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천화 24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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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53회 작성일소설 읽기 : 귀환천화 246화
246화
단 세 사람이 들어왔을 뿐인데도 객잔 안의 공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동짓달 한밤에 내린 서리가 온 세상을 얼려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무천. 맞나?”
적상천이 오만한 표정으로 물었다.
“맞아. 내가 무천이야. 그런데 너는 뭐지?”
‘너’라는 말에 적상천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도망쳤다더니, 겨우 여기까지밖에 오지 못한 건가?”
“도망? 여기 도망친 사람 있나?”
송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러다 어떤 생각을 떠올리고는,
탕!
손바닥으로 탁자를 치며 일어나서 눈을 치켜떴다.
“근데 어디서 반말이야? 새파랗게 어린 새끼가!”
적상천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어디서 장비처럼 무식하게 생긴 놈이!
하지만 그가 나서기 전에 백경이 손을 들어서 막았다. 그러고는 비룡단원들을 죽 둘러보고는 혁무천에게서 시선을 멈췄다.
“노부는 천화상단에서 왔다. 노부가 왜 왔는지 모르진 않겠지?”
겉으로는 오십 대로 보였다.
하지만 ‘노부’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쓰는 걸 보니 겉모습과 달리 나이 꽤나 먹은 듯했다.
사대천화는 나이가 많지 않았으니, 비천의 삼태상 중 한 사람일 가능성이 컸다.
품고 있는 기운을 봐도 그렇고.
“비천에서 나오신 분인 모양이군요.”
혁무천이 단도직입적으로 짚어서 말하자, 백경의 눈매가 살짝 꿈틀거렸다.
“아는 것이 많군.”
“삼태상 중 한 분인 것 같은데, 맞소?”
백경의 수더분한 인상이 처음으로 싸늘하게 굳어졌다.
“놀랍군. 우리를 알다니. 때로는 알 필요 없는 걸 알아서 죽음을 앞당길 때가 있지.”
“만약 천주명의 죽음 때문에 온 거라면 사람 잘못 찾아왔소.”
“노부는 그런 변명이나 들으려고 온 것이 아니다. 너를 잡아서 죄를 물으려 온 거지.”
“꽤 많은 분이 오신 것 같군요. 천기회에서도 왔고.”
“빠져나갈 생각은 안 하는 것이 좋을 거다. 목숨이라도 구하고 싶다면.”
피식.
혁무천이 차갑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거야 나중에 보면 알 거고……. 어떻소? 남의 터전을 부수는 건 천화상단이나 천기회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일일 텐데, 싸우더라도 나가서 싸우지요.”
“좋은 생각이군.”
백경은 흔쾌히 혁무천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돌아섰다.
“어르신, 저놈의 말을 들으실 겁니까?”
적상천이 머뭇거리며 부르자, 백경이 냉랭하게 말했다.
“조금 전에 들었지 않느냐? 남의 장사터가 부서지면 천화상단과 천기회가 욕을 먹을 거라고.”
명색이 정의를 추구한다는 천기회 아닌가.
천화상단 역시 장사꾼의 터전을 짓밟는 건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었다.
더구나 무천이 그 이름을 밝혔으니 소문이 퍼지는 건 금방이다.
“알겠습니다.”
적상천도 할 수 없이 백경의 말을 따랐다.
대신 혁무천 쪽을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허튼 짓 말고 순순히 따라 나와라.”
혁무천이 그를 보며 한마디 했다.
“신도명산도 어지간히 사람이 없나 보군. 당신 같은 자를 보내다니.”
“뭐야? 이 건방진 놈이……!”
적상천이 발끈해서 소리치자, 백경이 다그쳤다.
“뭐하는가?”
으드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간 적상천이 홱, 몸을 돌려서 객잔을 나섰다.
비룡단원들도 닥칠 일이 닥쳤다는 듯 마음을 다잡고 객잔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기 음식하고 차 값이오.”
목량이 은자를 한 냥 꺼내서 점소이를 향해 흔들고는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때 이층에서 탕초양이 말했다.
“우리도 가야 하나?”
입구 쪽을 향해 걸음을 옮기던 혁무천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연히. 비룡단원이 되었으니 일을 해야 하지 않겠소?”
“…….”
탕초양은 뭔지 몰라도 속은 느낌이 들었다.
혁무천이 그를 향해 몇 마디 덧붙였다.
“다만,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방어에 치중하면서 싸우시오. 겨우 쓸 만한 사람 얻었는데, 얻자마자 잃고 싶진 않으니까.”
그러고는 중년도사 귀원을 보며 전음을 보냈다.
전음을 들은 귀원이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그걸 저자가 어떻게……?’
혁무천은 그를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객잔을 나섰다.
***
“가봅시다, 사공 형.”
율이명은 남은 차를 마저 입안에 털어 넣고 검을 집어 들었다.
무천에게 연락이 왔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은 그는 눈을 빛냈다. 복수를 할 좋은 기회였다.
내향에는 마도연합에 가기 위한 무사들이 많으니 도적의 습격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터. 표행을 위한 호위 오십여 명만 남겨두고 무천에게 가기로 했다.
“정말 어이가 없는 놈들이군.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건가?”
사공진이 투덜거리며 율이명을 따라나섰다.
그런데 두 사람이 방을 나서서 율이명의 호위무사들과 함께 객잔의 일층으로 내려갔을 때였다.
대여섯 명이 객잔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 중 삼십 대로 보이는 자가 율이명 일행을 보고 물었다.
“이곳에 비룡장의 표행을 호위하고 온 무사들이 있다고 들었소만.”
“그렇다네. 그런데 무슨 일로 찾는가?”
“아, 귀하들이오? 나는 마황궁 팔마당의 부당주 오불광이라 하오.”
장한은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상대는 장사꾼인 비룡장의 호위무사들 아닌가. 일행 중에 나이가 제법 든 사람도 있었지만, 마황궁이라는 이름으로 반쯤은 무시했다.
그러고는 자신이 찾아온 이유를 밝혔다.
율이명은 오불광의 이야기를 듣고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더러 복우산으로 가달라고?”
“그렇소. 지금 서협의 무사들도 모두 복우산 안으로 들어가고 있소. 이곳에서 표행을 탈취할 만큼 간덩이 부은 놈들은 없으니 염려 말고 지원대에 합류해 주시오.”
“지금은 바쁜 일이 있어서 갈 수 없네.”
“말했지 않소? 복우산의 상황이 급하다고.”
“그건 자네가 판단했을 때의 일이고, 우린 우리 일을 처리해야만 하네.”
“협조하지 않겠다는 거요?”
오불광은 이마를 찌푸리며 턱을 쳐들고 율이명을 노려보았다.
율이명은 가소로웠지만, 마황궁 무사와 싸우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지금 이렇게 시간이 흘러가는 것도 아깝기만 했다.
“협조하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지금은 바빠서 갈 수 없단 말이네.”
“그 말이 그 말 아니오?”
그때 사공진이 짜증을 냈다.
“나는 사도맹의 사공진이다. 네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거냐?”
뭐? 사도맹의 미친개, 사공진?
오불광은 화들짝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만약 자신이 사도맹의 미친개와 말다툼 했다는 게 상부에 알려지기라도 하면 목이 잘릴지 모른다.
사공진이 마황궁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 미리 목을 잘라서 분노를 풀어주려 할지도…….
곧바로 꼬리를 내린 그는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사공 선배님께서 계신 줄 몰랐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내가 없었으면, 그럼 네가 단천검마와 한판 싸워보기라도 할 생각이었단 말이냐?”
‘헉! 단천검마 율이명?’
오불광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져서 율이명에게로 향했다.
율이명이 냉랭히 말했다.
“그래, 내가 검마보의 율이명이네.”
오불광은 후다닥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취했다.
상대는 마도십문 중 하나인 검마보의 주인. 마황궁주와 나란히 앉을 수 있는 사람이다.
사공진보다 상대하기가 더 어려운 신분.
“마황궁의 오불광이 보주를 뵈오!”
“우린 바쁘다고 했네만.”
이미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이 정도 시간 차이로 무슨 일이 있을까 싶었지만, 세상일이란 아무도 모르는 법이다.
“죄송합니다, 보주. 지금 상황이 워낙 어렵게 돌아가서…….”
“대충 내용은 들어서 알고 있네. 그에 대해서는 갔다 온 다음에 판단을 내리지.”
“아, 예…….”
“그만 비켜주게.”
오불광은 더 버틸 수 있을 만큼 간덩이가 크지 못했다.
옆으로 재빨리 비켜선 그가 넌지시 말했다.
“무슨 일이신지 알아도 되겠습니까, 보주?”
“내 동생 되는 사람을 어떤 놈들이 죽이려 한다는군. 만약 우리가 지체해서 일이 잘못 되기라도 했으면… 자네도 각오해야 할 거네.”
율이명은 냉랭히 말하고는 눈에 힘을 주었다.
“…….”
오불광은 자신이 제대로 한 건 했다는 걸 깨달았다.
‘아, 씨바…….’
그는 누군지도 모를 율이명의 동생이 무사하기를 간절히 빌었다. 부모님의 무사안녕도 이렇게 간절하게 빌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어떤 새낀지 몰라도 제발 살아 있어라. 그럼 내가 술 한잔 사줄 테니까.’
그렇게 오불광의 간절한(?) 기원을 뒤로 하고, 율이명은 일행과 함께 객잔을 나섰다.
***
진풍의 객잔 밖 대로는 이미 천기회와 천화상단의 무사 백여 명이 반원형으로 에워싼 상태였다.
객잔과 옆 건물의 지붕 위에도 혹시 모를 탈출로를 차단하기 위해서 상당한 숫자의 무사들이 서 있었다.
합하면 이백 명은 충분히 될 듯했다.
혁무천 일행이 나가자, 기다리고 있던 백경이 말했다.
“마지막 기회를 주마. 지금이라도 무기를 버리고 순순히 내 말을 따르면 목숨은 살려주마.”
혁무천이 그를 빤히 바라보면서 답했다.
“노인네가 살기만 오래 살았지, 아직 세상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많군.”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투에 백경이 눈을 홉떴다.
뭐라? 노인네가 뭐가 어째? 세상에 대해서 모르는 게 많다고?
하도 어이가 없어 그가 멈칫한 사이, 그의 좌측에 있던 중년무사 둘이 참지 못하고 튀어나갔다.
“놈!”
“죽인다!”
송곳 같은 일갈.
삼 장 간격을 찰나에 좁히고 날아가면서 한 사람은 검을 빼들고, 한 사람은 칼을 빼들었다.
두 사람은 무기를 빼듦과 동시에 한 순간의 머뭇거림도 없이 혁무천을 공격했다.
빠르고 강력한 공격!
눈을 깜빡일 시간조차 없었다.
검과 도에서 뻗친 기운이 대기를 단숨에 가르며 혁무천을 베어갔다.
툭.
혁무천은 날아드는 두 사람을 보면서 천망검을 좌수 엄지로 밀어 올렸다. 입가로 보일 듯 말 듯 미소가 번졌다.
‘미끼를 제대로 물었군.’
일순간, 그에게서 미증유의 가공할 기세가 폭발하듯 피어났다.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저 바람도 없는데 머리카락이 휘날리고 옷자락이 펄럭이는 게 이상해 보일 뿐이었다.
그러나 당사자 둘은 자신들의 몸이 끈적끈적한 늪 속에 처박힌 듯했다.
숨이 턱 막히고, 눈앞의 사물이 순간적으로 뒤틀렸다.
벼락처럼 뻗어나간 공격이 늪 속에 빠져 목표를 잃고 허우적거리는 느낌.
머릿속에서 비명처럼 경고음이 울렸다.
하지만 현 상황을 피할 수도, 대처할 방법을 생각할 시간도 없었다.
그때 눈앞에서 벼락이 번쩍였다.
묵빛이 감도는 벼락은 찰나 간에 두 사람의 몸을 꿰뚫고 지나갔다.
입이 떡 벌어졌다.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끄어억.’
목 안에서만 맴도는 비명.
털썩!
강한 충격이 전신을 두들긴 후에야 그들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깨달았다.
눈앞이 붉은 핏물로 물들어갔다.
그때였다.
“어디서 감히!”
노성을 터트린 백경이 한 발을 죽 앞으로 내딛으며 쌍장을 떨쳤다.
숨이 끊어져 가는 두 중년인은 그가 어릴 때부터 키운 무사들이었다.
무천을 공격하는 걸 보고도 말리지 않은 것은, 설마 절정고수인 두 사람이 몇 초식도 받아내지 못하고 부상을 입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숨을 한번 쉬기도 전에 당했다.
단순한 부상을 입은 것도 아니고, 숨이 끊어지기 직전.
뒷목이 후끈 달아오르고, 분노가 그의 이성을 잠식했다.
고오오오오!
귀청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가공할 힘이 실린 장력이 혁무천을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