”
“이제야 그대가 밖으로 나서지 않은 이유를 알겠어. 그 힘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다 보니 시간이 필요했겠지.”
두 사람은 공력이 충돌한 직후에야 상대 역시 자신이 얻은 신비의 능력을 얻었다는 걸 눈치 챘다.
그 때문인지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동질감마저 느껴졌다.
“어쨌든 제남까지 온 보람은 있군.”
“이제 서로를 알게 되었으니 다른 이야기를 해보면 어떻겠나? 서로의 꿈을 위해 발전적인 이야기를 할 것이 많을 거 같은데.”
“난 장사꾼들과 깊은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 너무 이익만 밝히거든.”
“무천도 상단 사람 아닌가?”
“그는 좀 다르지. 기본이 무사거든.”
“그럼 이건 어떤가?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 있을 때는 함께 해보는 거.”
“그 정도라면 나쁘지 않군.”
두 사람은 미소를 지으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어찌나 냉랭한지 차라리 인상을 쓰는 것이 어울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천외의 능력을 얻었다는 건, 결국 적이 될 운명이라는 뜻이었다.
***
“무천이… 태산에 갔다고?”
“예, 총단주.”
천궁환은 신시쯤 전해진 소식을 듣고 어이가 없었다.
무천이 일행과 함께 태산 구경에 나섰단다.
천화상단을 한바탕 뒤집어 놓고는 한가하게 태산 구경을 가다니.
“이놈이 무슨 생각이지?”
“아직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만, 그냥 놀러가지는 않았을 겁니다.”
백운의 말에 천궁환은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
“어디에 있는지 알아봐라.”
“예, 총단주.”
“늦어도 나흘 후에는 출발해야 하니 그 전에 데려와야 한다.”
천궁환의 짜증 섞인 그 말에 백운이 멈칫했다.
“……혹시?”
“왜 그러느…… 설마……?”
천궁환도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눈을 홉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