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천화 22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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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36회 작성일소설 읽기 : 귀환천화 224화
224화
“아마 성주께서도 듣기는 했을 겁니다. 복면인들에 대해서.”
“그들은 정은맹…….”
천양묵은 의아한 표정으로 말하다 말고 말꼬리를 흐렸다.
그들이 정은맹에 속한 자들이라면 무천이 굳이 정체를 모른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라는 거냐?”
“제 생각입니다만, 정은맹에서도 그자들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극소수일 겁니다.”
“뭐 그런…….”
“그리고 그자들이 얻은 힘에 대해 아는 사람은 더욱 적을 겁니다.”
천양묵은 입을 꾹 닫은 채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혁무천의 말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혁무천이 마지막으로 방점을 찍었다.
“문제는 그들의 숫자가 전에 나타난 백여 명이 전부가 아닐 경우입니다.”
“……!”
“제가 지금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여기까지입니다. 판단은 성주께서 하시기 바랍니다.”
천양묵은 물론이고, 사야마저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진 듯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무거운 침묵이 방 안을 짓눌렀다.
침묵은 한참 동안 이어졌다.
그리고 혁무천이 차를 한 잔 더 비웠을 때 천양묵의 입이 열렸다.
“너는… 무엇을 바라고 그런 이야기를 해준 것이냐?”
“섬서의 혈겁에 대해 들으셨을 겁니다.”
“으으음. 그래, 들었다. 참으로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하더군.”
“어느 쪽이 이기든 중요한 것은 승리가 아닙니다. 피로 뒤덮인 황폐한 대지에서 무슨 행복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한 대지 위에서는 돈도, 무공도 소용이 없지요. 저는 세상이 그리 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 사건의 범인이… 그들이라는 거군.”
만마성도 섬서의 혈겁을 조사하면서 생존자들로부터 몇 가지 얻은 정보가 있었다.
그로 인해 정은맹을 도운 복면인들이 그 혈겁의 범인들일지 모른다는 추측을 하고 있었다. 확실한 증거가 없어서 확신을 하지 못하는 것뿐.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니었으면 합니다만.”
“내가 따로 뭘 해주길 바라느냐?”
“혹시 혈왕동의 혈공단과 비슷한 효력을 지닌 약재가 있습니까?”
“혈공단?”
“구음절맥과 심장이 약한 사람에게 좋은 영약이라면 더 좋습니다.”
“약고를 찾아보면 있을 것 같다만…… 정말 그것만 주면 되겠느냐?”
혁무천은 그 정도만 해도 만족했다.
그러나 천양묵이 먼저 그리 말하자,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더 준다는데 왜 마다해?
“부족하다 생각하시면, 나중에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딱 한 번이면 됩니다. 하기 싫은 일이면 안 해도 되고요.”
도발적인 혁무천의 말에 천양묵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도움이라는 게 무얼 위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자존심 때문에라도 안 하겠다고 할 수는 없었다.
“좋다, 그렇게 하지. 대신 만마성에 피해가 가는 일은 돕지 않을 것이니라.”
“물론이지요.”
***
만마성의 장로 천두공은 최근 들어서 오줌이 시원하게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기분 나쁜 잔뇨감 때문에 오줌을 자주 누었다.
아무래도 늙긴 늙은 모양이다.
오늘밤도 한 시진 동안 세 번이나 오줌을 쌌다.
“에이, 성에 있을 걸 괜히 나왔나?”
손자뻘인 젊은 장로들이 성에 남으라고 했다. 말은 안했지만, 노망 들은 거 아니냐는 표정도 보였었다.
그런데 자신의 백이십삼 년 인생 중 마지막 전쟁이 될지 모르는 싸움에서 빠지고 싶지 않았다.
싸움에 참가하지 못한다면 구경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런데 성에서 나오자 병이 더 심해진 듯했다.
‘더 심해지면 돌아가든가 해야겠군.’
싸움 구경도 좋지만 놀림을 받는 건 원치 않았다.
천두공은 씁쓸한 마음을 달래며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때 성주의 방 쪽에서 누군가가 나오는 게 보였다. 두 사람이었다.
‘이 깊은 밤에 무슨 일이지?’
그가 아는 한 성주는 깊은 밤에 사람을 잘 만나지 않는다.
부인에게 보낼 편지를 구상해야 하니까.
그런데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분명 외인인 듯 보였다. 한 사람은 사야가 분명했고.
천두공은 눈을 가늘게 뜨고 외인처럼 보이는 자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이 점점 커졌다.
“저, 저놈은……?”
그놈이 분명하다. 허락도 없이 만마총에 들어갔던 놈.
‘오냐, 이놈! 너 잘 만났다.’
그는 이제야 이곳에 온 보람을 느꼈다.
하지만 곧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성주가 왜 저놈을 만난 거지?’
아무래도 족치는 것은 잠시 뒤로 미루어야 할 것 같다. 뒤탈이 없으려면 놈이 성주를 만난 이유를 알아내야 한다.
사야와 함께 걷던 혁무천은 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저 나란히 걷고 있는 것뿐인데도 사야가 무슨 말인가를 하는 듯 느껴졌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그가 물었다.
“나에게 할 말이라도 있나?”
사야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역시 당신은 일반 사람과 다르군요.”
“무슨 뜻이지?”
“제가 부르는 것처럼 느껴졌죠?”
“…….”
“당신도 그 힘을 얻었나요?”
혁무천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제야 사야에게서 왜 이상한 느낌이 들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사야, 그녀도 혼돈의 힘을 얻은 사람 중 하나인 듯했다.
다만 종류가 다를 뿐.
혁무천은 부정하지 않았다.
“어떻게 알았지?”
“저도 확실히는 몰라요. 다만 그렇게 느껴졌을 뿐이죠.”
“밝혀서 좋을 것 없는 일은 모른 척하는 게 좋다.”
“알았어요. 그렇게 해요.”
사야가 그 말을 하면서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참으로 신비한 미소였다.
오죽하면 무심코 쳐다봤던 혁무천의 눈이 심하게 흔들렸다.
재빨리 시선을 돌린 혁무천이 말했다.
“너는 앞으로 웃지 마라.”
“풋.”
사야가 나직하니 소리 내어 웃었다.
하지만 곧 표정을 정리하고 말했다.
“정말 오랜만이에요, 남 앞에서 웃은 건. 한 십 년 됐나?”
그 이후 아무 말 없이 후원의 입구까지 걸었다.
사야는 그쯤에서 걸음을 멈췄다.
“언젠가는 제가 당신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할 거예요. 그때 솔직하게 말씀해주셨으면 해요.”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봐서.”
혁무천은 그렇게만 답하고 그곳을 떠났다.
사야는 한참 동안 그의 등을 바라보고는 몸을 돌렸다.
‘그래야 내가 당신을 어떻게 할 건지 결정을 내릴 수 있거든요.’
혁무천은 객당을 이십여 장 남겨 놓고 걸음을 멈추었다.
곧 누군가가 뒤로 다가왔다.
천천히 몸을 돌리자 노인이 보였다. 만마총에서 봤던 천두공이라는 노인이었다.
“흥! 이놈, 결국 이곳에서 만나는구나. 네놈이 뛰어야 벼룩이지.”
“오랜만에 뵙는군요.”
“오랜만? 남의 집안 무덤을 들락거린 놈이 낯짝도 두껍구나.”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설마 싸우기 위해 나오신 겁니까?”
“흥! 왜? 나는 싸우지 못할 것 같으냐?”
“하긴 저번에 보니까 아직 쌩쌩하시더군요.”
“얼굴이 비록 금방 무덤에 들어갈 늙은이처럼 보이긴 해도 젊은 놈들보다 더 건강하니라.”
오줌이 자주 마려운 것만 아니라면.
“제가 봐도 그렇게 보입니다.”
“어린놈이 뭘 아는군.”
가만? 뭐하는 거지?
천두공은 다시 눈에 힘을 주고 혁무천을 노려보았다.
“그런데 네놈이 왜 성주의 거처에서 나오는 거냐?”
“그거야 성주께서 부르셨으니 온 거 아닙니까?”
“너 같은 도둑놈을 성주가 왜 부른 거지?”
“아주 중요한 일 때문이죠.”
“중요한 일? 개뿔이나.”
“차 한잔 마실 거면 가시죠,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내가 지금 차나 마시려고 너를 쫓아온 줄 아느냐?”
“그럼 어떻게 하시자는 겁니까? 여기서 싸우실 겁니까?”
그건 좀 그렇다.
옥가장은 안 그래도 정파와의 싸움 때문에 초긴장 상태다. 여기서 싸우면 늙어서 노망났다는 말만 들을지도 모른다.
“일단 가시죠.”
혁무천은 그렇게만 말하고 몸을 돌려서 걸음을 옮겼다.
천두공은 어린놈의 건방진 행동에 발끈 화가 났지만, 어떻게 하지도 못했다.
‘저놈, 그때와 또 다른 것 같군. 얼마나 지났다고…….’
어린놈의 등이 산처럼 느껴졌다.
어둠조차 놈의 크기를 가리지 못했다.
‘젠장. 좋다, 이놈. 어디 어떻게 나오는지 보자.’
천두공은 할 수 없이 혁무천을 따라갔다.
천막 안에 있던 사람들은 혁무천이 웬 노인과 함께 들어오자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누구신가?”
송비가 먼저 물었다.
천두공이 송비를 힐끗 보고는 코웃음 쳤다.
“흥! 영락없이 장비처럼 생긴 놈이 궁금한 것도 많군. 어른을 보면 인사부터 할 것이지.”
“거, 노인네가 입이 팔팔한 걸 보니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사시겠군.”
“걱정 마라, 이놈아. 그때쯤 되면 내가 알아서 무덤으로 기어들어갈 거니까.”
툭툭 쏘아붙인 천두공은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방 안에 있는 놈들 모두 보통 놈들이 아니었다.
특히 눈알이나 아니나 쥐똥만 한 놈은 초절정경지에 오른 듯 보였다.
‘어디서 이런 놈들이 나온 거지?’
그때 혁무천이 탁자에 앉더니 찻잔에 차를 따랐다.
“그만 하시고 차나 드시죠. 식긴 했지만 향이 괜찮습니다.”
천두공은 어기적거리며 의자에 앉았다.
등잔불에 비친 혁무천의 얼굴이 똑바로 보였다.
전에는 분노가 치밀어서 자세히 뜯어볼 겨를도 없었다. 그런데 막상 앞에 앉아서 보니…….
‘정말 잘 생긴 놈이군.’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때 만마총에 들어간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흥! 이유는 무슨.”
“그곳을 지키던 노인이 뭔가가 없어졌다고 하더군요.”
“그걸 왜 네가 확인해?”
“제가 찾던 것일지도 몰라서요.”
“뭐? 네가 찾는 것이 왜 만마총의 무덤 속에 있단 말이냐?”
“누군가가 넣어 놓았기 때문이죠. 행여나 그걸 욕심내는 사람 손에 들어갈까 봐 걱정되어서 말입니다.”
“내가 그걸 어떻게 믿어?”
“그런데 정말 그 물건이었더군요. 비록 한발 늦어서 누군가가 훔쳐가긴 했습니다만.”
“어떤 놈이 감히 만마총에서 물건을 훔쳐간단 말이냐?”
“훔쳐간 사람이 누군지도 중요하지만, 문제는 그 물건의 정체지요.”
“왜? 그게 세상에서 가장 값진 물건이라도 된다더냐?”
“세상에서 제일 값진 물건은 아니지만, 절대 존재해서는 안 되는 물건이긴 합니다.”
“그게 뭔데?”
혁무천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차를 먼저 마셨다.
그가 말하지 않으니, 천두공이 오히려 애가 닳아서 다그치듯 물었다.
“왜 말을 못해?”
“한 가지 약속만 해주시면 말씀드리죠.”
혁무천이 그 말을 하자, 쳐다만 보던 비룡단원들이 제각각의 반응을 보였다.
“헛, 대형?”
“어?”
개중에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고.
‘뭐야? 이놈들이 왜 이래?’
천두공은 좌우를 쓱쓱 살펴보고는 인상을 썼다.
“약속? 뭔 약속?”
“제 허락이 있기 전까지는 절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셔야 합니다.”
“웃기는 놈이군. 내가 왜 그런 약속을 해?”
“그럼 더 묻지 마십시오. 저도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이놈이……!”
“성주께도 말씀드리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니 약속을 하기 전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말하지 않겠다고 하면 더 듣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이다.
더구나 성주에게도 말하지 않았다고 하지 않는가.
‘저놈들이 놀라는 걸 보면 뭐가 있긴 있는 거 같은데…….’
천두공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정말 그 약속만 하면 되느냐?”
“그렇습니다.”
“으음, 조, 좋다. 하마. 해! 한다고! 이제 말해봐라. 그게 뭔데 그리 숨기는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