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천화 22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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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화
“그야 제일 싸기 때문이지요. 물건도 좋고.”
“가격이나 물건은 천화상단도 뒤질 것 없다고 들었소만.”
“말이 나왔으니 물어보겠소. 혈왕동은 천화상단이 강호에 뛰어드는 걸 방치할 생각이시오?”
“어차피 우리가 말린다고 들을 자들도 아니잖소? 더구나 강호무림이 아닌, 상계에만 진출할 생각이라 했소. 그렇다면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할 뿐이지요.”
능전평이나 공손락 등 팔대마세의 주인들 역시 천화상단의 무력이 자신들에게 뒤지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여태 소 닭 보듯 지낸 것은 서로가 정한 선을 안 넘어왔기 때문이다. 천화상단이 마도에 특별히 반하는 행동을 하지도 않았고.
그런데 천양묵의 다음 말에 분위기가 달라졌다.
“만약 그들이 정파를 몰래 도와주고 있다면 어떻게 하실 거요?”
“무슨 말씀이오? 그럼 천화상단이 정파를 도와주고 있기라도 한단 말이오?”
능전평 뿐만 아니라 공손락 등 마도의 수장들이 모두 놀란 표정으로 천양묵을 바라보았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천화상단에 대해서 다르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중도가 아닌 적군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아직 확실한 증거가 없어서 말씀을 드리지 않았소만, 심정적인 판단으로는 사실이라 생각하고 있소.”
“너무 앞서 가시는 거 아니오?”
“그래서 심정적인 판단이라 하지 않았소?”
그쯤에서 공손락이 나섰다.
“자자, 모든 일이 순조롭게 흘러가는데 분위기가 너무 가라앉은 것 같구려. 무천이란 아이의 이야기는 그만하는 게 좋겠소. 천화상단에 대해서도 증거가 나온 다음에 이야기하는 게 좋겠소만.”
천양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능전평과 말싸움하고 싶지는 않았다.
능전평도 마지못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지요.”
그때 대전 안으로 한 사람이 들어서더니, 마도의 수장들이 앉아 있는 곳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만마성 귀이당 당주 육구산이었다. 그런데 얼굴이 잔뜩 굳은 표정이었다.
안 그래도 어색한 상황이었던지라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시선이 돌아갔다.
마도의 수장들 앞까지 다가온 육구산이 걸음을 멈추더니 포권을 취하고 말했다.
“방금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혈선곡으로 진입했던 제 이로의 토벌대가… 적의 암습을 받아 격전 중이라 합니다. 그런데… 상황이 썩 좋지 않다는 보고입니다.”
천양묵이 이마를 찌푸리고 물었다.
“썩 좋지 않다? 어느 정도인데 그런 식의 보고를 한단 말이냐?”
“먼저 진입해서 오 리 정도 앞서갔던 무사대 이백이 전멸했다고 합니다.”
“뭐야?”
“문제는… 뒤따라 들어간 무사 오백에게서 소식이 끊겼다는 것입니다.”
“소식이 끊기다니?”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보려고 계곡 안쪽으로 들어간 사람들도 앞서 간 사람은 만나지 못한 채,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되돌아 나왔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는 앞서 간 자들과 연락이 안 된다고 합니다.”
당장 축배를 들 것만 같던 뜨거운 분위기가 급격히 차갑게 식었다.
“다른 곳의 소식은 아직 들어오지 않았느냐?”
“아직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다급한 표정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자는 포권을 취한 채 한쪽 무릎을 꿇고는 보고를 올렸다.
“성주께 아룁니다! 복우산으로 들어간 삼로의 연락이 모두 끊겼다고 합니다!”
앉아 있던 자들이 일제히 일어섰다.
불길한 상상이 등골을 타고 꼬리뼈까지 훑어 내렸다.
***
혁무천도 마도연합 수장들이 받은 보고와 비슷한 내용의 보고를 받았다.
목량과 마주앉은 그가 물었다.
“복우산으로 들어간 오천 무사와 연락이 안 된단 말이지?”
“그렇다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혁무천의 말에 목량이 굳은 표정으로 답했다.
“셋으로 나누어져서 들어갔는데도 모두 연락이 끊겼다면, 산 전체가 함정일 가능성이 큽니다.”
혁무천은 문득 대마천이 정파를 사천으로 끌어들여서 벌인 건곤일척의 승부를 떠올렸다.
그때 일만여 명의 정파무사들이 몰려들었고, 결국 대마천이 승리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번에는 그때와 반대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듯했다.
‘혈천여록을 가져간 자. 그가 주도한 건가?’
혈천여록에 정파의 무사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방법과 공격 방법까지, 마령자와 함께 세운 계획을 적어놓았었다.
몇 가지 다른 부분이 있지만, 아무래도 혈천여록을 가져간 자가 그 계획을 응용한 것 같다.
“마도 쪽이 제대로 걸린 건가?”
“그렇다고 봐야지요.”
“그럼 이제 힘의 균형이 얼추 맞춰지겠군.”
“솔직히, 조금 무섭습니다.”
“뭐가 말이냐?”
“정파 안에 현재 진행되는 일을 자신 손바닥처럼 들여다보는 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 모든 일이 그자의 뜻대로 흐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혁무천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데 목량, 어쩌면 말이다, 저들이 펼친 계책, 원래 내가 짜놓은 것을 써먹은 것 같구나.’
그 이야기를 누구에게 할 것인가.
아무리 목량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혁무천은 그 일에 더 신경 쓸 수가 없었다.
송비가 급한 발걸음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단주! 남양으로 오던 표행이 동한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에게 공격 받았다는 연락이 왔네.”
***
비룡단은 즉시 말을 타고 옥가장을 나섰다.
동한은 남양과 당하 사이에 있는 마을이었다. 표행이 공격당한 곳은 동한에서 십여 리 떨어진 곳이었다.
동한에서 점심을 먹고 남양으로 향하던 중 공격을 받은 것이다.
“어떤 죽일 놈들이 저지른 짓인지 몰라도, 만약 물건에 이상이 생겼으면 골치 아파질 것 같네.”
송비가 불만스런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공격받은 표행의 표물은 포목과 옷, 무기였다. 스무 대의 마차에 일만 명이 입을 수 있는 무복과 다용도로 쓸 포목, 그리고 철룡가에서 만든 무기가 실려 있었다.
은자로 따져도 삼십만 냥 이상의 가치가 있는 물량.
잃는다면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자칫하면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을 잃을 수도 있었다.
이제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었지 않은가.
필요한 물건을 제때 대주지 못하면 보상은 물론, 신용이 훼손될 수밖에 없다.
금룡장에 있는 물량으로 버틸 수 있는 시간은 한 달 정도.
그 이후 물량이 없어 상대가 거래처를 다른 곳으로 바꾼다 해도 어디에 하소연조차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한 시진 정도 달려가자, 저 멀리서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마주 달려오는 자들이 보였다.
상당히 많은 숫자였다.
“오백 명이 조금 넘는군. 우리 표행이 맞긴 한데, 인원이 생각보다 많군.”
눈 좋은 동대안이 앞쪽을 노려보더니 말했다.
사람들은 동대안을 힐끔거렸다.
그가 품은 의문보다 ‘오백 명이 조금 넘는군.’이라는 말 때문이었다.
아무리 봐도 뿌연 먼지구름에 뒤섞여서 몇 명이나 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 있게 숫자를 말하는 동대안이다.
그럼에도 사람들 대부분은 그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저 동대안의 불가사의한 시력에 놀랄 뿐.
하지만 새롭게 가세한 추씨 삼형제는 아직 동대안을 잘 모르기에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추삼이 빈정거리듯 말했다.
“동 형은 눈이 열 개는 되는가 보군. 저 먼 곳의 사람 숫자를 세다니.”
“그게 뭐 어려워서? 대충 세어봤는데, 오백열두 명에서 오백열다섯 명 사이야. 한 사오십 명은 부상을 당한 것 같고. 못 믿겠으면 내기할까? 은자 열 냥, 어때?”
먼지구름에 뒤덮인 행렬을 바라본 추삼이 흔쾌히 내기를 받아들였다.
“좋아, 하지.”
기존의 비룡단원들은 추삼을 안쓰러워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추일과 추이는 분위기가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들 저런 표정이지?’
그 사이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표행의 인원은 정확히 오백열네 명이었다.
풍양표국의 표사가 주축이었고, 거기에 비룡장 용검당 무사 오십 명이 함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을 다 합해도 백오십여 명에 불과했다.
나머지 삼백여 명은 다른 세력의 무사들이었다. 그리고 그 중에는 혁무천이 잘 아는 사람도 있었다.
철혈마련의 대공자 우문척. 그가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 장로 한상귀도 있었고.
혁무천은 자신을 보며 미소를 짓는 우문척을 보고 눈빛을 반짝였다.
“그대가 표행과 함께 올 줄은 몰랐군.”
우문척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따로 올까 했는데, 밥을 공짜로 준다고 하더군. 그래서 경비를 아끼려고 함께 왔지.”
우문척에게 서신을 전해 호위를 부탁했다. 어차피 철혈마련에서도 추가 지원대를 파견할 테니 그에 맞추면 되지 않을까 했다.
철혈마련은 무천의 청을 받아들여서 무사 사백을 보냈다. 어차피 가는 길, 경비는 물론 대가까지 받을 수 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그 일행에 우문척까지 함께 올 거라고는 혁무천도 예상치 못했다. 철혈마련의 대공자가 표행을 지키는 일에 나설 줄이야.
어쨌든 운송에 철혈마련을 끌어들인 일은 성공한 셈이었다.
그들은 십 리 정도 간격을 두고 표행을 뒤따라갔다.
그런데 당하를 출발해서 남양으로 가던 중, 복면을 쓴 자들이 표행을 공격하는 걸 목도했다.
표행을 공격하는 복면인들의 숫자가 훨씬 적었음에도 밀리는 쪽은 표사들이었다.
그만큼 복면인들이 고수들이라는 뜻이었다.
우문척은 즉시 도움의 손길을 뻗었다.
“어떤 자들인지 몰라도 실력이 제법이더군. 특히 두어 놈은 초절정 경지의 고수였지.”
혁무천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그런 고수가 단순 도적일 리 없었다. 산왕 호광 같은 녹림삼왕 중 하나가 아니라면.
“정말 누군지 알 수 없었나?”
“강호 경험이 많은 장로들조차 그자들의 정체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네.”
혁무천이 우문척의 옆을 보자, 장로 한상귀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오랜만이군.”
“장로께서도 알지 못하는 자들이었습니까?”
“솔직히 그런 고수가 알려지지 않았다는 게 이상할 정도네.”
“그렇게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고수가 있는 곳이 있지요.”
혁무천이 그리 말하고 우문척을 바라보았다.
“아마 그대도 알 거야.”
우문척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설마……?”
“몰랐나?”
“훗, 어이가 없군. 그렇게 무모한 놈들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생포한 자도 없나?”
우문척이 어색한 표정으로 답했다.
“둘을 잡았는데, 잠깐 방심한 사이 자결을 해버렸네.”
“철혈마련도 생각보다 철저하지 못하군. 기왕 도와줄 거면 범인까지 잡아줘야지 말이야.”
우문척이 쓴웃음만 짓고 바로 대답하지 않자, 한상귀 옆에 서 있던 중년인이 눈을 치켜뜨고 다그쳤다.
“말이 심하구나! 물에 빠진 놈 꺼내줬더니 보따리까지 내놓으라는 거냐?”
혁무천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어차피 도와줬으면 뒤도 책임져 줘야 완벽하지 않겠소?”
“뭐라? 하아! 이거 새파란 놈이 칼만 안 들이댔지, 날강도가 따로 없구나!”
그는 우문척의 숙부인 우문당이었다.
우문척은 숙부의 다그침을 듣고도 가만 놔두었다.
우문당은 고집이 세고 행동도 제멋대로였다. 그 때문에 우문강천이 이십 년 넘게 골머리를 앓았다.
동생만 아니면 죽여 버렸을 거라는 말을 심심치 않게 했을 정도.
당연히 조카인 자신의 말도 잘 듣지 않았다.
이 기회에 한번쯤 색다른 경험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혁무천이 우문당을 보며 말했다.
“진짜 날강도를 만나보지 못하셨군.”
“뭐야?”
“내가 진짜 날강도였다면, 왜 미리 그놈들을 막지 못해서 무원장 무사들을 죽게 했냐고 따졌을 거요.”
“허어, 뭐 이런 놈이…….”
“아마 거리를 두고 따라가며 어떻게 하나 두고 봤겠지요. 적당한 때 나타나서 구해주면 고마워하겠지, 하면서.”
혁무천의 목소리가 점차 낮아졌다. 싸늘함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