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천화 23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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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64회 작성일소설 읽기 : 귀환천화 233화
233화
십 리나 뻗은 죽림 속에 제법 큰 장원이 있었다.
장원의 이름은 청죽장. 천기회가 임시총단으로 삼고 있는 곳이었다.
고즈넉한 분위기가 흐르는 청죽장 안에는 십여 채의 전각이 있었는데, 그 중 중앙의 이층으로 된 전각 안에 세 사람이 마주앉아 있었다.
신도명산과 신도평, 그리고 와호산장 장주 이현.
이현이 가져온 손바닥만 한 전서를 읽은 신도명산이 조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천주명이 도움을 요청했는데, 평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신도평이 이마를 찌푸렸다.
“도움을 좀 줬다고 우리를 종 부리듯 하겠다는 걸까요?”
“글쎄다. 아마 다급해진 거겠지. 상대로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비룡장에 밀렸으니.”
신도평은 기분이 상했지만, 비룡장이라면 무천이 단주로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천화상단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무천 때문이었다.
‘은설도 그 자식하고 있을 거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은설을 버리는 대신 천상화를 얻을 기회가 오긴 했지만, 자신을 떠난 은설이 그 자식과 함께 있는 꼴은 봐줄 수 없었다.
나란히 함께 있는 모습을 생각하면 울컥 짜증이 솟구쳤다.
“그럼 도와주지요, 아버님. 저들에게 빚을 하나 지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흠, 그래?”
신도명산이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이현에게 물었다.
“자넨 어떻게 생각하나?”
이현은 담담한 표정으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정중하게 거절했으면 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상대가 무천이기 때문입니다.”
조금도 망설임이 없는 이현의 말에 신도명산의 눈이 가늘어졌다.
신도평도 기분이 상한 듯 눈초리가 위로 솟구쳤고.
“무슨 말씀입니까? 상대가 무천이기 때문에 천주명의 청을 거절하라니요?”
“성공했을 때 얻는 것에 비해서 실패했을 때 잃는 것이 너무 크네.”
“비천령주께선 우리가 비룡장 하나 상대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십니까?”
“내가 말했지 않은가? 상대가 무천이기 때문이라고. 비룡장이 아니라.”
“그 말이 그 말 아닙니까?”
신도평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표정에서도 상한 기분이 역력하게 느껴졌다.
그때 신도명산이 말했다.
“무천이란 친구가 대단하다는 말을 듣긴 했지. 그런데 비천령주까지 그자를 그리 높게 평가할 줄은 몰랐군.”
지난 일 년 동안, 강호에서 가장 유명해진 사람 중 하나가 바로 무천이다.
신도명산도 그의 이름을 몇 번 듣긴 했지만, 그저 강호의 신진고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자신이 천재라 인정한 이현이 그를 높게 평가하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뭐랄까, 호승심이랄까?
젊은 놈에게 호승심을 느낀다는 게 어이없긴 했지만, 본능은 숨길 수 없었다.
“그는 당금 강호에서 가장 위험한 자들 중 하나입니다. 천주명 때문에 그런 자를 적으로 돌린다는 건 결코 득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이현이 자신의 생각을 말하자, 신도평이 입술을 비틀었다.
“흣! 글쎄요. 무천은 저도 상대해봤습니다. 솔직히 비천령주께서 말씀하신 것만큼 대단한 자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이현은 미소만 지었다.
뭐라 할 건가. 기분이 상해서 반박하는 신도평과 말싸움을 할 수도 없지 않은가 말이다.
그런데 신도명산이 말했다.
“자네가 무엇을 우려하는지 잘 알겠네. 허나 우리 천기회가 한 사람에게 막혀 무언가를 하지 못한다면 마도와 어떻게 싸우겠는가?”
“아버님 말씀이 백번 옳습니다.”
신도평은 반색했다.
반면 이현은 여전히 미소 띤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도명산이 마저 말했다.
“게다가 정은맹이 마도연합과의 싸움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네. 우리도 참여했다고 하나 전체적으로 따지면 일부에 불과할 뿐이지.”
그 일을 생각하면 너무나 아까웠다.
정은맹이 그 정도 준비를 한 줄 알았다면 더 많은 전력을 투입했을 텐데…….
자신이 직접 참여했어도 괜찮았을 것 같고.
그럼 천기회와 자신의 위명을 만천하에 떨쳤을 것 아닌가 말이다.
하지만 아쉬워도 이미 지난 일이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마도연합 쪽에서 강력한 공격이 시작될 것이다.
불길 속으로 뛰어들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 힘만으로 뭔가 해야 하지 않겠나? 굳이 천주명의 요청이 아니어도, 비룡장의 물자가 마도에게 넘어가는 걸 막는 것 역시 우리 천기회가 할 일이네.”
일견 옳은 말이었다.
전쟁에서 물자 보급을 차단하는 건 기본 중에 기본이니까.
하지만 강호의 전쟁은 나라 간의 전쟁과 다르다.
강호 세력이 양민을 공격하면 도적이 된다. 황궁이 대규모 군사를 동원해서 토벌전에 나설 수 있다.
나라에 세금을 내는 상인 역시 마찬가지.
마도가 정파에게 물자를 넘기는 상인을 대놓고 공격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물론 최악의 상황이 닥치면 물불을 안 가리겠지만.
더구나 비룡장은 공격하면서 천화상단은 그냥 놔둔다면, 강호의 평화를 위해 정의를 일으켜 세우겠다는 명분마저 약해진다.
하지만 이현은 고집을 피우지 않았다.
“회주께서 그리 하시겠다면 제가 어찌 말릴 수 있겠습니까. 다만 신중을 기해주셨으면 하는 마음일 뿐입니다.”
이미 두 부자는 마음의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거기다 무천에 대한 경쟁심마저 강해서 무슨 말을 해도 주장을 굽힐 것 같지 않았다.
“아버님, 소자가 직접 가서 처리하겠습니다.”
“네가?”
“일개 상인의 무리도 처리하지 못한다면 마도의 무리와 어찌 싸울 수 있겠습니까.”
“흐음, 좋다. 장로 셋과 천무대를 붙여주마. 비천령주는 평아가 무사히 일을 마칠 수 있도록 도와주게.”
“예, 회주.”
방에서 나온 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비라도 오려는지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꼭 자신의 가슴 속을 보는 듯했다.
‘답답하군. 비라도 오면 좀 나으려나?’
언젠가부터 회의감이 들었다.
아마도 소림사에서 나온 직후부터였을 것이다.
회주는 소림사에 한 제의를 자신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아마 자신이 아직 모를 거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물어보지도, 따지지도, 아는 척하지도 않았으니까.
왜 회주는 밀소림과 관련된 사항을 말해주지 않았을까.
사정이 있겠지. 자신만 아는 사정이.
문제는 그 후였다.
천화상단에 갈 때도 자신은 제외했다. 그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자세한 내용도 알 수가 없었다.
왜… 왜…… 왜……?
고개를 저은 이현은 마당으로 나갔다.
하늘에서 빗방울이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고 있었다.
‘회주, 그를 건드리면 회주의 운세가 바뀔 거요.’
***
빗방울이 떨어지는 오후, 금룡장 후원에서 사소한 말다툼이 벌어졌다.
“정말 안 갈 거예요?”
툴툴거리는 여자 목소리. 사공미미였다.
“그래, 우린 안 간다.”
딱 부러지게 대답한 사람은 혁무천이었고.
“쳇, 그럼 나도 안 가요.”
“너는 가.”
“싫어요. 안 갈래요. 괜찮지, 설 동생?”
사공미미는 투덜거리다가 은설을 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은설도 사공미미의 시원한 태도는 어떻게 하지 못했다.
“정말 괜찮겠어요?”
“뭐 어때? 숙부님도 계신데.”
그랬다.
사공미미 뿐만이 아니었다. 사공진도 금룡장으로 왔다.
그 일로 사도맹 맹도들을 이끄는 태상장로 사공철이 골머리를 앓을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속 시원해한다는 말이 들렸다.
나이 먹은 말썽쟁이 사공진.
가는 곳마다 문제를 일으키는 사공미미.
그 둘을 떼어놓고 갈 수 있어 다행으로 생각한 듯했다.
사실 혁무천도 그들이 금룡장에 머무는 걸 싫어하지는 않았다.
강하게 나가야만 행동을 제어할 수 있어서 짐짓 싫어하는 척 한 것일 뿐.
사공미미야 없는 셈 친다지만, 사공진은 제 밥값을 할 수 있는 전력이었다.
“조카는 알아서 챙기십시오. 만약 해가 된다 싶으면 바로 내보낼 겁니다.”
“걱정 말게. 미미는 내가 돌볼 테니까.”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사공진과 사공미미는 죽이 잘 맞았다.
그날 오후, 대대적인 이동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하루에 일천여 명씩 나누어서 가는 게 아니라 오천여 명이 두 번에 걸쳐서 이동하기로 했다.
각 세력의 수장들이 자파의 무사들을 이끌고 직접 길을 나선다고 했다.
남양성 인근의 황군조차도 그들의 대규모 이동을 바짝 긴장해서 주시했다.
때 맞춰서 금룡장의 정문도 활짝 열렸다.
마차 삼십 대가 물건을 가득 싣고 마도연합 무사들의 뒤를 따라가기로 했다.
전면에 삼천 명에 가까운 보표(?)들이 있는 셈.
그 어느 때보다 안전한 표행이었다.
보표의 숫자가 많을 필요도 없으니 경비까지 절감되었다.
꿩 먹고, 알 먹고.
마지막 마차가 금룡장 정문을 빠져나간 후 금룡장 내원에서 회의가 열렸다.
“목량, 싸움이 끝나려면 얼마나 걸릴 거라 보느냐?”
“마도연합이 대패하는 바람에 이번 싸움은 길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매입해둔 물량은 모두 처분할 수 있겠군.”
“예, 대형. 오히려 모자랄지도 모릅니다.”
“물량 공급에 차질이 없어야 한다. 자금이 허용되는 한 계속 사들여라.”
“이미 가격이 많이 올랐습니다. 괜찮겠습니까?”
“걱정할 것 없다. 두 달만 넘어가면 손해 보지 않고 팔 수 있는 곳이 있으니까.”
“아…….”
그제야 목량도 천화광과 사공곽이 혁무천과 내기를 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나직이 탄성을 발했다.
“알겠습니다. 즉시 대형의 말씀을 비룡장과 무원장에 전달하겠습니다.”
“이번 정사대회전의 결과에 따라서 중원의 상계 판도가 재편될 거다. 백리양에게 그에 대한 준비도 미리 생각해 놓으라고 전해라.”
“예, 대형.”
목량의 대답 이후, 혁무천은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표장이 각양각색이었다.
그 와중에 공통된 점은 ‘독한 놈!’이라고 소리치는 것을 참는 표정이었다.
한두 사람은 ‘돈이 그렇게 좋냐?’라고 따지고 싶어 하는 듯했다.
‘아니, 내가 뭐 나쁜 짓을 해서?’
혁무천은 사람들의 표정에 불만이 있었지만, 그에 대해선 따지지 않았다.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자유니까.
대신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전혀 생각 못한 이야기를 했다.
“이번 장사에서 남는 이익은 비룡단원에게도 적절하게 나누어줄 생각이오. 아마 한 사람당 은자 만 냥 이상은 되지 않을까 싶은데… 싫으신 분은 언제든 비룡단에서 나가셔도 상관없소.”
“…….”
갑자기 사람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마치 ‘당신의 말이 진리입니다!’라고 외치는 광신도들의 표정과 비슷했다.
그래도 말로는 조금 순화 시켜서 자신의 뜻을 전했다.
“그거 좋은 생각이군. 근데… 나중에 번복하는 건 아니지?”
“무슨 소립니까, 동 대형! 무 대형이 언제 거짓말하는 거 본 적 있어요?”
“나는 처음부터 무천 자네를 믿었네. 허허허.”
조용히 있던 사공진도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나도… 주나?”
혁무천은 그들의 말에 간단하게 답했다.
“공정하게, 일하는 만큼 드릴 겁니다. 뭐, 더러운 돈은 필요 없다는 분만 빼고요.”
“…….”
“……!”
“어떤 시키가 그딴 말을!”
“그딴 말을 하는 시키는 당연히 주면 안 되지.”
이번만큼은 송비와 사공진의 의견이 일치했다.
***
폭풍 전야의 고요가 천하무림을 짓누르고 있을 때.
복우산 천망봉 아래의 전각 안.
커다란 탁자를 가운데 두고 사마진웅과 정은맹 주요 간부 이십여 명이 둘러 앉아 있었다.
“드디어 마도의 수장들이 하나둘 서협으로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곧 놈들도 복우산으로 들어올 겁니다.”
“이번에도 놈들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 줍시다.”
힘이 실린 목소리에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