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천화 23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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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73회 작성일소설 읽기 : 귀환천화 232화
232화
무천은 차를 마시다 말고 일어나서 천양묵의 거처로 갔다.
천양묵의 거처는 그 어느 때보다 무거운 분위기가 흘렀다. 보이지 않는 곳에 은신한 호위무사도 전에 비해 두 배는 되었다.
무천이 안내를 받아서 방에 들어가자, 천양묵이 앉아서 맞이했다. 그의 옆에는 사야가 그림자처럼 고요히 서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편지를 쓰고 있지 않았다.
“그리 앉아라.”
무천은 포권을 취한 후 천양묵 맞은편에 앉았다.
“너도 소식을 들었을 거다.”
아침부터 시끄러웠다.
옥가장에 있는 사람이라면 모르는 게 이상했다.
“들었습니다.”
“네 말대로 전쟁이 길어질 것 같다.”
“그리 좋은 일은 아니군요.”
“왜? 너는 돈을 더 벌 수 있으니 좋은 거 아니냐?”
“제가 돈을 더 버는 것과 좋은 일은 다르지요. 앞으로 사람이 그만큼 더 죽어갈 텐데, 그게 어찌 좋은 일이겠습니까?”
천양묵은 담담히 말하는 혁무천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하지만 곧 쓴웃음을 지었다.
“네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나도 잘 모르겠군.”
“그걸 꼭 따져야만 하겠습니까?”
“하긴…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어쨌든 네 말대로 되어 간다는 건, 네가 한 말 역시 진실일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겠지.”
천기회와 천화상단, 그리고 정은맹의 백색복면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말함이었다.
“믿지 않으셨나 보군요.”
“만마성 정도 큰 문파를 다스리다 보면, 직접 확인하기 전에는 그 어느 것도 믿어서는 안 되느니라.”
“이해합니다.”
“그래서 나는 네 정체도 믿지 않고 있다.”
천양묵이 그 말을 던져놓고 혁무천의 두 눈을 직시했다. 조금만 틈이 보이면 바늘을 쑤셔댈 것처럼.
혁무천은 미소를 지으며 나직이 말했다.
“저는 저일 뿐입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요.”
“만마성이 수집한 모든 정보를 뒤져서 너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런데 묘하더군. 작년 이전에는 자네라는 존재 자체가 어디에도 없어.”
“당연하지요. 아무도 없는 서천의 깊은 산속에서 지냈으니까요.”
어떻게 생각하면 거짓말이라고만 할 수도 없었다.
공가산 깊은 곳에서 지낸 건 사실이니까. 비록 정상적인 삶을 살아온 건 아니지만.
“어딘지 몰라도 나도 몇 년 정도는 그런 곳에서 살아봤으면 싶군.”
몇 년?
하루만 지나도 뛰쳐나오고 싶을 텐데?
“그리 썩 좋은 곳은 아닙니다. 아니,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아니지요.”
“설마 내가 그 말을 믿을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똑바로 쳐다보며 말하는 천양묵에게서 가공할 기운이 피어났다. 심장을 오그라들게 하는 섬뜩한 기운. 만마성이 자랑하는 묵혼천마기였다.
“믿어서 손해 볼 것도 없지 않습니까?”
혁무천의 몸에서도 기운이 뻗어 나오며 묵혼천마기가 접근하는 것을 막았다.
웅웅웅웅.
두 기운이 뒤엉키면서 묵직한 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두 사람은 그 상태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서로를 노려보았다.
“나는 너 같은 고수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졌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당연히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았지요. 물론 땅에서 솟은 것도 아닙니다만.”
파스스스스.
두 사람 사이에 있던 탁자가 탁자 위의 찻잔과 함께 가루가 되어서 주저앉았다.
아마 사람이 그곳에 있었다면 그 사람 역시 짓이겨져서 핏덩이로 화했으리라.
“오늘은 편지를 쓰지 않으신 게 다행이군요. 하마터면 고생고생해서 쓴 것을 날려버릴 뻔했지 않습니까.”
“그럴 것 같아서 안 썼다. 그럼 부인이 더 실망할지 모르거든.”
고오오오오오.
무형의 기로 이루어진 직경 일 장 크기의 구(球)가 결계처럼 두 사람을 에워쌌다.
바닥에 수북이 쌓여 있던 가루가 구의 경계를 따라 솟구치면서 두 사람의 모습이 희미해졌다.
혁무천은 무작정 밀어붙이는 천양묵에게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강하게 나오면, 어쩔 수 없이 생명을 몇 년 포기하더라도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는 걸 알려주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그때, 천양묵이 불쑥 말했다.
“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더 이상 너를 곤란하게 하지 않겠다.”
아마도 그 목적 때문에 자신을 시험한 것 같다.
“아무리 친구의 부친이라 해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만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아마 너에게도 나쁘지 않은 제안일 거다.”
“만마성의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건 이미 말씀드렸으니 다른 제안을 하셔야 할 겁니다.”
“본좌 앞에서 너처럼 건방지게 말하는 놈이 있다는 걸 호법들이 알면, 아마 너를 당장 죽여야 한다고 난리를 칠 거다.”
‘알지 모르겠군. 전에는 내 앞에서 당신처럼 말하는 사람도 없었지.’
혁무천은 그 말이 목구멍까지 나온 걸 눌러 삼켰다.
해봐야 ‘미친놈!’ 소리밖에 더 들을까.
“일단 말씀해보시지요. 저에게 뭘 바라십니까?”
잠시 후.
천양묵의 방을 나온 혁무천의 눈에 곤혹함이 가득했다.
‘의외군. 그가 그런 제안을 하다니.’
혁무천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따라 나온 사야가 말없이 걷고 있었다.
“네가 성주에게 말한 거냐?”
아무리 생각해도 자존심 강한 천양묵이 스스로 생각해서 할 제안이 아니었다.
사야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고개를 돌려 혁무천을 바라보는 눈에서도 묘한 빛이 반짝였다.
“서로에게 좋을 것 같아서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솔직히 주군께서 순순히 받아들이실 줄은 저도 몰랐어요.”
역시 사야가 내놓은 의견이었다.
득이 될지 실이 될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자신에게 손해될 제안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정말 이상한 여인이군.’
다음에 천양묵을 만나면 사야에 대해 자세히 한번 물어봐야 할 것 같다.
천화광이야 사야를 싫어해서 물어본다 한들 전에 한 말 이상 듣기는 어려울 것 같으니까.
사야는 월동문까지만 따라온 후 걸음을 멈추었다.
혁무천은 그녀를 슬쩍 바라본 후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문득 마주친 사야의 눈동자 색이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는 왜 몰랐지?
생각에 잠긴 채 거처로 돌아가던 혁무천은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잠깐 나 좀 보…자.”
말꼬리가 묘하게 틀어진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리자, 건물의 그림자 속에서 나오는 천두공이 보였다.
“이 밤에 어쩐 일이십니까? 또 오줌 싸러 나오셨습니까?”
“따라 와…라.”
여전히 말꼬리가 어색했다.
천두공은 그 말만 하고 몸을 돌렸다.
혁무천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하고 그를 따라갔다.
천두공은 혁무천을 아무도 없는 공터로 데려갔다.
설마 여기서 한판 하자는 건 아니겠지?
혁무천은 그렇게 생각하며 천두공을 바라보았다.
그때 천두공이 몸을 돌리더니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너… 마천제 님과 무슨 관계냐?”
“…….”
너무 갑작스런 질문에 혁무천은 바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알았지?’
답답한지 천두공이 또 물었다.
“거짓말하지 말고 솔직히 말해라. 나는 어릴 적에 마천제 님을 직접 뵌 적이 있다.”
‘헛! 그게 몇 년 전인데!’
혁무천은 정말로 놀랐다. 얼마나 놀랐는지 심장이 떨어진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아마 열두 살 때였을 거다. 그분이 만마성에 왔었지. 멀리서 보긴 했지만, 지금도 그때 광경이 잊히지 않는다.”
혁무천도 기억이 났다. 그에게는 불과 몇 년 전 일이니까.
만마성에 가서 만마대종 천국승과 대결을 벌였다.
그 대결에서 그는 이겼고, 만마대종을 수하로 삼았다.
그런데 그걸 봤다고?
‘가만? 그래, 꼬마 둘이 건물 뒤에 서서 눈을 크게 뜨고 서 있었는데… 설마…… 그 꼬마 중 큰 놈이……?’
혁무천은 새삼스런 마음에 눈이 커져서 천두공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우와!’하며 놀라던 그 꼬마와 백 살이 훨씬 넘은 천두공의 모습이 잘 겹쳐지지 않았다.
‘그래도 얼굴 형상은 그 꼬마와 조금 닮은 것 같긴 한데…….’
그의 속마음도 모르고 천두공이 진지하게 말했다.
“네가 전에 만마총에 왔을 때 펼친 신법, 분명 그때 본 것과 비슷했지. 그리고 네 그 얼굴…….”
천두공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온 순간, 혁무천은 갈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을 알아봤다면 죽여야 한다.
반드시!
‘은설이 알면 안 돼!’
혁무천은 암암리에 공력을 끌어올렸다.
단 일 수로 죽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봉인해 놓은 무공을 펼치는 수밖에 없다.
지옥의 무공을.
그의 뒷짐 진 양손이 어둠 속에서 묵빛으로 물들어갔다.
그때 천두공이 말했다.
“혹시 너… 아니 자네… 마천제 님의 후손 아닌가?”
멈칫한 혁무천이 천두공의 눈을 바라보았다.
후손이냐고?
검게 물들어가던 양손이 조금씩 제 색을 찾아갔다.
그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아마 은설에게 변명할 때를 제외하고는 가장 빨리 굴린 것 같았다.
후손과 마천제 본인은 하늘과 땅 차이다.
생각해 보니, 최악의 경우에 그런 말로 벗어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천두공 덕분에 길을 하나 찾아냈다.
결론을 내린 그가 대답했다.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할 거요?”
갑자기 천두공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한숨을 쉬었다.
“후우우우, 역시 그러셨구려.”
말투도 달라졌다.
이제는 혁무천이 살짝 당황했다.
‘이 노인네가 왜 이러지?’
더 당황할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천두공이 갑자기 무릎을 꿇는 것 아닌가.
“신 천두공이 주군의 후인을 뵈오.”
“…….”
말문이 막힌 혁무천은 뒷짐 진 손을 풀어서 앞으로 뻗었다.
무릎을 꿇었던 천두공의 몸이 저절로 일으켜졌다.
“이거 왜 이러십니까? 그… 선조…님과 관계가 끝난 지 언젠데.”
자신에게 선조라는 말을 쓰려니 머쓱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천두공의 고집도 만만치 않았다.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이 늙은이는 아닙니다. 마천제께서는 조부님의 주군이셨던 분입니다. 그리고… 제가 마음속의 신으로 섬겼던 분이지요. 그분의 후인이시라면 당연히 이 늙은이의 주인이 되실 자격이 있으십니다.”
뭔 신까지나.
혁무천은 머쓱한 마음을 한쪽에 눌러놓고 고개를 저었다.
“나는 노인네의 주인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니 마음 편하게 지내십시오.”
“정녕 허락하지 않으신다면…….”
천두공이 말꼬리를 끌더니, 갑자기 우수를 머리 위로 쳐들었다.
그게 무슨 자세인지 아는 혁무천은 깜짝 놀라서 급히 우수를 뻗었다.
백회혈을 향해 떨어지려던 천두공의 손이 멈췄다.
“무슨 짓입니까?”
“살만큼 살았는데 무엇이 아쉽겠습니까. 주군께서 받아주시지 않으니 이제 그만 가야지요.”
처연한 천두공의 말에 혁무천은 한숨만 나왔다.
도대체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는지…….
그렇다고 죽게 놔둘 수도 없는 일이었다.
꼬마, 노인은 자신을 신처럼 생각한 죄밖에 없지 않은가 말이다.
“후우, 좋습니다. 단, 남들 앞에서는 내색하지 않으셔야 합니다. 당연히 말투도 바꾸셔야 하고요. 그걸 받아들이시지 않으신다면 저도 받아줄 수 없습니다.”
천두공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졌다.
“알겠습니다, 주군.”
“말투요.”
“아, 알겠소, 주군.”
“말…….”
“이 이상은 이 늙은이도 양보 못하겠소.”
좌우간 노인네 고집은…….
“그럼 그렇게 하죠. 대신 다른 사람 있을 때는 말을 놓으십시오. 안 그러면 지금까지 한 이야기, 다 없던 걸로 할 겁니다.”
“정 원하신다면…….”
그제야 혁무천은 안심했다.
“허허허, 혹시 뭐 불편한 건 없으시오?”
“괜찮습니다. 그만 가서 쉬십시오.”
“말 안 듣는 놈들 있으면 말씀하시구려. 내가 가서 그냥 팔다리를……!”
“저 먼저 가보겠습니다.”
혁무천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돌아섰다.
‘죽게 놔둘 걸 그랬나?’
하지만 그건 너무 야박하고…….
자신을 마음속의 신으로 생각하며 살아온 사람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