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천화 27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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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28회 작성일소설 읽기 : 귀환천화 272화
272화
혁무천은 안내를 받아서 남궁세가 안으로 들어갔다.
전과 달라진 점이라면 파손된 건물이 눈에 띈다는 것이었다.
멋지게 자란 나무도 칼날에 잘렸고, 정원의 석등도 부서진 채 방치되어 있었다.
그 모든 것이 남궁세가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듯해서 격세지감이 느껴졌다.
남궁태의 거처로 안내된 혁무천은 남궁태와 마주 앉았다.
“오면서 보셨겠지만 사정이 썩 좋은 편은 아니오.”
남궁태가 먼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겉모습은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사람이지.”
혁무천은 남궁세가를 직접 보고서야 소문과 달리 남궁세가가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게라도 생각해주니 고맙소.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소?”
“얼마 전에 상관중이라는 사람이 찾아왔을 거야.”
남궁태는 부인하려 했지만, 혁무천의 눈을 보고는 생각을 바꾸었다.
이미 확신을 갖고 찾아온 듯했다. 부정하는 것도 자존심이 상했다.
“그렇소. 무엇 때문에 묻는지 모르겠소만, 상관 대협은 하루를 머문 후 일행과 함께 떠나셨소.”
“그 일행이 누군지 아나? 알려주었으면 좋겠는데.”
“왜 내가 그걸 알려줘야 한단 말이오?”
“남궁세가를 위해서.”
“본가를 위해서?”
남궁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분노를 삭이는 듯 입술을 꾹 다물고 혁무천을 노려보았다.
“상관중은 내 친구의 부친이야. 만약 그분의 몸에 이상이 생겼으면 성질 더러운 내 친구가 분노할 거다. 그리고 나는 친구가 부탁하면 거절할 수 없어.”
혁무천의 그 말에 남궁태는 이마를 찌푸렸다.
무천이 성질 더러운 친구라고 할 정도면 평범한 자는 아닐 것이다. 거기다 무천까지 적으로 대해야 한다면 어려움이 가중될 수밖에 없다.
남궁태가 고민하자, 혁무천이 은근슬쩍 압박했다.
“그 일행의 이름을 알려주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그리 중요한 비밀도 아닌 것 같은데.”
비밀이어서 말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저 순순히 알려주기가 싫었던 것일 뿐.
그런데 고집을 피우고 알려주지 않았다가는 엉뚱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남궁태는 자존심이 조금 상했지만 결국 이름 하나를 말해주었다.
“좋소, 알려드리지요. 상관 대협의 일행 중 한 사람이 검협(劍俠) 초산명이었소. 내가 아는 분은 그분밖에 없었소.”
“초산명? 혹시 천기회의 장로?”
“맞소. 그분이오.”
“초산명과 함께 온 사람들. 혹시 그들이 남쪽의 사투리를 쓰지 않았나?”
뜬금없는 혁무천의 질문에 남궁태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그랬던 것 같소. 말을 짧게 했는데, 중원에서는 좀처럼 쓰지 않는 말투를 사용했소.”
“하나 묻지. 남궁세가는 세외의 세력이 중원으로 들어와서 활동하는 걸 어떻게 생각하나?”
“무슨 뜻으로 묻는 건지 모르겠소만, 본가는 외세가 중원에 들어와서 설치는 걸 좋아하지 않소.”
“그 말, 기억해두지.”
“무 형은 우리가 모르는 뭔가를 알고 계신 것 같소만. 말씀해주면 경청하리다.”
“나중에. 좀 더 조사를 해보고, 확실한 것을 알게 되면 바로 알려드리지.”
혁무천은 남궁태와의 대화가 끝나자 바로 남궁세가에서 나왔다.
표정이 굳어 있었다.
검협 초산명. 그 이름 때문이었다.
초산명은 천기회의 주요 간부 중 한 사람이다.
남황궁 무리로 의심되는 자들을 만나러 간 상관중이 그와 함께 갔다는 건 한 가지 사실을 의미했다.
그들이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뜻.
또한 모습을 숨긴 수상한 무리가 정은맹에 천기회 무사로 들어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래도 남궁태의 대답을 들은 것은 적지 않은 소득이군.’
나중에 생각이 바뀌어서 달리 행동할지 모르지만, 최소한 남궁세가를 다그칠 명분은 얻은 셈이었다.
***
혁무천 일행을 보낸 후, 남궁태는 곧바로 남궁선을 만났다.
“초산명의 이름을 물어봤다고?”
“예, 아버님.”
“무엇 때문이라고는 말하지 않더냐?”
“단지 ‘상관중을 찾기 위해서’라고만 했습니다.”
“상관중이 무천의 친구 부친이란 말이지?”
“예, 아버님. 분명히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세외의 세력이 중원에 들어와서 활동할 경우 본가의 선택을 물어보았습니다. 일단은 외세가 중원에서 설치는 걸 원치 않는다고 했습니다만, 그런 질문을 한 의도가 수상합니다.”
남궁선은 눈을 가늘게 좁히고 고민하더니 말했다.
“묵천단에게 돌아오라고 해라.”
묵천단은 남궁세가가 심혈을 기울여서 키운 최정예 무사단이다. 지금 그들 중 절반 정도는 모종의 임무를 띠고 세가를 떠나 있었다.
“아버님?”
“느낌이 좋지 않아.”
“하지만 지금 묵천단을 빼내면 저들이 문제 삼을 수 있습니다.”
“본가의 상황이 좋지 않다고 하면 저들도 무작정 우리 탓만 하지는 못할 거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지금 중요한 것은 본가의 안전이다. 묵천단이 없는 상황에서 일이 터지면 너무 위험해.”
남궁선이 뜻을 굽히지 않자 남궁태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아버님. 즉시 연락을 취하겠습니다.”
그때 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가주,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금영당주 남궁정의 목소리였다.
“들어와라.”
문이 열리고 남궁정이 들어왔다. 평소 행동이 진중한 그의 표정에 다급함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무슨 일인데 그런 표정이냐?”
“남창에 다녀오던 상단이 동성에서 백마궁과 시비가 붙었다 합니다.”
동성은 천주산 끝자락에 있는 마을로, 마도십문 중 하나인 백마궁의 권역이기도 했다.
“뭐야? 그래서 어떻게 됐느냐?”
“남창에 갔던 스물다섯 사람 중 스무 명이 죽고 다섯 명만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남궁선은 이를 악물고 눈을 치켜떴다.
백마궁과 간헐적으로 충돌이 있긴 했지만 다수의 사람이 죽는 사건은 거의 없었다.
서로가 서로의 체면을 세워주며 지냈으니까.
그런데 스무 명이나 되는 사람을 죽였다면, 더 이상 지금 같은 관계를 유지할 마음이 없다는 말이었다.
한마디로, 남궁세가를 이제는 장기판 졸로 보고 있다는 뜻.
“운아는…… 어떻게 되었다더냐?”
남창으로 간 상단을 이끈 책임자 중 한 사람이 세가의 둘째공자 남궁운이었다.
“다행히 목숨은 건진 것 같습니다.”
“놈들에게 잡혀 있느냐?”
“예, 가주.”
“놈들이 원하는 것이 있을 것 같다만.”
남궁선은 남궁세가를 이끄는 가주답게 상황을 정확히 유추해냈다.
남궁정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세가로 인해 자신들의 사업이 피해를 입었으니 은자 백만 냥을 내놓으랍니다.”
억지였다. 남창에 간 상단의 거래 물량은 은자 일이만 냥밖에 되지 않았다. 백만 냥을 손해 봤다는 말은 개소리였다.
남궁태도 그 사실을 잘 알기에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본 세가를 더 이상 인정하지 않겠다는 거군요.”
남궁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 같네.”
“어쨌든 일단은 운아와 잡힌 사람들을 구하는 게 우선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돈을 주겠다는 건가?”
“한 번으로 끝날 일이라면 주지 못할 것도 없지요. 하지만 그들은 절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남궁선은 남궁태의 냉정한 말에 마음이 씁쓸했다.
동생의 목숨이 걸린 일인데 돈을 따지다니.
하지만 자신에게 묻는다 해도 은자 백만 냥을 선뜻 주겠다고 하지는 못했을 터.
남궁선도 냉정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내 생각도 같다. 놈들은 세가의 기둥뿌리를 뽑을 때까지 시비를 걸 거다. 그런데 문제는 운아야. 놈들은 운아의 목숨을 놓고 흥정을 하려고 할 거다.”
“어떻게든 구해보겠습니다.”
“상대는 백마궁이다. 방법이 있겠느냐?”
남궁태의 훤한 이마에 두 줄기 골이 파였다. 눈도 가늘어졌다.
이런저런 방법을 떠올려보던 그의 머릿속에서 문득 한 사람 얼굴이 떠올랐다.
‘그자라면…….’
***
일행과 함께 합비를 나선 혁무천은 걸음을 재촉했다.
은설과 동행한 만큼 여행의 재미도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은설을 데려간 것이기도 했고.
하지만 아쉽게도 그럴 여유가 없었다.
아무래도 강호를 휘감고 도는 혼돈의 회오리가 점점 강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은설이 왠지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걸음을 늦추었다.
처음에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저 여행을 즐기고 싶은가보다고 생각했을 뿐.
다른 사람들 역시 조금도 바쁘지 않은 표정이었다. 바쁘기는커녕 동대안은 탕초양과 죽이 맞아서 희희낙락했다.
그래서 혁무천도 보조를 맞추며 편하게 생각했다.
‘하긴 이렇게라도 함께 걷는 게 어디야.’
은설과 단 둘이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렇게 혁무천 일행이 삼십 리쯤 걸었을 때였다.
두두두두두.
갈대밭 사이로 난 관도를 걸어가는데 뒤에서 급박한 말발굽소리가 들렸다.
‘누가 이렇게 말을 모는 거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불렀다.
“무 형!”
고개를 돌리자 말을 타고 달려오는 자들이 보였다.
모두 다섯 사람.
그 중 한 사람은 무천이 조금 전에 만났던 자였다.
남궁태. 남궁세가의 소가주.
혁무천은 걸음을 멈추고 그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곧 일행 앞에 말을 멈춰 세운 남궁태가 말에서 내렸다.
“다행히 멀리 가시지는 않았군요.”
말투로 봐서는 자신을 찾기 위해 나선 듯했다.
“무슨 일이지?”
“드릴 말씀이 있소.”
남궁태는 솔직하게 백마궁과 벌어진 사건을 이야기했다.
혁무천은 그의 이야기를 다 듣고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남궁운이라면 그도 알고 있었다. 그 뺀질뺀질 얼굴을 언제 한번 때려주고 싶었지 않은가.
백마궁에 잡혀 있다니 고소한 마음마저 들었다.
“그래서, 나보고 그를 구하는데 도와달라?”
“그렇소.”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인 줄 아나?”
“저도 무 형이 바쁜 분인 줄은 아오. 도와주시오.”
남궁태는 동생을 위해서 자존심을 접었다.
본래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혁무천의 일행을 보고 마음을 바꿨다.
자신보다 하수가 아닌 고수가 둘은 되었다. 다른 세 사람도 최소한 절정경지에 오른 고수였다.
그런데 한쪽에 서 있던 은설이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오빠, 도와주면 안 돼요?”
“응?”
“죄도 없는 사람들이 백마궁에 잡혔다고 하잖아요.”
백마궁. 그녀는 그 이름만으로도 분노가 솟구쳤다.
“아버지의 복수까지 해달라고는 안 할 게요. 그들이 죄 없는 사람을 잡아가는 나쁜 짓을 하게 놔두면 안 되잖아요.”
혁무천은 그제야 자신이 뭘 놓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설아는 아버지를 고문해서 죽게 만든 백마궁에 복수를 하고 싶어 했다.
그런데 백마궁은 경공을 펼칠 경우 하루면 갈 수 있는 곳에 있었다.
어쩌면 설아는 자신이 백마궁을 혼내주길 바랐을지 모른다.
행여나 자신에게 부담을 줄까봐 말을 못한 것뿐.
아마 자신이 계속 외면했다면, 설아 혼자 백마궁에 갔을지도…….
‘이런 멍청한!’
자신이 비룡장에 들어가서 상가를 키운 이유가 무엇이든가.
설아의 복수를 해주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런데 어느새 자신은 그 목적을 잊고 있었다.
만약 설아 혼자 그곳에 가서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면?
그 생각을 하자 가슴이 서늘해진 혁무천은 짐짓 주먹을 불끈 쥐고 웃었다.
“하, 하, 하. 설아 말이 맞다. 그런 나쁜 놈들을 그냥 놔두면 안 되지! 이 오빠가 가서 혼내주마.”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이상해 보이는 법.
사람들은 그를 이상한 사람 보듯 쳐다봤다.
말하는 투가 너무나 어색해서 뭔가 부족한 사람처럼 보였다.
‘본래 저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여자에게 약한 면이 있군.’
하지만 혁무천은 그 와중에도 챙길 건 철저히 챙겼다.
“그런데 우리가 도와주면 남궁세가에서는 뭘 줄 거지?”